'4월 위기설' 다시 불붙은 북핵 막전막후

푸틴이 뛰니 김정은도 펄쩍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어렸을 때 크게 싸운 형제가 있다. 격렬한 싸움 끝에 형제는 결국 따로 살기로 마음먹고 수십년째 얼굴을 안 보고 살아왔다.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살다 보니 서로에 대한 정은 사라진 모양이다. 현재 둘은 이해득실만 따지는 관계가 됐고, 옆집 사람들과 더욱 자주 어울리며 가끔은 서로를 비난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부유해진’ 형 쪽에서 동생한테 여러 차례 화해하자고 시도해봤지만, 자존심만 남은 ‘가난한’ 동생 쪽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몇 년 전부터 동생은 총을 만들어 형을 위협하려 한다. 한국과 북한의 이야기다.

1980년 대생과 1990년 대생의 어렸을 적 소원은 언제나 통일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장려한 통일 노래 ‘우리의 소원’은 이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또렷이 박혀있다. 자연스럽게 소원을 ‘강요받게’ 되었고, 언젠가 꼭 그 꿈이 이뤄질 줄만 알았다. 

좋은 기억도
잠시 잠깐

당시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통일은 꼭 해야 한다고 가르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 통일의 중요성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대로 분단 상태가 굳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이제 60년째. 어른들은 이산가족이 없고, 북한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밀레니얼 세대들이 북한을 점점 ‘남’으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날의 걱정은 지금 현실이 됐다. 현재 2030세대는 어릴적 노래 구절과는 달리 통일을 ‘우리의 소원’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지난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은 전체 국민의 44.6%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의 통일에 대한 인식은 전체 연령대 중에 가장 좋지 못했다.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한 부정을 나타낸 약 30%의 여론층에서 20대는 42.9%를, 30대는 34.6%를 차지했다. 강한 부정 여론의 약 77.5%가 밀레니얼 세대였던 것이다.

통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점점 낮아지는 통일 부정 여론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게 분석한 이유는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북한 사람들을 우리의 형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현재의 기성세대들과는 달리, 밀레니얼 세대들은 북한을 전쟁 위험을 초래하는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같은 연구에서 통일평화연구원 측은 세대별로 북한 핵연구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바 있다. 여기서 2030세대는 북한 핵에 대해 위협을 느끼냐는 질문에 75% 이상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북한 핵 뉴스만 60년간 들어
통일 싫은 요즘 세대 시큰둥

이 역시 평균치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처럼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는 사실상 백지 상태의 2030세대들이 통일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요인은 ‘북한 핵’ 때문이라는 것이 여론조사 기관의 의견이었다.


이들이 자라오면서 북한을 겪을 창구는 뉴스밖에 없었고, 뉴스에는 항상 핵무기 위협 관련 소식들이 보도됐다. 언제부터 핵이 북한 관련 뉴스를 지배하기 시작했을까.

사실 북한 핵개발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북한은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핵무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한국전쟁당시 미국이 가한 핵무기 위협에 시달린 북한은 1960년대 영변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며 핵무기 개발의 초석을 깔았다.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 7월 비로소 영변에 실험용 원자로를 착공한 후 실질적인 연구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이런 움직임이 세간에 알려지자 국제기구는 북한의 핵개발 억제에 서서히 시동을 건다. 북한은 영변 원자로가 무기 개발용이 아니라며 한사코 둘러댔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985년 12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6년 뒤인 1991년 남북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하며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뜻이 없음을 재차 알렸다.

안심하고 있던 한국과 세계 국제기구가 뒤통수를 맞은 건 1994년의 일이다. 북한이 원자력기구(IAEA)에 탈퇴선언문을 제출한 것이다.

이때를 일컬어 ‘제 1차 북핵 위기’라 부른다. 원자력기구 탈퇴로 지금까지 원자력에 대한 연구와 핵기술을 무기화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뜻을 세계에 내비친 것이며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북한에 파견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이끌어낸 결과는 ‘제네바 합의’였다. 합의의 주요 골자는 미국이 북한에게 자원을 지원하는 대신 북한은 핵시설을 동결 및 해체한다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북한이 핵무기를 다르게 인식했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핵을 자국의 안보를 위한 ‘방어수단’으로 인식해왔지만, 이때부터 돈으로 바꿔 먹을 수 있는 ‘돈벌이’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북한학을 전공한 한 교수는 실제로 북한은 이때를 기점으로 핵을 외교용 협상카드로 활용해왔다고 전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외교 목적설’이라 부른다.

상당히 높은 
수준 완성도

제네바 합의 당시 합의한 자원 지원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자, 북한은 곧바로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고 2002년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곧이어 핵동결 해제를 발표하고 핵확산 금지조약까지 탈퇴하기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때를 ‘제 2차 북핵 위기’라고 부른다.

이후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고, 미사일 발사와 ‘제1차 핵실험’을 연달아 진행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은 자국이 폭탄을 만들었고, 이를 배달할 미사일까지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사활을 걸고 만들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국제기구는 다시 한 번 북한과의 협상을 진행한다.

2007년 2월 중국·북한·러시아·미국·한국·일본이 참여한 6자 회담에서 자원 지원을 다시 재개하고, 핵시설 폐쇄와 불능화, 핵사찰 수용을 하기로 합의했다. 합의 후 북한은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고 냉각탑을 폭파한 후, 핵 관련 3가지 시설의 10가지 불능화를 실시했다. 

최초로 실질적인 북한의 핵 불능화가 실행됐던 6자 회담이 삐걱거리기 시작한건 불과 1년이 지난 2008년이었다.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했고, 미국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세계의 대북 기조가 상당히 달라지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6자 회담에서 합의했던 사항들이 바뀐 정권하에서 모두 무산됐다.


이에 북한은 곧바로 2009년 ‘제2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후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신고에 관한 진실공방이 수차례 오가던 중 2011년 12월, 핵개발의 최고 책임자인 김정일이 사망했다. 그의 사망후 북핵 논의는 어지러운 형국을 맞았다.

이때 여론에서는 혹시나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오히려 더욱 빨리 핵 개발이 완성될 것이라는 우려가 공존했다. 새로운 리더로 등장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기대하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핵무기 완성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번엔
진짜다?

핵개발은 둘째 치고, 김 위원장은 로켓 개발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했다.

2013년 은하 로켓 발사 후 ‘제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3년 뒤인 2016년에는 ‘4차 핵실험’과 ICBM의 개발이 완료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핵 전문가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현재 북한의 핵폭탄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며 “그러나, ICBM과 기타 미사일 및 로켓의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해왔다.

수십년간 연구가 진행된 핵폭탄은 이미 완성됐지만, 이를 배달할 미사일 기술은 아직 미흡하다는 것이 지금 학계의 정설이다.

핵무기 개발 의지를 다진 후로 약 60년에 걸쳐, 북한 핵무기는 완성됐다. 그동안 젊은 세대는 지겹도록 북핵 관련 뉴스를 들어왔고, 이는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견인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에 수차례 제약을 걸고 실제로 핵무기 불능화 단계까지 시도했지만, 어지러운 세계 정세를 틈타 북한은 결국 최종 목표까지 도달했다. 북한 입장에서 남은 과제는 핵폭탄을 정확히 실어나를 미사일 개발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북한 마음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핵무기를 얻기까지 북한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국제 제재를 받으며 고사 직전까지 몰려갔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북한은 현재 사상 최악의 식량난을 겪고 있다.

북한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인식해야만 한다. 그간의 역사를 볼 때,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북한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2000년대부터 이에 대한 국제기구의 제재가 시작되자 이를 외교협상카드로 활용했다.

2008년 6자 회담이 최종 결렬되면서 북한은 핵을 외교협상카드를 넘어 국가 전체의 숙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2008년 이전까지는 북한이 핵을 협상용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를 달리 해석한다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라며 “북한이 자신들의 안보가 보장되고 경제적인 인센티브를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6자 회담 결렬로 설득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안보로 시작해 돈벌이로 전락
‘강대강’ 윤석열 정부 선택은?

과거에 북한이 핵을 엿바꿔 먹는 고철덩어리로 활용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6자 회담 결렬을 기점으로 그 인식이 국가 차원의 정통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북한은 최선을 다해서 핵을 개발한 나라고 정권의 정통성과도 연관있을 만큼 핵무기에 대한 인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지하다”고 평가했다.

한편 박교수는 요즘 세간에서 화제 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핵과 북한 핵 포기에 대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1994년 비핵화 선언을 하고 핵무기 전체를 파기하는 대신 세계로부터 안보에 대한 보장을 약속받은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이때 했던 약속은 무참히 깨지게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북한이 핵에 더욱 집착하게 될 것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러나 박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했을 당시와 지금 한반도에 처한 핵 위협은 많은 차이가 있다”며 “우크라이나는 핵을 개발한 적이 없다. 소련에 소속됐을 당시 핵을 일방적으로 ‘배치’받았을 뿐이며 이를 관리할 능력도, 여건도 되지 않는 나라였다”고 말했다. 

이어 “반면 북한은 핵을 직접 개발한 나라고 이를 관리하고 미사일까지 개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사태가 북한의 핵무기 포기와 한반도 전쟁 위기설과 엮어 생각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 상태고,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에 대한 명분을 하나 더 만들어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 위협에 큰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 아래에 있는 북한을 한국과 국제기구가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현재 없다. 어수선한 국제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의지는 점점 확고해지고 있으며, 그 기술도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다만 한국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은 제재를 똑같이 이어나가는 ‘외교법’이나 전술핵 재배치, 사드 추가 배치 등 ‘군사 대응법’이 있다.

차기 대통령으로 취임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후자의 방법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특히 그가 유심히 검토 중인 사항은 사드 추가 배치다.

기존 경북 성주군에 배치된 주한미군 사드는 서울과 수도권까지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에 충청도나 경기도 강원도 등 수도권을 커버할 수 있는 지역에 추가로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일요시사>는 북핵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다수의 전문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들이 입을 모아 내놓은 답변은 “해법이 없다”였다.

전문가들도
해법 없다”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핵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이들은 북핵 해결의 정답은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오래된 숙제는 이제 윤 당선인에게 넘어갔다. 이미 대선운동 과정에서 ‘강대강’ 기조로 접근할 것을 공언한 윤 당선인이 핵문제를 해결할 첫 번째 대통령이 될지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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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곽종근 공소장에 담긴 윤 ‘2차 계엄’ 정황

김용현·곽종근 공소장에 담긴 윤 ‘2차 계엄’ 정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12·3 불법 계엄이 국회서 해제된 지 한 달이 지났다. 검찰은 사건에 연루된 군 수뇌부들을 연달아 재판에 넘기는 과정서 2차 계엄 시도 정황을 포착했다. 구속 기소된 일부 장성들이 지휘관들에게 복귀가 아닌 대기 명령을 내린 게 핵심이다. 정보사도 빠지지 않았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계엄에 개입된 정보사는 노상원 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주도면밀히 움직였다. 검찰은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국방부 조사본부가 연합된 공조수사본부(이하 공조본)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수사 한 달여 만에 군 수뇌부를 줄기소 처리했다. 검찰은 내란 수괴(우두머리)로 윤석열 대통령을 지목했다. 군 수뇌부들의 공소장에는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의 역할이 적나라하게 적시돼있었다. 정보사 역할 적나라 적시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본부장 박세현 서울고검장)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시작으로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을 구속 기소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이들의 공소장엔 윤 대통령이 150회 이상 등장하고, 기소된 당사자보다도 훨씬 많이 언급된다. 법조계에서는 사실상 윤 대통령 공소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검찰은 윤 대통령이 김 전 장관 등과 함께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봤다. 또 수사 과정서 윤 대통령이 지난해 3월부터 비상계엄을 염두에 뒀고, 계엄 당일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라고 지시한 정황도 포착됐다. 이 외에도 검찰은 각 사령관들을 포함한 군 관계자들을 조사해 계엄 당일 윤 대통령이 비화폰(군 보안폰)으로 직접 전화하면서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서 (국회의원들을)다 끄집어내라”고 독촉하는 등 국회 봉쇄를 직접 지시한 사실을 밝혀냈다. 가장 먼저 윤 대통령에게 피의자 출석 통보를 한 것은 검찰이었다. 검찰은 지난달 15일 윤 대통령에게 1차 출석 요청을 했지만, 윤 대통령 측은 “변호인단 구성이 완료되지 않았다”며 불출석했다. 검찰은 윤 대통령에 대한 2차 출석 통보를 한 이후 수사권 논란이 커지고 공수처가 이첩을 요구하자 윤 대통령 사건을 공수처에 넘겼다. 경찰은 지난달 4일 윤 대통령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한 직후 특별수사단(단장 우종수 국가수사본부장)을 만들고, 공수처, 국방부 조사본부와 함께 공조본을 꾸려 동시다발적으로 수사를 진행해 왔다. 계엄 전 이른바 ‘롯데리아 회동’을 갖고 계엄을 사전 기획한 혐의를 받는 ‘계엄의 배후’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1차 수사도 마무리한 상태다. 특수단이 최근까지 입건한 피의자는 대통령실 및 당정 관계자 25명과 군 관계자 19명, 경찰 5명 등 총 49명에 달한다. 검, 한 달 만에 군 핵심 수뇌부 기소 짙은 플랜 B 논의 정황 “지휘부 대기” 그러나 정작 이번 사태의 ‘정점’인 윤 대통령 사건을 맡은 공수처의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지난 7일까지 공수처가 신병을 확보한 피의자는 문 전 사령관 1명뿐이다. 공수처는 검찰이 이미 두 차례 출석을 통보했던 윤 대통령에게 추가로 3차례나 더 출석을 통보한 뒤 체포영장을 발부받았지만, 지난 3일 집행 5시간반 만에 철수하며 “수사력과 수사 의지가 모두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체포영장 집행을 일임하려다가 국수본이 “위법 소지가 있다”고 반발하자 철회하기도 했다. 검찰이 윤 대통령과 함께 이첩한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수사도 제자리걸음 수준인 건 마찬가지다. 현 형사소송법과 공수처법 등을 따져보면 검찰은 기소권이 있으나 내란죄 수사권이 없다. 공수처도 내란죄 수사권이 없어 직권남용 관련 범죄로 내란 혐의를 입건해 윤 대통령을 수사 중이다. 현행법상 내란죄 수사권이 있는 경찰은 윤 대통령 사건을 공수처로 이첩하고 체포영장 집행 등에 협력 중이다. 특히 공수처는 대통령을 기소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을 체포하더라도 기소하려면 검찰에 다시 넘겨야 한다. 애초부터 검찰과 공수처, 경찰이 합동수사본부를 꾸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앞서 대검은 공수처에 합동수사를 3차례 제안했지만,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사건 이첩 강행 규정을 들며 거부했고, 결국 검찰은 윤 대통령 사건을 이첩했다. 검찰은 윤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요구안 가결 이후에도 ‘2번, 3번 계엄 선포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음을 증거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윤 대통령이 2차 계엄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은 계엄 직후부터 제기돼왔다. 국회서 계엄 해제요구안이 통과된 지 3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상계엄을 해제했기 때문이다. 정점 수사 지지부진 박 총장은 윤 대통령이 계엄사령부 상황실이 설치된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을 방문했다고 박 총장이 국회서 증언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부승찬 의원은 당시 윤 대통령이 ‘2차 계엄이라도 해서 국회를 접수하라’는 투로 이야기했고, 그래서 7공수여단과 13공수여단이 새벽 3시 반 복귀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계엄 해제 당일인 지난달 4일 오후 김주현 대통령실 민정수석, 박성재 법무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이 장관 등이 대통령 안가(안전가옥)서 모임을 한 것을 두고도 2차 계엄을 논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검찰 관계자는 2차 계엄 의혹과 관련해 “당연히 의혹이 있는 부분은 수사할 예정이고 일부 수사 중이다. 꼭 입증해야 하는 건 실행 행위가 있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박 총장이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의결 후에도 육군본부에 있던 참모진들을 계엄사령부로 출동하도록 지시한 정황도 2차 계엄 의혹의 중요한 근거라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박 총장은 지난달 4일 새벽 3시3분 참모진들에게 계엄사령부가 있는 서울 용산 합동참모본부로 모이도록 지시했다. 당시 지시를 내린 시각은 국회의 비상계엄 해체요구안이 가결된 이후였다. 공소장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 의결 후 즉각 비상계엄 해제를 발표하지 않고, 계엄 다음날 오전 1시16분~1시47분경 합동참모본부 지하에 위치한 결심지원실에 모여 관련 논의를 계속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김 전 장관은 이날 오전 2시13분에 박 총장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 재차 투입 여부를 물었고 박 총장은 어렵다는 취지의 답변을 남겼다. 박 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된 이후 계엄사령부 구성 및 소집을 위해 어떤 지시를 했는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군내 별동대 꾸리려 시도 노 전 사령관은 계엄 선포 직후 군내 자신이 지휘하는 별동대를 꾸리려 했다. 경찰은 수사 2단이 부정선거 의혹을 확신하는 노 전 사령관 등이 선관위 장악을 위해 구상한 조직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일 경찰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전·현직 군 관계자들과 지난해 11월1일과 3일 햄버거집서 두 차례 만나 수사 2단 설치를 논의했다. 수사 2단은 계엄 발령 이후 구성되는 합동수사본부와 별도로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구체적 임무는 선관위 서버 확보였다. 경찰은 지난달 12일 국방부 압수수색을 통해 수사 2단과 관련된 일반명령 문건과 이에 근거해 작성된 인사 발령 공문을 확보했다. 수사 2단은 3개의 부로 나뉘는데, 단장부터 부대원까지 총 60여명이 인사 발령 명단에 포함됐다. 수사2단은 1·2·3대로 나뉜다. 계엄 사태에 연루돼 업무가 배제된 김모 대령이 1대장을, 노 전 사령관과 햄버거집 회동을 한 정보사 김·정 대령이 각각 2·3대장을 맡는 것으로 계획됐다. 이 조직은 예비역인 노 전 사령관, 국방부 조사본부 출신으로 예비역인 김용군 전 대령이 실질적으로 지휘하려 했다. 이들의 주임무는 선관위 서버 탈취와 선관위 직원 납치·감금·심문이었다. 정 대령은 앞선 조사에서 선관위 장악을 위해 직원들을 케이블타이, 두건, 마스크 등을 사용해 무력 통제한 뒤 특정 장소에 감금하는 방안을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등과 함께 준비했다고 진술했다. 국무회의 의결 전 군 간부 ‘계엄사 이동’ 지시 노, 해제되자 분노 “‘강행해’ 언성 높이기도”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준비 과정서 핵심적 역할을 해 왔다는 증거는 계속 나오고 있다. 그는 계엄 직전, 김 전 장관과 국방부 공관서 단둘이 만나 계엄을 논의했다. 또 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정 대령 등과 함께한 자리서 선관위 장악에 북파공작부대(HID) 대원 등을 ‘체포조’로 동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계엄 당일인 지난달 3일 노 전 사령관은 구삼회 제2기갑여단장, 김 전 대령 등과 2차 햄버거 회동을 열었다. 제2기갑여단은 장갑차와 전차 등을 운용하는 부대다. 구 여단장은 계엄 당일 경기 성남시 판교 정보사 100여단 사무실서 노 전 사령관 지시로 대기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로 노 전 사령관 등이 계엄 당시 탱크부대를 동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들의 계엄 논의가 그 이전부터 이뤄졌다는 관측도 나온다. 앞서 정 대령은 경찰 조사에서 지난달 중순쯤 “노 전 사령관이 ‘공작 잘하는 인원 15명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의 존재는 경찰이 김 전 장관의 통화 내용을 분석하던 중 드러났다. 김 전 장관과 노 전 사령관의 잦은 통화 기록에 의심을 품은 경찰은 결국 ‘계엄 비선 기획’의 실마리를 잡았다. 노 전 사령관은 1989년 김 전 장관이 수도방위사령부 제55경비대대 작전과장(소령)일 때 같은 부대서 대위로 근무했다. 20여년 전 김 전 장관이 박홍렬 전 육군참모총장의 비서실장이었을 당시 노 전 사령관은 국가정보원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이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대북 관련 첩보를 제공하면서 수시로 통화하는 인연을 키웠다. 노 전 사령관이 박근혜정부 시절 경호실 군사관리관을 할 때, 경호실장이 박 전 총장이었고, 김 전 장관은 대통령 경호 업무와 밀접한 수도방위사령관이었다. 김 전 장관이 지난해 9월 국방부 장관이 된 이후 인사와 작전에까지 그의 입김이 미쳤다는 게 복수의 정보사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공작조 15명 보고도 지시 정보사 안팎에서는 윤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안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노 전 사령관도 타 사령관들과 마찬가지로 부하들을 대기시켰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 군 소식통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국회에 의해 계엄이 해제되자 노 전 사령관이 크게 분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선관위 직원들을 겁박한 이후 다른 장소로 옮기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행하라’면서 언성을 높였다는 얘기가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