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유준상 대한요트협회 회장 ‘위기의 체육계를 말하다’

“대한체육회, 승부욕만 있고 스포츠맨십 없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한체육회가 안팎으로 위기다. 내부로는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드러났고 외부로는 정부와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다. 40여년 동안 체육계에 몸담은 유준상 대한요트협회장은 대한체육회의 변화와 혁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일요시사>가 유 회장을 만나 대한체육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봤다.
 

▲ 일요시사와 특별대담 갖고 있는 유준상 대한요트협회 회장

1920년 조선체육회로 출범한 대한체육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대한체육회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육성하고 경기단체를 지도·감독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체육 사단법인체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관리·감독을 받고 있으며 17개 시·도 체육회와 78개 회원종목단체 등으로 구성돼있다.

대표 체육단체
창립 100주년

최근 대한체육회는 안팎으로 진통을 겪는 중이다. 트라이애슬론 유망주 고 최숙현 선수 사태로 체육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선수 인권침해 문제가 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대한체육회는 단호한 대응을 보여주고 있지만 가맹단체의 관리기구인 만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체육정책과 예산의 전권을 쥐고 있는 문체부와의 갈등도 현재진행형이다. 내년 1월18일로 예정된 대한체육회장 선거를 위한 정관 개정 승인 문제를 두고 문체부는 4개월 넘게 가타부타 어떤 입장도 내지 않고 있다.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분리해야 한다는 문체부의 주장에는 대한체육회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상태다.

40여년간 체육계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유준상 대한요트협회 회장은 “대한체육회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한요트협회장 인준 문제로 대한체육회와 1년여간 법정 공방을 벌였던 유 회장은 체육계 원로로서 쓴 소리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7일 오전 서울의 한 호텔서 유 회장을 만났다.

변화와 혁신에 실패
정부와 관계도 삐그덕

대한요트협회장, 21세기 경제사회연구원 설립자, 한국정보기술연구원장, 고려대 특임교수, 방송통신대학교 운영위원, 방통대 중어중문학과 2학년 학생 등 유 회장이 갖고 있는 직함은 무려 10개가 넘는다. 유 회장이 여러 분야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그의 뿌리는 체육계서 찾을 수 있다.

1974년 대한레슬링협회 이사로 국가대표 전지훈련 단장을 맡아 체육계와 인연을 맺은 유 회장은 국회 88서울올림픽특별위원회 위원, 대한인라인롤러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대한롤러스포츠연맹 명예회장, 사단법인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 명예회장, 대한요트협회 회장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유 회장은 최근 대한체육회를 둘러싼 안팎의 논란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2016년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통합 이후 첫 회장을 맡은 ‘이기흥호(號)’의 지난 4년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체육인들과의 소통, 정부로부터 자주성 확보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 협회기 흔드는 유준상 대한요트협회장

유 회장은 “2016년 통합 이후 대한체육회는 선수 (성)폭력, 선수 선발 과정서의 불공정성 등 과거의 관습적인 적폐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결국 실패했다”며 “문체부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도 눈앞에 있었지만 최근 들어 되레 상호충돌 양상이 심화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이어 “문체부와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대립구도를 벗어나 국민생활과 체육발전 중심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며 “하지만 이기흥 회장의 대한체육회는 체육인들과의 소통을 통한 개선 논의와 대책 수립 과정서 부족함을 드러냈다. 또 통합적이고 자주적인 대한체육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2016년 통합
그 후 4년…

유 회장은 대한요트협회장 인준을 두고 대한체육회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전을 벌였다. 1년여에 걸친 갈등 과정서 유 회장은 대한체육회 행정의 부끄러운 단면을 봤다고 주장했다. 회장 인준에 대한 전문가들의 충분한 자문을 얻어 법리적 판단을 제시했지만 끝내 소송으로 이어지면서 국민의 세금뿐만 아니라 행정력과 시간을 낭비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는 비판이다.

2019년 9월2일 법정 공방 끝에 대한요트협회장으로 인준된 그는 직원 임금체불, 재정자립도 6.2%로 가맹단체 중 꼴찌라는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유 회장은 대한체육회의 지원만으로는 대한요트협회를 활성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본인의 경험과 인맥을 동원해 정상화에 나섰다. 그 결과 밀린 직원들의 임금과 퇴직금, 선수들의 포상금을 1년 만에 정리했다.
 

▲ 유준상 대한요트협회장 ⓒ고성준 기자

그는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소송을 해봤다. 대한체육회는 공정을 기반으로 스포츠맨십을 발휘해야 할 조직이다. 그런데 그런 조직서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을 하고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방법으로 소송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서 조직의 성패는 리더의 정무적 판단력과 보좌진의 유능한 행정력에 달렸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종목단체장을 해온 경험에 비춰봤을 때 매끈하게 진행되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산하 스포츠과학센터 직원들과 이야기를 해봤는데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제안들이 어떤 특정한 벽에 막힌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토로했다. 좋은 아이디어와 정책이 대한체육회 차원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성폭력 등 적폐 여전…상호충돌 양상도 
“체육발전 중심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

그러면서 대한체육회의 변화와 혁신은 시스템이나 행정체계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했다. 그는 “성적에만 목매면서 단기 계약에 휘둘리는 선수와 지도자의 상황이 최숙현 사태 같은 비극을 만들었다. 이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운동할 수 있어야 좋은 성적이 나온다”며 “또 심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이들에 대한 지원과 교육도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대한체육회는 물론 종목단체 직원들에 대한 교육과 복지가 열악한 점도 문제로 꼽았다. 젊고 유능한 인재를 육성해 공감성과 효율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글로벌 시대에 국제 감각이 뛰어난 인재가 유입될 수 있는 채용 절차를, 그리고 헌신적인 직원들을 위한 연금, 평생고용 등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유 회장은 인터뷰 내내 변화와 혁신에 대해 언급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체육계 또한 그 흐름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설명했고, 팬데믹으로 인해 세계 문화의 중심이 동양으로 옮겨오는 상황서 우리나라가 그 혁신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체육계도 코로나19로 인한 뉴 노멀 시대에 발맞춰 지금의 체육환경을 완전히 탈바꿈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정보기술연구원장으로 ‘한국 해커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 회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언택트 시대가 도래했다. 비대면 훈련과 개인훈련, 경기력 향상을 위한 기술 콘텐츠가 필요한 시점이다. 4차 산업혁명을 위한 기본 인프라 구축과 장비, 첨단 분야의 기술경쟁력과 디지털 생활체육을 위한 자립도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체육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설명했다.


위드 코로나
언택트 시대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대한체육회가 체육청이나 체육부 등 문체부로부터 독립된 전문기관이 돼야 한다. 일부 문체부 직원들로 대한민국 체육 전체를 관리하고 있는 현행 시스템에선 갈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문체부 산하에 있기엔 대한체육회의 규모가 이미 방대한 상태”라고 우려했다.  

그는 문체부가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분리하는 방안을 권고한 것에 대해 대한체육회가 대의원 총회를 거쳐 반대 의견을 의결한 것을 예로 들었다.
 

▲ ▲ⓒ고성준 기자

유 회장은 “IOC는 76개국 154명의 위원으로 구성돼있고, NOC는 206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중 IOC와 NOC의 기능을 분리해 운영하고 있는 국가는 약 86%다. 문체부가 IOC와 NOC의 분리를 권고하는 근거”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IOC와 NOC의 기능이 분리된 나라들은 정부나 국가체육기관(NSC)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운영되고 있다는 속사정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로부터 IOC와 NOC가 정치나 재정으로 전혀 독립된 상태가 아니다. 분리 운영하는 나라가 많다는 이유로 우리도 분리해야 한다는 접근 방식은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각 국가는 그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또 지리적 여건에 따라 관습적인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제약 없이 스포츠와 국민체육진흥에 있어 동등한 혜택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로 올림픽 정신이다. 이 정신을 이어가려면 국내체육과 국제체육 간 이원화에 따른 행정소모나 파열음 없이 유기적인 시너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내년 1월 차기 회장 선거
말많은 이기흥 재선 도전

대한체육회는 내년 1월 차기 회장 선거를 앞두고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 이기흥 현 대한체육회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서 재선에 도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언론서도 이미 몇몇 후보군을 정해두고 차기 대한체육회장을 점쳐보고 있다. 유 회장은 대한체육회장 선거와 관련해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지만 언론에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 있는 상태다.

그는 “조직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덕성이 우선시 돼야 한다. 수장이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않으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하기 어렵지 않겠나”라며 “비리사건에 연루됐거나 선거 과정서 지적을 받았거나 성적 스캔들이 있는 경우 리더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또 “능력은 물론 봉사에 대한 헌신성, 애국심, 사명감도 수장의 덕목이라고 본다”며 “대한체육회는 문체부와 계속 논의해야 하는 만큼 정치권과의 소통 능력도 필수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유 회장은 대한체육회장 선거 출마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대한체육회가 적폐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 상황이 체육인으로 매우 아쉽다. 대한체육회의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사실에도 공감한다”면서도 “지금은 주변의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생각하는 수장의 모습은 능력 있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면서 소통이 되는 인물이다. 내가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인지, 대한체육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인지 고민하고 있다”며 “체육인으로서 대한체육회는 물론 우리나라 체육 발전을 위해 내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결단을 내리겠다.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듯하다”고 언급했다. 

유 회장은 평생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길 위를 걷고 뛰던 마라토너로서의 자신을 언급했다.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30회가량 완주했고 인천서 부산 하구둑까지 1000㎞에 달하는 거리를 걷고 뛴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17개 시도를 한 바퀴씩 뛰면서 체육인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도덕성 높은
수장 필요해

유 회장은 “대한체육회는 물론 국가 전체가 위기 상황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국민과 체육인들이 마음을 모으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나. 코로나19를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문화와 문명의 제일 선도국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나부터 노력하겠다. 죽을 때까지 걷고 뛸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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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