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α’ 이춘재의 살인 지도

“내가 다 죽였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드디어 이춘재가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미제사건의 실마리가 나오고 있다. ‘자신이 했다고 자백한 사건만 14건에 이른다. 우리나라 3대 미제사건으로 꼽혔던 화성연쇄살인사건 말고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사건들이 떠오르는 중이다. <일요시사>가 이춘재의 살인 행적을 뒤쫓았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공개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 몽타주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이형호 유괴사건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미제사건으로 꼽혔다. 지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 일대서 여성 10명이 살해됐다.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지만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2006410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는 듯했다.

화성 사건
33년 만에…

연극 <날 보러 와요>, 영화 <살인의 추억> 등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등장했다.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수차례에 걸쳐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다뤘다.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식지 않았지만 19914310차 사건 이후 28년간 범인의 윤곽은 오로지 몽타주로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다 지난달 18일 이후로 상황이 급반전됐다. 이날 오후 언론보도를 통해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가 특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던 추측과 유력 용의자에 대한 궁금증이 게시판을 달궜다.

지난달 19일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은 브리핑을 통해 지난 715일 현장 증거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 의뢰했다그 결과 현재까지 10건의 사건 중 3건의 현장 증거물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대상자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수사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경찰이 지난 8월 특정한 유력 용의자는 현재 부산교도소에 복역 중인 56세 이춘재. 이춘재는 19941월 청주시 자택서 처제를 강간, 살해 후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당시 그는 부산교도소서 20여년 넘게 1급 모범수였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다.

범행을 부인하던 이춘재는 지난 1일부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춘재의 DNA5·7·9차 사건 증거물서 이미 검출된 데 이어 4차 사건 증거물서도 나온 것으로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물살을 탔다. 이춘재는 기존 화성연쇄살인사건 9건 외에도 추가로 5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14건이다. 이뿐만 아니라 살인사건 외에도 성폭행과 성폭행 미수 범행을 30여건 저질렀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자백한 모든 범행은 군대서 전역한 19861월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된 19941월까지 8년동안 벌어졌다. 범행 장소는 화성과 수원, 청주 등 3곳이다. 다만 이춘재가 털어놓은 모든 범행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제사건 속속 수면 위로
“모두 내가 했다” 입 열어

묘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8차 사건을 이춘재가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면서다. 8차 사건은 범인이 검거돼 처벌까지 전부 이뤄진 상태기 때문에 이춘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큰 파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여중생이 피해자였던 8차 사건서 당시 경찰은 윤모씨를 검거했다.

윤씨는 재판 과정서 경찰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무죄를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으로 출소한 상태다.

DNA 검출로 과학수사의 쾌거라고 고무됐던 경찰의 사기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게다가 윤씨의 검거, 자백 등의 과정서 경찰이 고문을 행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지난 10일 이춘재가 8차 사건서 범인만 알 수 있는 유의미한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사건 수사본부는 이춘재의 8차 사건 자백이 구체적인지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자백 진술 안에 의미 있는 부분이 있다진짜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그런 진술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가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5일 정례 브리핑서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 8차 사건을 포함해 이춘재가 총 14건의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 모두와 추가로 자백한 4건 등이다.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한 사건 14건에 대한 임의성, 신빙성이 높고 당시 현장 상황과 상당히 부합한다고 판단한다고 발표했다. 이중에는 30여년 전 9세 초등학생의 실종사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춘재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정식 입건한 상태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모두 끝나 이춘재에 대한 입건이 처벌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향후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모방범죄도
“내가 했다”

특정강력범죄의처벌에관한특례법에 따르면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 범죄사건이나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 또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나 피의자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등 공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0= 시작은 1986년까지 33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5년동안 화성시 태안과 정남, 팔탄, 동탄 등 태안읍사무소 반경 34개 읍·면에서 1371세 여성 10명이 강간·살해됐다.

스타킹이나 양말 등 피해자의 옷가지를 이용해 교살하거나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는 방식을 썼다. 버스정류장서 귀가하는 피해자 집 사이로 연결된 논밭이나 오솔길 등에 숨어 있다가 덮친 후 범행했다.

1차 사건은 1986915일에 태안읍 안녕리 목초지서 일어났다. 피해자는 71세 이모씨. 딸의 집에서 자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다가 살해됐다. 919일 발견 당시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으며 손으로 목이 졸려 사망했다.

25세 박모씨가 두 번째 피해자였다. 1차 사건 이후 한 달 뒤인 1020일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씨는 맞선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 버스를 타러 가다 변을 당했다. 1차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손으로 목이 졸렸다. 발견 당시 나체 상태였다.

198612월에는 2건이 사흘 간격으로 일어났다. 귀가 중이던 주부 권모(24)씨가 집 앞에서 피살됐다. 발견 당시 스타킹으로 양손이 결박된 상태였다.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숨졌다. 같은 달 14일에는 맞선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중인 이모(21)씨가 살해됐다. 두 손이 묶였고 교살됐다.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서 발견됐다.

해를 넘겨 19871월 여고생 홍모양이 살해된 채 발견됐다. 역시 두 손을 결박했고 양말로 재갈을 물렸다.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서 발견됐다. 52일에는 태안읍 진안리 야산서 6차 사건이 일어났다. 29세 주부 박모씨가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시신 발견 당시 솔가지로 은닉된 상태였다.


5년간 10건
공포 도가니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서 54세 주부 안모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19889월 일어난 7차 사건이다. 버스서 내려 귀가하던 중 범인의 덫에 걸렸다. 발견 당시 안씨는 블라우스로 양손이 결박된 채였다.

논란의 8차 사건은 피해자의 집에서 일어났다. 1988916일 태안읍 진안리의 한 집에서 여중생 박모(13)양이 잠을 자다가 피살됐다. 현장에 남아있던 모발을 증거로 198972525세 윤씨가 범인으로 검거됐다. 이춘재가 이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기 전까지 모방범죄로 분류됐다.
 

▲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

9차 사건은 199011월에 일어났다. 태안읍 병점5리 야산서 김모(13)양이 스타킹으로 결박된 상태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피해자는 귀가 중이었다. 시신은 발견 당시 훼손된 상태였던 만큼 더 충격을 안겼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마지막 사건은 동탄면 반송리 야산서 일어났다. 69세의 피해자 권모씨는 버스서 내려 귀가 도중에 살해됐다. 발견 당시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차에 이르기까지 범행의 수법과 대담성이 점차 진화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수년간 범행을 했음에도 꼬리를 잡히지 않은 점이 강력범죄에 대한 이춘재의 심리적 저항을 낮추고 대담성을 키워준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그러다 남의 집에 들어가거나 친족인 처제를 살해하는 등 더욱더 과감한 수법을 벌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가 범행 4= 화성연쇄살인 외에 경찰이 밝힌 이춘재의 범행은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 청주 주부 살인사건 등 4건이다. 미제로 남아있던 이 사건들은 전부 화성연쇄살인사건 기간 내 일어났다. 당시 포클레인 기사로 일했던 이춘재는 1991년 전후로 화성과 청주 공사 현장을 오가며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생 실종사건도 관여 의혹
공소시효 다 끝나 처벌 어려워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은 실종사건으로 시작됐다. 19871224일 여고생이 어머니와 다투고 외출했다가 10일 뒤인 198814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상태였다. 화성연쇄살인사건서 드러난 이춘재의 범행 수법과 유사하다. 범인 특유의 범행 인증, 즉 시그니처라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화성연쇄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이 제기된 바 있다.

9세 초등학생이 피해자인 사건에도 이춘재가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은 198977일 화성군 태안읍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초등생 김모양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다. 같은 해 12월 김양이 실종 당시 입고 나갔던 치마와 책가방이 화성군 태안읍 병점5리서 발견됐다.

화성연쇄살인사건 9차 사건 현장과 불과 30m 떨어진 지점으로 현재까지 시신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은 1991127일 일어났다. 방적공장 직원이었던 17세 박모양이 청주시 복대동 택지조성 공사장 콘크리트관 속에서 발견됐다. 속옷으로 입이 틀어 막히고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서 목 졸려 숨져 있었다. 역시 화성연쇄살인사건 피해자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춘재는 19913월 청주시 남주동서 발생한 주부 살인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털어놓은 상태다. 29세의 피해자는 양손이 테이프에 묶여 있었고, 가슴이 흉기에 여러 차례 찔린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범인이 단독주택에 침입해 피해자의 손을 묶고 목을 졸라 숨지게 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지만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 이춘재와 용의자 몽타주

경찰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한 이춘재가 자백한 살인사건의 증거물에 대한 국과수의 DNA 분석과 과거 수사자료 등을 토대로 그의 혐의를 밝힌다는 방침이다. 특히 추가로 자백한 4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라 지속적인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춘재는 1994년 가출한 아내에 대한 증오심으로 처제를 잔혹하게 강간·살해한 혐의로 검거되기 전까지 범행을 저질렀다. 현재 14건의 살인사건, 30여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상태다.

또 다른
미제사건도?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한 40여건이 넘는 범행이 모두 성범죄와 연관된 만큼 범행 동기로 성도착증 가능성을 수사할 계획이라고 밝힌 상태다. 성도착증은 심리성적 장애의 하나로 성적 흥분을 경험하기 위해 이상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가학증, 피학증, 소아기호증 등 30가지 이상의 유형이 있다.

이수정 교수는 YTN과의 인터뷰서 이춘재의 성집착은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성적 노리개, 성폭력 대상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잔혹한 살인 등 반복적인 범행은 자신의 성도착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jsjaj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8차 사건 범인 재심 준비 '20년 억울한 옥살이?'

이춘재의 살인 행각과는 별개로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여년 동안 옥살이했던 윤씨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윤씨는 경찰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 돕기로

특히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1999)과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2000)의 재심을 맡아 무죄로 이끌었던 박준영 변호사가 윤씨의 재심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 변호사는 지난 15일, 경찰에 다시 수사기록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