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X-파일’ 의혹 <추적>

  • 이주현 jhjh1313@ilyosisa.co.kr
  • 등록 2012.06.20 09: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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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판세 뒤흔들 ‘판도라의 상자’ 열리나?

[일요시사=이주현 기자]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논란이 일파만파 거세지고 있다. 불법 사찰의 방대한 범위와 규모에 놀라는 분위기지만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검찰의 부실수사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왜 박근혜 이름은 없는가”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인사들에 대해 무차별한 사찰을 벌여온 현 정부였기에 의혹은 더 증폭되고 있다. 때문에 해묵은 ‘박근혜 X-파일’ 존재 유무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및 증거인멸 의혹에 대한 재수사를 벌여온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박윤해 부장검사)은 지난 13일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이 불법 사찰 및 증거인멸에 개입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최종 결론을 내리고 3개월간에 걸친 수사를 마무리했다.

검찰의 재수사 결과 불법 사찰 대상엔 사법부(이용훈 전 대법원장), 정치권(박원순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송영길 전 인천시장, 이석현, 남경필, 김진선, 백원우, 양승조 의원 등), 재계(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등), 국가기관(김성호 전 국가정보원장), 언론계(엄기영 전 MBC 사장), 시민단체(서경석 선진화시민연대 상임대표) 등 유력 인사 30여 명이 사찰 대상에 포함 되었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민간인 사찰 수사로
‘박근혜 X파일’ 의혹

정·재계, 시민사회 단체 등을 막론하고 이명박 정부와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견제의 대상이 된 모든 이들이 뒷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2007년 대선후보 경선부터 이 대통령의 최대 앙숙이었던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이름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박 전 위원장과 이 대통령은 경선 이후에도 갖가지 사안으로 충돌했다. 흔히 ‘친박학살’로 불리는 2008년 총선공천을 놓고 불신의 벽을 키웠고 2009년엔 세종시 수정안으로 또 다시 충돌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가 다소 원만해 진 것은 2010년 8월 회동 때였다. 하지만 2011년 초 동남권 신공항 논란으로 다시 파국으로 치달았다. 당시 이 대통령 견제세력은 야당이 아닌 박 전 위원장과 친박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최소 약 3년간은 ‘살얼음판’ 관계를 유지해왔기에 사찰대상에서 제외된 것에 모두가 의아해 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박 전 위원장만 사찰에서 열외 시켰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으로 받아 들여져 박 전 위원장에 대한 사찰 유무와 그 내용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만약 사찰을 했다면 왜 발표하지 않고 감추는지에 대한 의문점도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박 전 위원장의 ‘X-파일’에 대한 언급은 숱하게 거론돼 왔지만 정확한 실체가 증명된 적은 없었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지난 대선후보경선 때다. 박 전 위원장의 후보 당시 법률특보인 정인봉 변호사가 ‘이명박 X파일’을 밝히자 이 대통령 측은 “‘박근혜 X파일’도 공개하겠다”고 맞불을 놓으며 역공을 펼친 것이다.

정 변호사의 이 같은 발언에 정치권은 요동쳤다. 이 대통령 측이 “우리도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검증 자료가 있다”며 “유신시대 당시 퍼스트레이디로서 권력을 이용해 행한 모든 부도덕한 행위, 청와대에서 나온 이후 18년간 은둔생활 전반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X-파일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X-파일을 공개당해야만 했던 이 대통령은 매우 불쾌해 했다고 전해진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해묵은 네거티브?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박 전 위원장을 겨냥한 사찰이 이뤄졌을 것이란 주장과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정권 초 친이계 실세들은 정권에 협조를 안 해 준다는 이유로 박 전 위원장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특히 “한방이면 보낼 수 있다”고 수차례 강조하기까지 했다. 또한 한 친이 핵심의원은 “(박 전 위원장을) 죽일 카드는 여러 개 있다. (2007년) 경선 때도 쥐고 있었지만 안 썼을 뿐이다. 그 후에도 들어온 게 많다”고 으름장을 내기도 했다.

입수경로에 대해선 “집권하면 정보가 들어오는 곳이 많다"며 ”박 전 위원장도 약점이 많은 정치인“이라고 했다.

이어 “도덕적,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힐 만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권 핵심그룹이 집권 이후 역대 정권에서 축적해놓은 자료 또는 이명박 정부 들어 모종의 경로를 통해 입수한 자료를 손에 쥐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박근혜 X-파일’ “있다? 없다?” 증폭되는 의혹
민간인 사찰 수사 결과 박근혜만 쏙 빠져 ‘왜?’ 

또한 2008년 <신동아> 5월호는 “노무현 정권이 2004년 7월경부터 국가정보원, 박근혜 태스크포스(TF) 등을 동원해 박근혜 전 위원장을 뒷조사한 100쪽 분량 ‘X파일’을 만들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박 전 위원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고 최태민 목사 딸과 사위의 20여년 부동산 보유 거래 명세 50여 건을 조회해 기록한 박근혜 X파일의 문건 일부도 실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도 박근혜 X-파일에 대한 의혹이 일었다. 김문수 경기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경선룰 변경’을 주장하는 등 친이계가 총선 후 목소리를 높이자 일각에서는 박근혜 X-파일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불법 사찰로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지만 이를 통해 박 전 위원장의 약점을 단단히 쥐는 성과를 얻은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부분이다.

이후 민간인 사찰 수사결과가 발표되고 대선정국이 다가오자 또 다시 박근혜 X-파일이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박 전 위원장 측은 ‘자신이 전·현 정권에서 모두 사찰당한 피해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내세우며 민간인 사찰 의혹에서 한 발 비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 전 위원장 측의 이런 전략 뒤에는 향후 대선과정에서 본인에게 불거질 각종 의혹들이 ‘불법사찰에 의해 조작되거나 혹은 부풀려졌다’는 방어막을 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즉 자신이 불법사찰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것은 대선 과정에서 불거질 의혹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노림수라는 것이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추정해볼 수 있는
내용은 무궁무진

박근혜 X-파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박정희의 딸’이라는 태생적 한계다. 박 전 위원장이 쿠데타와 인권탄압 등 유신정권의 과오에 대해 객관적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대두 될 수 있다.

또한 영남대와 정수장학회 등 박정희 시대에서 물려받은 유산도 본 게임이 시작되면 논란의 여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일명 ‘박근혜의 남자’로 알려졌던 고 최태민 전 목사에 대한 의혹도 또 다시 불거질 것으로 여겨진다.

70년대 영부인 역할을 했던 박 전 위원장을 등에 업은 최 목사는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박 전 위원장이 최 전 목사 사후에도 그의 가족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의혹이다.


박 전 위원장은 최근까지 최 전 목사에 대한 신뢰를 굳이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위원장의 가족도 새로운 변수다. 동생 지만씨와 부인 서향희씨가 부실 저축은행 오너 등과의 친분 등으로 세간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씨가 아들과 함께 홍콩으로 출국하자 야권에서는 박 전 위원장이 본격적으로 주변관리에 돌입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의 독특한 리더십도 ‘불통 리더십’으로 지목되면서 네거티브의 주제로 등장할 전망이다.

정권 초 친이실세 “한방에 보낼 수 있다” 호언
박근혜 캠프 네거티브 대응에 총력 기울일 듯

총선 후 ‘박근혜당’으로 변모하며 속속 배치되고 있는 측근들도 많은 논란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3·5공 출신들로 구성된 ‘7인회’ 원로그룹과 ‘선진한국 민족연합’ 등 사조직은 유신시대로의 회귀를 우려하는 시각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근들이 벌써부터 줄대기를 하며 금품관련 의혹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따라서 박 전 위원장 측은 대선전의 최대 변수로 ‘네거티브’를 꼽으며 자신을 향한 음해와 음모론을 차단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위원장이 직접 측근들에게 네거티브 대응을 주문하고 분야를 분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친박에선 네거티브 대응이 대선 승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 친박 내에선 네거티브 대응팀에서 활동하는 게 집권 이후 행보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네거티브 업무를 서로 맡으려는 기류도 감지되고 있다.

이명박 캠프 당시 BBK 네거티브 대응을 맡았던 인사들이 집권 뒤 중용됐던 전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네거티브 대응팀’
구성에 총력 기울여

이런 숱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민간인사찰 의혹은 특검 또는 국정조사 가능성을 남겨놓고 있다. 향후 진실규명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가 박 전 위원장을 뒷조사했다는 흔적이 확인될 경우 위태롭게 협조관계를 이어가던 당청은 파국을 맞을 수 있다.

박 전 위원장으로선 청와대와의 차별이 불가피한 상황이고 청와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권이 쥔 박근혜 X-파일이 공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당·청 간의 파열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따라서 대선정국을 뒤흔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릴지에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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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