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5개월, 그 후…

초대형 이슈에 쥐 죽은 듯 고요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올 상반기는 여느 때보다 굵직한 이슈가 많았다. 동계올림픽, 북한 비핵화 이슈를 둘러싼 남·북·미 정상회담, 6·13지방선거 등 대형 이벤트가 6개월 새 치러졌다. 여기에 하나의 사회 현상이 각계각층을 휩쓸었다. ‘미투’ 운동이다. 미국발 허리케인은 올해 1월 한국에 상륙해 대형 태풍으로 발전했다. 이후 5개월, 바람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지난해 한국 사회는 유례없는 풍파에 휘말렸다. 2016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해를 넘겨서까지 사회를 뒤흔들었다. 누적 인원 13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촛불을 들고 겨울 거리를 누볐다. 그 결과 지난해 3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됐다.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파란만장 6개월
대형이벤트 몰려

대통령 탄핵으로 같은 해 5월 장미대선이 치러졌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재수 끝에 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보궐선거 개념으로 진행된 선거였기에 문 대통령은 인수위 기간 없이 바로 업무에 돌입했다. 정치권, 검찰, 경찰, 재계 등 각계각층서 적폐 청산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숨 가쁘게 지나간 지난해에 이어 2018년 역시 연초부터 다양한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지난해에는 사회를 달군 이슈가 대부분 국내서 비롯됐다면, 올해는 그 범위가 국내외를 넘나들었다.

먼저 2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동계올림픽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팽배했지만 남북 단일팀 구성, 북한 고위급 관계자 방남 등 개최 직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뜻밖의 성공을 거뒀다. 


그 여세를 몰아 북한 비핵화 이슈를 둘러싼 남북·한미·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렸다.

이후 6·13지방선거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동계올림픽, 정상회담 등 전 세계인의 눈이 쏠리는 대형 이벤트와 전국 단위 선거가 6개월 새 이어지면서 그 어떤 이슈도 국민들의 관심을 길게 잡아두지 못했다.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남북 관계 개선 모드에 가라앉고, 지방선거가 드루킹 특검, 북미 정상회담 등에 가려진 형국이다.

그 많던 미투는 어떻게 됐을까
가해자 지목 인사들 ‘우수수∼’

그런 와중에 지난 1월부터 꾸준히 관심의 대상이 된 이슈가 있다. 바로 ‘미투(#Me Too)’ 운동이다. 지난해 10월 미국서 처음 시작된 이 운동은 올해 1월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미투 운동은 대형 이슈 사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받았다. 성역 없이 각계각층에서 불거진 미투 운동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앞서 미국에선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전 유명 영화제작자의 성추문 사건이 불거졌다.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실력자로 알려진 하비 와인스타인. <뉴욕타임즈>는 그가 무려 30여년에 걸쳐 영화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성추행 해왔다고 보도했다.

보도 당일 와인스타인은 “동료들에게 많은 고통을 준 것을 인정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하나 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그가 대표로 있던 와인스타인 컴퍼니 직원들뿐만 아니라 기네스 펠트로, 우마 서먼 등 세계적인 여배우들의 폭로도 이어졌다. 결국 그는 할리우드서 추방됐다.

미국발 허리케인
한국엔 태풍으로

미투 운동의 시초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미국의 흑인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저소득층 지역 젊은 여성 성폭력 생존자들의 치유를 돕기 위해 SNS에 “Me too(미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시작됐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당시 타라나 버크는 성추행 피해를 고백한 10대 소녀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어 답답해하던 중 ‘미투’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투 운동이 공개 운동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은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사건 이후다. 지난해 10월 영화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SNS를 통해 미투 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SNS에 ‘Me Too’라는 해시태그를 달고(#MeToo)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방법으로 심각성을 알리자고 주장했다.

알리사 밀라노의 제안 이후 24시간 만에 약 50만명이 넘는 사람이 리트윗 방식으로 지지를 표했고 10만명에 육박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와 주변 사람들의 공감, 연대가 합쳐져 파괴력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의 미투 운동은 서지현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검사의 폭로로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서 검사는 지난 1월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2010년 겪은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서 검사는 이날 인터뷰서 “서울북부지검에서 근무했던 2010년 문제의 사건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서 검사는 2010년 한 장례식장서 안태근 전 법무부 감찰국장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엉덩이를 쓰다듬는 행위를 하는 등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는 법무부장관도 같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뿐만 아니라 안 전 감찰국장으로부터 부당한 인사발령도 당했다고 강조했다.

현직 검사의 공개 고발은 법조계는 물론 각계각층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불씨는 문화예술계로 번졌다. 연극계, 문단 등 해당 분야서 거장으로 불리던 인사들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문화예술계는 피해 사실을 고백한 사람의 수가 많고 그 수위 또한 상당했다. 그중 가장 충격을 준 인사는 연극계 거장 이윤택 연출가다.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는 지난 2월 SNS를 통해 이 연출가와 있던 일을 폭로했다. 김 대표는 10여년 전 지방공연 당시 이 연출가에게 안마를 하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서 이 연출가가 바지를 내리고 신체 일부를 주무르라는 등 성적 행위를 강요했다고 덧붙였다. 또 이 같은 행위가 여자 단원들을 대상으로 상습적으로 이뤄졌다고 고발했다.

연극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 연출가는 김 대표의 폭로 전 연희단거리패, 가마골소극장, 밀양연극촌 예술 감독으로 활발한 활동 중이었다. 연극계 관계자는 물론 대중들이 나서서 이 연출가의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김 대표의 고발 이후 5일 만에 기자회견을 갖고 공개 사과했다.

하지만 진정성 없는 ‘반쪽 사과’ 논란이 불거지면서 오히려 연극계 미투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이 연출가는 이날 기자회견서 성추행 의혹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합의에 의한 성관계는 있었지만 폭력적이거나 물리적인 강압을 통한 성폭행은 없었다”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법적 절차가 진행된다면 성실히 수사에 임하겠다”고 공을 법정으로 넘겼다.
 

그러나 기자회견 이후 이 연출가의 성폭행으로 임신과 낙태를 했다는 김지현 전 연희단거리패 단원의 고발이 나왔다. 또 이 연출가가 기자회견 전 리허설을 했다는 내부 고발까지 터지면서 그는 사면초가 상태에 처했다. 결국 극단원에 대한 상습적인 강제 추행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 연출가는 오는 20일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

가해자 민낯에
대중 분노 폭발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고은 시인의 성폭력 의혹도 불거졌다. 안 그래도 ‘문단 내 성추행’ 문제로 전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됐던 문학계는 원로시인의 민낯에 만신창이가 됐다. 고은 시인의 경우는 미투 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지 <황해문화> 겨울호에 최영미 시인이 게재한 시 ‘괴물’이 알려지면서 활활 타올랐다.

최 시인의 괴물에는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등의 구절이 담겨 있다. 여기서 En에 해당하는 인물이 고은 시인이라는 것. 


류근 시인은 최 시인의 폭로 이후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라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렸다. 고은 시인의 행위가 상습적이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연예계서도 미투 운동이 크게 불거졌다. 배우 고 조민기, 조재현, 오달수 등 대중 인지도가 높은 배우들이 성폭력 가해 의혹을 받고 구설에 휘말렸다. 이들 역시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피해자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가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특히 대학 강단서 교수로 강의를 하던 조민기는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 대중을 경악케 했다. 줄지어 불거진 의혹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조민기는 카카오톡 대화 메시지가 공개되고, 학과 남학생들의 증언이 이어지자 결국 지난 3월 경찰 소환을 앞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재현은 김기덕 감독과 함께 시사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전락하는 신세에 처했다. MBC 시사프로그램 <PD수첩>은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을 통해 김 감독과 조재현 그리고 조씨의 매니저가 여배우를 상대로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에 대해 보도했다.

지난 3개월 간 그 어떤 대응도 하지 않던 김 감독은 3일 <PD수첩> 제작진과 방송서 인터뷰한 여배우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며 법정 공방을 예고했다. 김 감독은 방송 이후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난 1월 상륙…지금은 조용∼
2차 가해 때문? 여성운동 확산?

정치권에 떨어진 미투 폭탄은 그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현직 도지사였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김지은 전 정무비서의 고발로 정치 생명이 끊겼다. 김 전 비서는 방송에 나와 8개월 동안 4번에 걸쳐 안 전 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전 비서의 폭로로 안 전 지사는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서 경찰 조사를 받는 신세로 추락했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던 정봉주 전 의원 역시 미투 문제로 낙마했다. 한 언론의 단독 보도로 시작된 정 전 의원의 미투 의혹은 진실 공방이 벌어지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정 전 의원은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이 말하는 시간, 장소에 있지 않았다고 강조했지만 카드 사용 기록이 나오면서 결국 3월 말 출마 의사를 접었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약 3개월 간 미투 고발은 하루에 한 건 꼴로 터져 나왔다. 특정 인물이 검색어 순위에 올라 있으면 십중팔구 미투 관련일 정도였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각 분야의 거장이든 유력 대선후보든 할 것 없이 추풍낙엽처럼 쓸려갔다. 

하지만 최근 태풍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미투 관련 폭로가 여전히 나오고는 있지만 불과 몇 개월 사이 성량은 줄어들었다.

일각에서는 대형 이슈가 미투 운동을 잠식했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올림픽 등 대형 이슈가 있던 때에도 미투 운동은 국민의 높은 관심을 받았다. 단발성 이슈가 아닌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인식됐기에 관심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최근 미투 운동이 잠잠해진 것을 두고 대형 이슈에 따른 관심 분산보다는 2차 가해가 두려워 다시금 피해자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미투 관련 언론보도를 보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근황, 해명 등을 많이 볼 수 있다. 검찰 고발이 이뤄진 사건은 법정 공방의 진행 상황을, 성폭력 가해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의 반박 자료 등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점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폭로 이후 2차 가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조민기의 자살 이후 그를 고발했던 피해자들은 ‘죽이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받는 등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의혹을 고발한 김 전 비서는 신상이 모조리 털렸다. 김 전 비서를 둘러싼 온갖 근거 없는 소문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또 미투 운동이 남녀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모습도 나타나면서 불이익을 우려한 피해자들이 다시 입을 다물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미투 운동이 한창 진행될 무렵 ‘펜스룰’이 유행했다. 문제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성과의 접촉을 아예 차단하자는 움직임이다. 

일부 기업에선 직원 선발 과정서 아예 여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반면 조용해진 미투 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도 있다. 폭발력이 줄어든 대신 광범위한 여성 운동으로 정착했다는 시각이다. 최근 혜화역 시위 등 여성의 주최로 진행되는 일련의 행위가 미투 운동의 연장선상이라는 설명이 나오고 있다. 

혜화역 시위는 홍익대 누드모델 사건에 대한 비판에서 촉발돼 ‘몰카 없는 세상’을 외치는 집회로 발전했다. 두 번의 집회에 각각 2만명이 넘는 여성들이 참여했다.

멈출까 확산될까
본질 훼손 우려도

한편 일각에서는 미투 운동의 변질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 미투 운동을 표방하며 불거진 일련의 사건이 공방 끝에 다른 진실을 드러내는 경우가 왕왕 있어 본질이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런 일이 반복될 경우 정말로 미투 운동이 필요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주변의 연대와 공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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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