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떠도는 신사옥 괴담

좋다고 이삿짐 쌌다가…울고 웃는 기업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초고층 빌딩을 지은 회사나 도시는 경제위기나 슬럼프에 시달린다는 속설, 이른바 '마천루의 저주'는 과학적으로 일리가 있는 얘기다. 경제는 사이클이 있기 때문에 이런 초고층 건물 투자가 최고점을 찍을 때 경기가 불황으로 돌아설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속설은 단지 초고층 빌딩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더 큰 사옥으로 옮기고 새롭게 출발한 몇몇 회사들 역시 비슷한 속설에 신음하고 있다. 
 

신사옥에 입주한 기업들의 상반기 경영 실적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NH농협생명과 쿠팡은 저조한 실적을 기록한 반면 LG이노텍, 에어부산 등은 견고한 성적을 기록하며 묘한 대조를 보였다.

순탄치 않은
새집 생활

지난 3월 서대문구 소재 옛 임광빌딩(2개동)을 매입해 신사옥을 마련한 NH농협생명은 입주 한 달 만인 4월 덩치에 걸맞지 않는 성적표를 받았다.

NH농협생명의 자산규모는 4월 기준 62조4945억원으로 삼성생명(249조5803억원), 한화생명(107조7162억원), 교보생명(92조8337억원)에 이어 업계 4위 수준이다. 그러나 NH농협생명의 당기순이익은 321억원으로 업계 10위에 불과하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누적 당기순이익은 삼성생명이 6310억원으로 1위였으며 한화생명이1809억원으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교보생명(1793억원), 동양생명(1159억원), ING생명(830억원), AIA생명(804억원), 메트라이프생명(752억원), 라이나생명(647억원), 푸르덴셜생명(594억원), NH농협생명(321억원) 순이다. NH농협생명은 총자산 규모의 15분의 1 수준에 불과한 라이나생명보다 절반 가까이 낮은 당기순이익을 기록한 셈이다. 

NH농협생명은 ‘총자산수익률(ROA)’ 역시 당기순이익 규모 상위 10개사 중 가장 낮다. ROA는 수익성을 알아보는 대표적인 지표로 총자산서 당기순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을 의미한다. 

ROA가 높다는 것은 기업이 보유한 자산에 비해 이익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ROA의 수치가 낮다는 것은 자산 대비 수익성이 낮음을 의미한다. 
 

NH농협생명의 올해 1분기 기준 ROA는 0.21%로 10개사 중 꼴지다. 4년 전 동기(0.19%)보다 0.02%p. 증가한 수치지만 해당 기간 동안 가장 낮은 ROA를 기록한 NH생명보험은 ‘4년 연속 최하위’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사옥 이전에 돈 쓰느라 ‘허우적’
보금자리 바꾸고 빨간불 켜진 살림

지난 4월 송파구 신천동 신사옥으로 이전한 쿠팡은 극심한 재무위기에 처해 있다. 올해도 대규모 적자를 기록할 경우 자본잠식이 우려될 정도로 자산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지난해 말 기준 쿠팡의 결손금은 1조2000억원으로 주식발행초과금 등 자본금을 대부분 잠식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투자한 1조1000억원은 이미 소진한 상태다. 현재 쿠팡의 자본총계는 3200억원으로 전년 4240억원 대비 25% 감소했다. 이에 따라 올해도 예년 수준의 5000억원대 적자를 낼 경우 자본잠식 위험은 높아진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적자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쿠팡이 임대료가 비싼 잠실 사옥으로 이전한 것을 두고 업계는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쿠팡이 입주한 신천동 타워730는 기존 삼성동 사옥의 2.2배 규모다. 

쿠팡은 이 건물 지상 8층부터 26층까지 19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쿠팡의 잠실 신사옥은 보증금 1000억원, 월세는 연간 약 150억원(관리비 포함)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 끌어다 쓰고
빚더미 앉을 판

롯데그룹은 지난 4월 국내 최고,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롯데월드타워’를 정식 개장했다. 2010년 말 착공한 이 건물은 지하 6층, 지상 123층 규모로 높이가 555m에 달한다. 공교롭게도 롯데월드타워가 개장한 후 롯데그룹은 각종 구설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부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국에선 뭇매를 맞았고 총수 일가는 경영 비리 혐의로 법정에 섰다. 실제로 지난 3월21일 <블룸버그>는 롯데그룹 총수 일가가 법정에 서고 한국이 안팎의 위기에 처한 걸 마천루의 저주에 빗댔다. 
 

게다가 롯데월드타워에 입주 이전부터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 형제간 경영권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여기에 올 상반기 실적도 추락했다. 롯데그룹 대표기업인 롯데쇼핑은 상반기 매출이 3% 줄고, 영업이익은 22% 감소했다.

실적부진을 겪고 있는 네오위즈는 옛 사옥 매각에 골몰하고 있다. 네오위즈가 매물로 내놓은 분당사옥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192-3번지에 위치한다. 

대지면적 2599.90㎡, 연면적 4337.13㎡로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다. 일반상업지역으로 2016년 기준 공시지가는 1㎡당 509만원이다. 공시지가 합계는 132억3095만원이다. 네오위즈는 분당사옥 매각 예정가를 175만원으로 책정해 시중에 내놨다. 

지난해 상반기 반짝 회복됐던 실적이 하반기 다시 악화되면서 다시금 매각의 불씨가 당겨졌다.

네오위즈게임즈는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1910억원, 영업이익 235억원, 순이익98억원을 각각 기록하며 2014년과 2015년에 걸친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온 듯 보였다. 그러나 하반기 매출이 상반기대비 대거 축소되고, 순손실 63억원 등을 기록하며 다시 실적 부진에 빠졌다.

네오위즈홀딩스는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 2017억원, 영업이익 224억원, 순손실 84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상반기에는 호실적을 달성했지만 역시 하반기가 문제였다. 상반기대비 하반기 매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고, 순손실 261억원이 발생했다.

신사옥 입주를 앞두고 있는 기업들 역시 경영환경이 우호적이지 않다. 


올해 말 용산구 신사옥에 입주하는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2분기 LG생활건강에 매출 1위 자리를 내주며 체면을 구겼다. 상반기 기준으로는 아모레퍼시픽이 LG생건보다 매출이 1375억원 많지만,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4058억원서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 

삼성엔지니어링은 2012년 신사옥 이전 후 이듬해 1조원 이상의 대규모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2011년 6300억원이던 영업이익은 경기침체와 저유가 등으로 지난해 700억원으로 떨어졌다. 올 상반기에도 매출과 영업이익 증가율은 모두 -11.3%, -17.8%로 좋지 못했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 삼성동에는 높이가 569m에 달하는 국내 최고 빌딩 현대자동차 GBC를 짓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옛 한전 부지 일대에 조성하는 건축 규모는 총 연면적 92만6162㎡. 

현대차 GBC만 해도 지상 105층에 연면적 56만443㎡에 달한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GBC는 빠르면 올 하반기, 늦어도 내년이면 착공해 2021년경 프로젝트가 전반적으로 마무리될 전망이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좋지 않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신용등급 강등의 위기로 내몰렸다. 국제 신용평가사 S&P(스탠다드앤푸어스)는 지난 8일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의 신용등급을 ‘A-’로 각각 유지하면서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각각 하향한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 계열사 3곳은 신용등급을 유지했지만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으로 떨어지면서 향후 1~2년 내 이뤄지는 S&P의 신용등급 평가서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도 있다. 


옮겼다 하면
적자 수두룩

반면 KEB하나은행, LG이노텍, 에어부산, 대신증권 등은 사옥 이전과 함께 더 잘 나가는 회사로 분류된다. 

지난 1일 KEB하나은행은 서울 을지로 옛 외환은행 본점 건물에 있던 본사를 을지로입구역에 접한 신사옥으로 옮겼다. 을지로 신사옥은 기존 대비 사용면적이 60%로 증가된 지상 26층, 지하 6층, 연면적 1만6330평으로 신축됐다. 

KEB하나은행의 통합 이후 성과를 살펴보면 실적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KEB하나은행은 올해 상반기 998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5.0% 증가한 수준으로, 2015년 은행 통합 이후 반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이다. 
 

두 은행이 통합하기 직전 2015년 상반기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이 각각 5417억원과 2010억원의 순익을 기록한 것과 비교했을 때 34.5%가량 늘어난 규모다. 

직원 1인당 생산성도 향상됐다. 통합 초기인 2015년말 KEB하나은행의 1인당 생산성(충당금적입전이익)은 1억200만원이었으나 올해 상반기 1억1400만원으로 올라갔다. 은행의 건전성을 나타내는 고정이하여신비율 역시 2015년 말 1.21%서 올해 상반기 0.72%로 개선됐다. 연체율도 같은 기간 0.53%서 0.33%로 하락했다.

잘 되는 집은 옮겨도 잘된다
다른 유형의 ‘마천루 저주’

지난 3월 LG서울역빌딩으로 이전한 LG이노텍은 상반기 매출이 29% 늘고, 영업이익은 흑자전환했다. 상반기 주가 상승률은 86.7%로 LG그룹 계열사 중에서 가장 높았다. 듀얼카메라 모듈의 독점적 공급 지위가 공고하게 유지되면서 하반기 실적은 더욱 좋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5월 강서구 대저동 신사옥으로 입주한 에어부산은 올 상반기 25.6% 증가한 매출을 기록했다. 수익성도 높아지는 추세다. 2015년과 2016년 영업이익률은 8~9%대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2014년은 5%대였고, 2013년은 1%대였다. 상반기에도 5.3%로 모기업인 아시아나항공 2.2%보다 높은 수준을 보였다. 신사옥 이전을 한 달 앞둔 4월에는 저비용항공사(LCC) 중 이착륙 지연율이 가장 낮다는 조사 결과를 받기도 했다.

대신증권은 연결 재무제표 기준 올해 1분기 순이익이 244억원으로 전년 대비 42.3% 증가했다. 주요 계열사 순이익이 크게 줄었지만 핵심 계열사 대신증권이 지탱해준 덕분에 전체 순이익은 전년 대비 크게 늘었다. 개별 실적서도 대신증권의 순이익은 같은 기간 24.6% 늘어난 315억원이었다.

새집 탓 안하는
실적 우등생들 

올 들어 증시가 회복되면서 대신증권의 실적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부문별 실적서도 브로커리지 부문 영업수익이 전년 대비 12.9% 감소했지만 트레이딩 부문에서 만회하면서 전체적으로 실적이 크게 상승했다. 

트레이딩 부문은 주가연계증권(ELS) 발행과 조기상환이 증가하면서 실적이 호전됐다는 설명이다. 대신증권은 지난 1월 새로 입주한 신사옥(대신파이낸스센터)에 대신금융그룹 내 모든 계열사를 입주시킨 후 물리적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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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