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법조인 1호 물류학 박사’ 김천수 효성그룹 법무실장

한번 꽂히면 끝장…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조인, 물류학 박사, 로스쿨 교수, 기업의 법무실장까지. 김천수 효성그룹 법무실장을 소개하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일생 동안 제대로 된 직업 하나 갖기도 어려운 시대에 김 실장은 또 다시 새로운 도전에 몸을 맡겼다. <일요시사>가 그의 족적을 따라가봤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효성그룹 본사서 김천수 법무실장을 만났다.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건 창가 한편을 빼곡히 메운 서류 더미. 김 실장의 개인 책상은 물론 회의용 대형 탁자에까지 A4용지 뭉치가 가득했다. 노타이 차림의 김 실장은 점심 먹다 옷에 뭐가 묻었다며 사진기자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방에는 라디오 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법조인이자
물류학 박사

“학교서 교수실을 배정받았는데 먼저 그 방을 썼던 분이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나 봐요. 방음시설이 엄청 잘돼있더라고요. 그냥 썩히면 아깝다고 생각해 저도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만난 것처럼 김 실장의 도전은 우연한 계기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눈앞에 닥친 일에 어렵지 않게 순응하는 김 실장의 태도가 만든 변화였다. 그 덕에 법조인이자 물류인, 대학원 교수면서 기업의 법무실장을 맡는 등 인생의 생소한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전주 해성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1992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서울, 수원, 울산, 인천 등에서 판사로 재직했다.


그러다 2010년 2월 ‘물류 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2012년부터는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로 일했다. 6년간 학교에 몸담았던 그는 최근 효성그룹 법무실장으로 선임돼 기업에 들어갔다.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 학교와 기업을 오간 숨 가쁜 25년이었다. 동시에 지난달에는 법조인 최초로 물류학 박사가 됐다.

김 실장이 물류를 처음 접한 건 연수 중이던 2000년 일본에서다. 도쿄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이노베이션 센터라는 연구소에서 2주에 한 번씩 진행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게 계기가 됐다. 히토쓰바시 대학교의 전신인 도쿄 상업학교는 비즈니스맨, 이른바 실무가를 키우는 곳이다.

“지인이 법을 공부한 제게도 꽤 재미있을 거라면서 세미나 참석을 권유했어요. 교수들만 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계, 관계, 정계 사람들이 많이 보여 놀랐습니다.”

2000년 한국에선 벤처 붐이 크게 일었다. IT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와도 맞물린다. 하지만 김 실장이 경험한 일본은 벤처나 IT 산업보다는 다른 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상황이 궁금했던 그가 세미나 관계자에게 묻자 ‘온라인의 끝은 오프라인’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일본은 세계가 온라인에 완벽하게 물든 이후 오프라인 경쟁이 시작될 거라고 보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그때를 준비하고 있다고, 그게 ‘물류’라고 하더군요.”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물건을 받아보는 건 오프라인에서다. 


온라인 유통 공룡으로 불리는 아마존닷컴이 최근 오프라인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구조적 변화가 발 빠르게 일어나는 것도 그 증거다. 200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 물류의 개념조차 자리 잡지 못한 한국으로선 상당히 뒤처져 있는 셈이다. 김 실장도 당시에는 물류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2000년 일본서 물류 처음 접해
2005년 공부 시작해 교수까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 실장이 본격적으로 물류학에 빠지게 된 것은 “친구를 잘못 만난 덕”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하헌구 인하대 국제물류전문대학원 교수. 

하 교수는 2004년 글로벌 물류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된 인하대 아태물류학부를 만든 초기 멤버다. 김 실장은 하 교수의 권유에 따라 2005년 가을 물류 비즈니스 최고경영자과정을 수강하면서 물류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친 그는 같은 대학 물류 MBA 과정에 등록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법조인 1호 물류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따냈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들어온 길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스스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어 공부나 하라’며 살살 꼬드기는 친구 말에 넘어갔죠. 그런데 대학원서 첫 수업을 듣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어요.”

외국서 교수를 초빙해 진행한 수업은 4주 단위로 이뤄졌다. 2주간 30시간의 강의, 1주는 그룹 프레젠테이션, 마지막 주는 테스트로, 한 달이 지나면 한 과목이 끝나 있었다. 

2008년 판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판결문과 씨름하랴, 수업에 출석하랴 정신없는 한때를 보냈다. 게다가 국고를 지원 받았기 때문에 성적을 B+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상당했다.
 

30시간 강의 중 3분의 2가 넘는 시간을 세계지도와 함께 했다는 그는 ‘꿈에도 지도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갖고 있던 물류에 대한 개념이 수업을 들으면서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가 접한 물류는 단순히 물건을 주문하고 받아보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아가 경제 흐름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왜 기업서 중국에 공장을 만드는지, 중국에 공장을 세우려면 정부와 어떤 협상을 해야 하는지, 공장부지 사용료는 어떻게 하면 보호받을 수 있는지 등 그가 만난 물류학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문제는 한국이 물류에 대한 기초 공사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대학에도 물류법 관련 전문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친구 권유로 시작
9년 만에 박사학위


인하대 로스쿨 인가 과정서 역할을 한 하 교수의 러브콜이 또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교수로서였다. 법과 물류를 함께 공부한 사람이 생소하다 못해 없는 상황서 김 실장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물류인이면서 법조인, 법조인이자 물류인이라는 독특한 조합의 경력은 그를 학교로 이끌었다. 

물류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물류 전문 변호사로 발을 디딘지 2년 만이었다.

“제가 국고, 국민 세금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걸 되돌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가봤더니 정말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하나씩 전부 만들어야 했어요.”

1950∼1960년대 물류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본인이 번역한 그대로 ‘물적 유통’이었다. 그러다 1970∼1980년대 원료준비, 생산, 보관, 판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서 물적 유통을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종합적 시스템을 뜻하는 로지스틱스라는 개념이 나왔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소비자를 위한 기업 간 긴밀한 관계를 말하는 SCM(Supply Chain Management) 개념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경영상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불과 10년 남짓이니 제도적 기반을 세우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외국의 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서로 다른 공동체의 특성상 어려웠다. 누구에게 주도권을 주고 법제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 


기업과 기업의 관계를 시스템화하는 것이기에 누구를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국서 물류법이 발달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나눠 갖는 부분에 대한 법제화가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부 차원서 ‘제발 좀 나눠 가져라, 상생해라’라고 상생협력법 같은 걸 만들지만 정책적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자발적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최근 프랜차이즈 기업을 둘러싸고 ‘갑질’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다. 처음부터 가맹본부를 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졌기 때문에 가맹점에겐 불리한 조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게 갑질이라는 형태로 분출된다는 것. 

하지만 가맹본부가 없다면 가맹점은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 없고 가맹점이 없다면 가맹본부는 유지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가맹본부와 가맹점은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관계다.
 

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기업에선 노동자를 비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한다. 사실 기업의 이런 방식의 일처리는 다른 기업에 대한 착취나 다름없다. 

생소한 개념
법제화 난항

노동자들은 기업에 고용돼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계약의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해요. 우리는 계약을 ‘대립하는 두 당사자의 의사표시의 합치’라고 합니다. 결국 한쪽이 손해를 보면 다른 한쪽은 이익을 얻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거죠.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가맹본부와 가맹점은 손해와 이익을 공유하죠.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도 계약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해요. 그래야 갑을 논쟁, 기업 구조 등에서 변화가 생길 거예요.”

개념도 생소한데 법제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게 김 실장의 생각이었다. 물류를 둘러싼 제도적 기반을 법제화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효성그룹의 법무실장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한바탕 법률 전쟁을 치르고 있는 효성그룹은 최근 법무실장 자리를 상무서 부사장으로 높여 김 실장을 영입했다. 기업과 정부, 기업과 권력 간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겐 좋은 기회였다. 그럼에도 그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갈 것이라고 못박았다.

“저는 교수의 소명이 ‘빈둥거리기’라고 생각해요. 1년에 교수가 의무적으로 강의해야 하는 시간이 15시간입니다. 논문 한 ㄹ편, 학교서 요청하는 시험 감독이나 출제 등의 일이 교수가 한 해 동안 하는 일이죠.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교수의 신분을 보장해줘요. 왜 그럴까요?”

그는 교수 집단이 사회의 소금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수에게 부와 권력을 주지 않는 대신 시간과 명예를 준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무렵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 실제 자신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면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세월호처럼 침몰하는 배인지, 방송서 흘러나오는 말이 우리를 죽이는 말인지 살리는 말인지 누군가는 판단하고 평가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실장은 사회가 교수 집단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고 보고 있었다. 사회에 쓴소리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직업군에 속해있다는 자부심과 고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말을 나누는 내내 그는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까’라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판사로 재직하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사이 체화된 습관인 듯 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고민의 습관
‘이번엔 무슨 공부’ 배움의 연속

그에게 ‘고민의 습관’을 준 건 부산지방법원에 갓 부임했을 당시 맡았던 사건이다. 1992년 부산에서는 총알택시를 타고 전국을 돌며 단독주택에 침입, 여자들을 강간하고 금품을 훔친 일당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부임 다음 날 이 재판에 들어가 결심 공판을 진행했다. 그리고 2주 후 6명의 범인 가운데 2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서울을 제외한 전국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는 자백한 것만 70여건이었다. 

그중 실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진술한 건 36건이었다.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를 강간하고, 딸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범하는 등 가해 일당이 저지른 몹쓸 짓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런 범죄자들 때문에 사형제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판사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사건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똑같은 결론이 나오더라도 좀 더 고민해야 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건은 2008년 그가 내린 국내 첫 존엄사 인정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지에 대한 사건이었다. 

2008년 2월 병원서 폐암 조직검사를 받던 중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의 연명 치료 중단 여부는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첫 재판을 하자마자 ‘연명 치료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정한 김 실장은 실제 김 할머니를 만나본 이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김 할머니를 뵙기 전에는 그 분이 이미 돌아가신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할머니 몸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눈도 깜빡이려고 하고 뭔가 전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의사들은 무의식적 반응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제 눈에는 그분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때부터는 그분이 이 연명치료를 원할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죠.”

김 실장이 주범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은 그 결은 다르지만 판결에 의해 누군가의 생사가 좌우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1992년 사건으로 죽음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된 그는 종교계를 포함, 주변 사람들에게 김 할머니 사건과 관련한 의견을 들으려 애썼다. 법리상으로 호흡기를 떼는 게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상황이었지만 김 할머니의 의사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김 할머니가 연명 치료 중단을 원할 거라고 답했어요. 아마 본인도 그 상황에 닥치면 호흡기를 떼 주길 바라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2009년 5월 대법원은 김 할머니의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김 실장은 김 할머니의 호흡기가 제거되는 날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1992년 주범 두 사람의 사형 집행 당시 그들을 찾아가보지 못한 마음의 빚도 일부 털어냈다.

후회 없는 삶
매일 즐겁게∼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동네 어르신들을 보면 그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뭐하고 살았는지 늘 묻고 싶었어요. 그들의 삶을 통해 제가 가야할 방향을 귀동냥 하고 싶었죠. 그런데 어느덧 제가 아들이나 손자에게 그 대답을 해줄 나이가 됐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그 애들이 열심히 살았다고 해줄지, ‘용서’해줄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것보다는 딱 한 발이라도 나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전할 수 있다면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jsjang@ilyosisa.co.kr>

 

[김천수는?]

▲전주해성고, 서울대 법대(82학번)
▲사법연수원 제18기
▲부산, 울산, 수원 각 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원(행정)
▲인천(형사), 서울서부지법(민사) 각 부장판사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미국 버클리대학 각 장기연수
▲대법원 UNCITRAL 국제규범연구반(운송, 담보, 전자상거래) 반장
▲GLMP 2기, 인하대학교 물류MBA(MGLM) 1기, 물류박사 과정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효성그룹 법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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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6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서영교 의원을 누르고 22대 더불어민주당 2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김 원내대표는 내란 종식과 헌정 질서 회복, 권력기관 개혁을 외쳤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청래 신임 당 대표가 선출됐다. 이재명정부 첫 여당 지도부가 제모습을 갖추면서 안정 궤도에 접어드는 듯했다. 약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정청래 대표의 첫 갈등이 불거졌다. 정 대표가 지난 9월11일 여야 원내 지도부가 합의한 3대 특검법 합의안에 대해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고, 지도부 뜻과 달라 재협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다. 불안불안 이인삼각 특검법 개정안의 핵심인 기간 연장을 제외한 채 합의해 특검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게 정 대표의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곧바로 반박했다. 원내 지도부와의 긴급회의를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취재진을 향해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그래!”라며 소리쳤다. 이후 당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지자 김 원내대표는 오히려 취재진을 향해 “왜 자꾸 합의라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는 “(합의가 아니라) 1차로 논의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며 “수사 기간과 규모에 다른 의견에 있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제 총론만 (발표)하고 나갔는데 원내수석들이 각론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마치 합의가 된 것처럼 보도됐다”며 합의문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사흘 만인 13일 봉합됐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의 SNS에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 내란 종식과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이렇게 냉전은 끝났지만 지지층의 비난은 거셌다. 김 원내대표를 향해 ‘수박’ ‘변절자’ 등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당 대표를 지냈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행보와 비교하는가 하면 ‘역시 서영교 의원을 뽑아야 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지지층의 미묘한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검사 징계안을 놓고 두 번째 갈등이 터졌다. 법사위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장 18명을 고발한다고 밝힌 데 대해 “협의가 없었다”고 선을 그으면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지난달 19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무소속 등 범여권 의원들은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검사장 18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당 간사인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조직 기강과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검사장 18명의 집단 항명 행위에 대해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당심’이 뽑은 정, ‘의심’이 뽑은 김 연일 삐거덕…벌써 이재명 리더십 부재? 김 원내대표는 고발 소식이 알려진 뒤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봤다”며 “그렇게 민감한 것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해야 한다. 협의를 좀 해야 했다”고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 “뒷감당은 거기서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발장을 제출한 법사위 쪽에 책임을 물었다. 법사위의 검사장 고발은 원내 지도부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용민 의원은 검사장 고발 문제에 대해 “당의 기조와 흐름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고발장을 그날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뿐, (원내 지도부와) 소통이 없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원내(지도부)와 소통할 때 이 문제를 법사위는 고발할 예정이라는 걸 얘기했다”며 “원내가 많은 사안을 다루다 보니까 (고발 문제를) 진지하게 듣거나 기억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일이라면 원내대표는 말 그대로 원내 상황을 조율하고 총괄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으니 (민주당) 의원들도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조금씩 노출되면서 지지층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과 원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민주당의 배경에는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의 선출 방식이 거론된다. 강경 지지층이 밀어 올린 정 대표와 달리 김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당시 원내에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수 포진했던 만큼 김 원내대표 의중은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에 가깝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개혁을 외치는 정 대표의 지지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강성 지지층에게 김 원내대표는 이미 ‘투아웃’이다. 여기에 정 대표의 공약이었던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 반영 비율을 ‘1대 1’로 변경하는 당헌·당규 개정이 부결되면서 지지층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밑서 치솟고 위서 누르고 그동안 민주당은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규정해 왔다. ‘동등한 1인1표제’는 정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정책 중 하나로 “나라의 선거에서 국민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하듯 당의 선거에서도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 두 사람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정 대표 쪽에선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때부터 추진됐던 개혁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 ‘시기’와 ‘방법’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권리당원의 힘으로 대표직에 오른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1인1표제를 추진하자 친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와 일부 당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1인1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최고위원은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절차의 정당성·민주성 확보, 그리고 취약 지역(영남 등)에 대한 전략적 규제와 과소 대표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친명계인 윤종군 의원도 SNS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 방향에 동의한다”면서도 “전 지역 권리당원 표를 1인1표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TK(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당원 자긍심 저하, 당세 확장 장애 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과 관련해서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 대표는 당 컨트롤이 안 되고, 원내대표는 의원들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난 지도부(이재명 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가 워낙 합이 좋았고 당 대표 리더십도 강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중심축이 없으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반 발자국만 앞서도 자기 정치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정 대표의 1인1표제는 중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일 치러진 투표 결과 중앙위원 총 593명 중 373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77표, 반대 102표로 과반이 찬성하지 않아 부결된 것이다. 남은 고비 얼마나? 원내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인 ‘정청래발 개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의 고충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조차 몇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 대표는 ‘개혁 골든 타임’을 필두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그런 김 원내대표가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을 못 박으면서 ‘쓰리아웃’은 겨우 면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내란전담재판부는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치한다”며 “여기에 대해 더는 설왕설래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 제한’ 조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내란 사범이 사면돼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적극 관철하겠다”며 “내란 사범을 사면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만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 내란 주요 피의자에 대한 내란죄가 확정될 경우 사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로부터 약 일주일 뒤인 지난 4일 범여권의 주도로 ‘내란전담재판부(내란특별재판부)’ 설치법이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는 해당 법안을 이달 중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며 속도를 냈다. 해당 재판부는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내란 사건 전담을 골자로 한다.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및 영장전담법관 추천위원회는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법무부 장관과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총 9명으로 구성된다. 내란전담재판부로 성난 지지층 달래도… 위헌 폭탄 껴안고 걸어가는 ‘불’꽃길 구성을 마친 추천위원회는 2주 안에 영장전담법관과 전담재판부를 맡을 판사 후보자를 각각 정원의 2배수로 추천해야 하며 최종 임명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구속기간은 최대 6개월이지만 특별법에서는 내란·외환 관련 범죄에 대해 구속기간을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힘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한마디로 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 쓰겠다는 ‘지귀연 판사 바꾸자는 법’”이라며 “사법부의 무작위 배당 원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미 재판하는 사건도 뺏어서 다른 판사한테 맡기겠다는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날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역시 “1987년 헌법 아래 누렸던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법에 여러 가지 위헌 요소가 있다”고 반대했다. 천 처장은 “헌법재판소가 결국 이 법안에 대해 위헌 심판을 맡게 될 텐데 헌재소장이 추천권에 관여한다면 심판이 선수 역할을 하게 돼 룰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며 “헌법재판소장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위헌심판)을 맡을 수 없게 된다면 ‘내란특별헌법재판부’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이 예정하고 있는 바”라고 설명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으로 개혁 동력을 얻었지만 후폭풍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헌 가능성을 지닌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건 위험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원내대표로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중도층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출신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민주당은 집단 의존 증상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만 대거 유입되다 보니 여당이 된 지금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라며 “2차 종합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내란전담재판부를 어떻게 꾸릴 것인지,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서 국민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종합적인 전략을 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175석 버거웠나 그러면서 “내란전담재판부가 설치되면 국민의힘이 위헌을 걸 것이고, 법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려면 민심을 우리 편으로 끌고 와야 하는, 법률 싸움이 아닌 고도의 민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팀’ 원내대표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때아닌 ‘내 편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 문진석 당 원내운영 수석 부대표가 인사청탁 의혹에 휩싸였지만 ‘엄중 경고’에 그치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2일 문 수석이 본회의장에서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문자로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내가 추천하면 강훈식 실장이 반대할 거니까 아우가 추천해줘”라고 보냈고, 이에 김 비서관이 “제가 (강)훈식이 형이랑 (김)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인사 청탁 논란이 불거지자 문 수석은 “부적절한 처신에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의힘은 ‘김현지 실세’ 프레임을 다시 띄우며 이재명정부를 압박했다. 김 원내대표의 엄중 경고로 논란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강성 지지층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며 더 강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