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3세시대 개막 효성 조현준 회장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7.24 10:27:21
  • 호수 1124호
  • 댓글 0개

형이 끌고 동생은 밀고 ‘재도약’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조석래 전 효성그룹 회장이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일선서 하차했다. 1981년 그룹 회장에 취임한 조 전 회장이 36년 만에 물러난 것. 효성그룹은 조 전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회장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됐다. 
 

지난 14일 조석래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서 사임했다. 조 전 회장은 지난해 조현준 사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킨 뒤 회장직서 물러나면서도 대표이사직을 유지해왔다.

아버지 사임
큰아들 선임

효성 관계자는 “조 전 회장이 장남 조현준 회장 중심의 경영체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됐다고 판단하고 경영 일선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며 “향후 경영 전반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 전 회장은 그룹 경영 일선에선 물러나지만 건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봉사활동이나 사회공헌활동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효성은 본격적인 3세 경영에 닻을 올리게 됐다. 그동안 효성은 조홍제 창업주와 그의 아들인 조석래 전 회장, 손자 조현준 회장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조 창업주는 1906년 5월20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부락서 출생했다. 조부의 훈도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7세까지 5년 동안 종조부인 서천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이후 1922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이던 1926년 6·10 만세운동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기소돼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9년 호세이 대학의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1935년에 졸업하여 귀국했다. 1948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공동 출자로 삼성물산공사를 창립했다. 1962년 9월, 15년간에 걸친 이 회장과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효성물산 주식회사로 독자사업을 시작했다. 

1966년 한국타이어, 대전피혁 등을 인수했다. 이 때부터 장남 조 전 회장이 사실상 효성그룹을 이어받는다. 

조 전 회장은 1935년 11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서 출생했다. 이후 군북국민학교를 다니다 5학년때 서울 재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55년 일본 히비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 진학한다. 

조석래 36년 잡았던 지휘봉 내려놔
두 아들 장남·3남 형제경영 탄력

이후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 입학,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년 박사 위 과정을 준비 중이던 조 전 회장은 아버지 부름을 받고 귀국, 기업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귀국한 그해부터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추진하며, 1973년에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했다.

197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부응하며,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기술 개발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섬유화학 분야서 신소재와 응용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종합 신소재 기업을 탄생시켰다.

1975년 한영중공업을 인수, 효성중공업으로 새롭게 출범시켜 중전기기와 산업기계를 국산화하고 양산하도록 했다. 1980년대에는 화섬산업서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이와 함께 금융자동화기기와 중대형 컴퓨터를 비롯한 하드웨어 사업과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에 참여하여, 정보통신 분야에 진출하였다.

1997년 12월 효성그룹의 전 조직을 퍼포먼스 유니트(Performance Unit) 체제로 바꾸고 PU별 책임 경영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1998년 11월에는 효성T&C,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효성물산 등 주력 4사를 합병하고 비핵심 계열사 및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등 혁신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조 전 회장은 효성을 국내 5대 그룹으로까지 끌어올린다. 하지만 주력 사업인 섬유 산업 자체가 사양 산업화 되면서 효성의 사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외환위기가 닥치며 그룹의 생존을 위해 계열사들을 분리해 내면서 한 때 40대 그룹 밖으로 밀려났다. 현재는 타이어코드, 방탄섬유, 스판덱스 등 특수목적 섬유 방면서의 절치부심으로 다시 23위 수준까지 부상해, 20대 그룹 재진입을 목전에 둔 상황이다.

기업인 51년
전경련 회장도  

조 전 회장은 재계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2002년 5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서 개최된 태평양경제협의회 총회서 회장에 선임돼 활동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지냈고, 한미재계회의 위원장(2000∼2009년)과 한일경제협회장(2005∼2014년)을 역임했다. 

전경련 회장을 지낼 땐 정부에 규제개혁을 요구하며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과 투자활성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 전 회장이 대표이사직에 내려놓은 이유로는 우선 고령과 건강문제가 꼽힌다. 1935년 생으로 올해로 만 82세의 나이인 데다, 수년 전 담낭암과 전립선암 발병으로 최근까지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조 전 회장이 사임한 뒤 조현준 회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효성은 기존 김규영 대표이사 체제서 조현준·김규영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변경했다고 지난 20일 공시했다. 그간 효성 대표이사는 조 회장·이상운 부회장 체제를 유지하다가 지난 4월 이상운 부회장이 대표이사직서 사임했다. 

이후 김규영 사장이 이 부회장을 대신해 각자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이번 선임으로 효성은 기존 조석래·이상운 체제서 조현준·김규영 체제로 세대교체를 완료했다. 

효성 관계자는 “조 회장의 대표이사 선임은 효성이 최근 2년 간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는 등 체제가 안정화된 상황서 책임경영을 강화하겠다는 차원서 이뤄진 것”이라며 “조 회장은 성과중심의 조직체계 개편, 경영시스템 개선, 스판덱스·타이어코드·중공업·정보통신 등 주력사업 부문의 글로벌 시장지배력을 확대하는 등 회사를 성장시켜 왔다”고 설명했다.

앞서 조 회장은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경영권 강화에 나섰다. 조 회장이 지난 7일과 10일 각각 효성 주식을 1878주, 9182주를 장내 매수했다. 지분율은 지난 3월30일 14.20%(498만6629주)서 7월 13일 14.23%(499만7689주)로 0.03%포인트(1만1060주) 늘었다. 조 전 회장도 같은 기간 1만1811주를 장내매수하면서 지분율을 10.15%서 10.18%로 0.03%포인트 늘렸다.
 


재계 안팎에서는 효성이 지난해 창사 이후 처음으로 영업이익 1조원을 돌파하면서 조 회장의 경영 기반이 안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 회장은 최근 인도의 경제 정책 수장인 아룬 자이틀리(Arun Jaitley) 인도 재무장관 겸 국방부 장관과 만나는 등 인도 시장 진출에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앞서 지난 1월 조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조 전 회장의 기술중심 경영철학을 이어받고 소통과 경청을 통해 항상 승리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조 회장은 1968년 1월16일 경남 함안군서 태어났다. 조 창업주 손자이자 조 전 회장의 장남이다. 송광자 경운박물관장이 모친이다. 동생으로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과 조현상 효성 부사장이 있다.

1980년 경기초등학교, 1983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예일대학교 정치학과와 게이오대학교 법학대학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 상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에너지부와 원유수입부 등에서 근무했다.

1995년부터 모건스탠리 도쿄지점서 일했다. 1997년 효성T&C(현 효성)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입사해 효성T&C와 효성물산,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을 합병하는 작업에 관여했다. 1998년 효성 전략본부 경영혁신팀 이사로 승진했다. 2000년 상무, 2001년 전무를 거쳤다. 

이때 이희상 동아원그룹 회장의 삼녀 이미경씨와 혼인했다. 이씨와 사이에 2002년 장녀 조인영, 2006년 차녀 조인서가 태어났다.


2003년 부사장에 올랐다. 당시 전략본부장으로서 중공업 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대우종합기계와 대우정밀 인수를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대우종기(현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중공업에 밀렸고 대우정밀은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으나 채권단과 뜻이 맞지 않아 결렬됐다.

2005년 신사업을 발굴하는 역할을 조현상 부사장(당시 전무)에게 넘겨주고 무역PG장으로 옮겨 효성의 의사결정기구인 ‘경영회의’에 참여하게 됐다. 2007년에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섬유PG장을 겸했다. 이후 2011년부터 전략본부장을, 2012년부터 정보통신PG장으로 근무했다.

2008년 대주주로 있는 갤럭시아커뮤니케이션즈, 효성ITX,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 등을 통해 제이슨골프, 럭스맥스, 럭스맥스네트워크, 인포허브, 크레스트인베스트먼트, 바로비전 등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하며 효성그룹 내 갤럭시아소그룹을 만들었다. 트리니티에셋매니지먼트를 통해 IB스포츠(현 갤럭시아SM)에도 투자했다.

2009년 효성 계열사인 에피플러스(현 갤럭시아포토닉스)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지분율 확대 
본격적 행보 

재계에선 조 회장에 대해 탁월한 글로벌 감각을 지닌 준비된 경영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폭넓은 해외경험과 창의적인 마인드를 갖춘 재계의 대표적인 글로벌인재로 인정받았다. 특히 능통한 3개 국어에 능통해 다양한 국가의 인사들과 네트워크 구축했으며 미국과 일본 등 기업서 근무하며 글로벌 감각을 쌓았다. 

또한 조 회장이 다양한 인맥과 경험 덕분에 전경련 회장을 지낸 아버지만큼이나 글로벌 감각과 경험, 인맥을 갖춘 차세대 리더로 꼽히고 있다. 조 회장은 2014년 첫 외부활동으로 한일경제협회 회장을 역임한 아버지에 이어 한일경제협회 회장으로 나서기도 했다. 

2015년 5월에는 한일 주요경제인들의 모임인 ‘한일경제인회의’에 패널로 나서 ‘미래세대가 바라본 한일 미래상과 협력방안’을 발표한 바 있는데, ICT산업 분야서의 협력과 한국의 창조경제에 대한 투자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효성의 성장을 이끌며 경영능력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성은 지난해 매출 12조4585억원, 영업이익 9502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가운데 올해 영업이익은 1조원을 달성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는 섬유, 중공업, 정보통신, 건설 등 핵심사업서 지속적인 수익 창출을 위해 시장 발굴 및 신규고객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는 조 회장의 효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조 회장은 재계서도 유명한 스포츠 마니아로 대학시절까지는 야구, 미식축구, 스키 대표선수를 지냈을 정도다. 조 회장은 야구와 경영이 비슷한 점이 많다며 야구경영론을 앞세우기도 했다. 

경영체제 안정적으로 구축
그룹 내부도 개편될 전망

조 회장과 형제경영을 함께 할 조 전 회장의 3남 조현상 효성 사장에 대해서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조 사장은 올해 정기임원 인사를 통해 산업자재PG장 겸 전략본부장을 맡아 형 조 회장을 보좌하며 회사를 이끌고 있다.

조 사장은 경복고와 연세대를 거쳐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996년 베인 앤 컴퍼니 서울 지사, 동경 지사서 컨설턴트로 근무, 실무경험을 쌓았다. 조 사장은 1998년 조 전 회장의 부름으로 사내컨설턴트 역할을 맡아 구조조정에 대한 자문 역할로 경영에 첫 참여했다. 이후 일본 NTT 커뮤니케이션사의 요청으로 NTT에 합류, NTT 유무선 관련 전략 프로젝트, 법인 영업 등을 수행했다.

효성에 2000년 재입사한 조 사장은 산업자재PG장 겸 전략본부의 임원으로 효성을 폴리에스터 타이어코드, 시트벨트용 원사, 에어백용 원단부문 세계 시장점유율 1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조 사장은 효성의 세계 1위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2000년대부터 글로벌 타이어업체들과의 M&A를 본격화 했다. '협상의 달인'이라 불리며 그룹의 신사업 및 대형 M&A를 주도해 나감으로써 산업자재PG의 성장을 이끌어 왔다. 

조 사장은 2002년 세계 최대 타이어 업체인 미국 미쉐린과 총 3억5000만달러 규모의 타이어코드 장기공급 계약과 미국 버지니아 주 타이어코드 공장을 인수하는 계약을 동시에 체결했다. 이후 미쉐린, 굿이어 등과 연이은 M&A를 성사시키며 생산거점 확대 및 판매확대 기반을 마련했다. 2005년에는 미쉐린과 10년간 총 6억5000만달러 규모의 스틸코드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조 사장은 주요 M&A를 통해 주주, 고객, 임직원 등 이해관계자의 비즈니스 가치 극대화 추구를 이끈 역량을 인정받아 2007년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하는 '차세대 글로벌리더(YGL)'로 선정됐다. 2009년에는 세계경제포럼 글로벌 아젠다위원회 멤버로서 아젠다 선정 작업에 참여하는 등 세계경제포럼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긍정적인 평가
사상 최대 실적

 
또한 미국과 아시아의 이해증진을 목적으로 창설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대표적 포럼인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아시아 21 글로벌 영리더'에 선정됐다. 한·중·일 3국 외교부가 선정한 ‘한·중·일 차세대지도자’로 뽑히는 등 차세대 리더로 인정받으며 주목 받고 있다. 조 사장의 활약으로 굿이어와의 M&A를 성사시킬 수 있었고, 장기공급 계약으로 타이어보강재PU가 세계 1위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게 됐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