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권 선수들 인종차별 논란

아시안이 LPGA 망친다고?

지난 2003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선수 출신 원로 골퍼 잰 스티븐슨(호주)은 “아시아권 선수들이 LPGA투어를 망치고 있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이 같은 스티븐슨의 발언은 큰 물의를 빚었다. 당시 스티븐슨은 LPGA투어가 미국선수에게 우선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티븐스의 발언은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 자리를 굳힌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비하한 발언과 맞먹는 인종차별적 망언이었다. 스티븐슨은 비난여론이 빗발치자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LPGA투어에서 비영어권, 특히 아시아권 선수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이 엄존한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계기가 됐다.

아시안 투자로
성장하는 LPGA

아시아권 선수에 대한 차별 논란은 2008년 LPGA투어가 비영어권 출신 선수를 대상으로 영어시험을 치러 불합격하면 투어대회 출전을 제한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으면서 다시 한 번 불거졌다. 거센 반발로 결국 영어시험 방안은 백지화됐지만, 아시아 국가 출신 선수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널리 확산되는 기폭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LPGA투어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출신 선수들이 우승을 휩쓰는 바람에 미국에서 점점 인기를 잃어간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국내 골프팬 가운데도 상당수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런 왜곡된 시각을 증폭시키는 것은 LPGA투어가 갈수록 아시아권 선수들의 잔치판이 되어 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번 시즌에 치러진 12개 대회 가운데 5개 대회 우승트로피는 한국선수가 차지했고 한국 태생 리디아 고(뉴질랜드)가 2개를 가져갔다. 일본 국적의 노무라 하루도 우승컵 2개를 챙겼다. 또 한국인 부모를 둔 이민지(호주), 그리고 태국의 아리야 주타누간이 각각 1승씩 챙겼다. 13개 대회 가운데 12개 대회 우승자가 아시안 핏줄인 셈이다. 미국 국적 챔피언은 혼다 LPGA 타일랜드를 제패한 렉시 톰프슨(미국)가 유일하다. 국적이 미국이지만 LPGA투어 인기 스타나 기대주 가운데 아시아계가 적지 않다.


올해 13개 대회서 아시안 12회 우승
성적 고공행진에 시샘어린 시선 늘어

스티븐슨이 아시아권 선수가 LPGA투어를 망친다고 주장한 2003년 시즌에는 31개 대회 가운데 아시아권 선수가 우승한 대회는 10개였다. 박세리(39·하나금융)와 캔디 쿵(대만)이 각각 3승씩 거뒀고 한희원(37)이 2승, 박지은(37), 안시현(32)이 각각 1승씩 올렸다. 아시아권 선수의 활약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이지는 않다. 스티븐슨의 주장이 맞다면 아시아 출신 우승자가 훨씬 많아진 지금 LPGA투어는 망했어야 한다.

하지만 LPGA투어는 오히려 더 발전하는 중이다. LPGA투어는 지난 2008년 이후 금융위기 여파로 크게 위축됐다. 2011년 대회는 고작 23개만 개최했다. 그러나 올해는 대회가 33개로 늘어났고 상금은 2011년보다 56%나 증가했다. 올해 LPGA투어는 지난해보다 대회는 2개, 상금은 400만달러가 늘어났다. 분명한 성장세다.

인기 폭증
선순환 구조

LPGA투어가 금융위기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다시 도약한 데는 아시아의 힘이 컸다. 미국 골프 칼럼니스트 랜들 멜은 트위터에 “예전에 어떤 유명 선수가 말하기를 아시안이 LPGA를 망친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가 LPGA투어를 구해냈다”고 썼다. 스티븐슨의 ‘망언’이 틀렸다는 것이다.

2011년 LPGA투어 대회 23개 가운데 아시아 기업이 타이틀 스폰서를 맡은 대회는 7개뿐이었다. 지금은 14개로 늘었다. 아시아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가 늘어난 덕도 있지만, 미국 땅에서 열리는 대회 18개 가운데 3분의 1에 이르는 6개가 아시아기업 후원으로 개최된다. 아시아기업의 손길이 없었다면 LPGA투어는 고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일본
LPGA ‘큰손’


마이크 완 LPGA 커미셔너는 “2008년 이후 고사 위기에 빠진 LPGA투어를 구해낸 것은 해외로 눈을 돌린 덕”이라며 “아시아에서 건너온 뛰어난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 LPGA투어의 경쟁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완 커미셔너가 말한 ‘해외’는 아시아지역과 아시아기업이다.

아시아 출신 선수들이 LPGA투어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아시아지역에서 LPGA투어의 인기가 폭증하고 이에 따라 후원하겠다는 기업도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에 진입했다는 설명이다.

아시아 각국에서 LPGA투어 중계권을 비싼 값에 산 것도 LPGA투어에 큰 힘이 됐다. 아시아권 선수가 늘어났고 다들 뛰어난 성적을 내기에 아시아 각국 방송사가 LPGA투어 중계권 구매에 선뜻 돈을 지불한다.

LPGA투어 마케팅 담당 존 포더니 이사는 “투어 수입은 2008년보다 60%가량 늘었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절반이 넘는다”고 밝혔다.

아시아기업 투자 늘수록 규모 확대
투자 없었다면 “고사했을 것” 분석

아시아권 선수들이 영어에 서투르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박인비(28·KB금융), 최나연(29 ·SK텔레콤), 유소연(26·하나금융) 등 한국선수와 쩡야니(대만), 미야자토 아이(일본) 등은 모두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에 응하고 프로암 파트너와 대화한다. 주니어 때 미국에 유학하거나 미리 영어를 익힌 뒤 미국에 건너오는 선수가 부쩍 늘었다.

이렇듯 이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기업의 후원이 LPGA투어의 마케팅 동력이 됐다. 올 시즌 열리는 LPGA투어 대회 가운데 절반 이상의 타이틀스폰서가 아시아기업이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2016년은 지난해보다 최대 3개가 늘어난 34개 대회가 열리고 있다. 아시아기업은 15개, 44%나 된다. 특히 국산골프공 생산업체 볼빅이 나서 볼빅챔피언십을 창설했다.

한국은 이미 LPGA투어의 ‘큰손’이다. 국내에서 열리는 KEB하나은행챔피언십(총상금 200만달러)을 비롯해 JTBC파운더스컵(150만달러), KIA클래식(170만달러), 롯데챔피언십(180만달러) 등을 열고 있다. 볼빅이 합류하는 내년에는 일본과 같은 5개 대회로 LPGA투어에서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게 됐다.

일본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ANA인스퍼레이션(250만달러)과 리코브리티시여자오픈(300만달러) 등 메이저가 2개다. 여기에 혼다LPGA타일랜드(150만달러)와 요코하마타이어클래식(130만달러), 토토재팬클래식(150만달러) 등이 있다. 후원한 상금만 무려 980만달러(113억원)에 이른다.

한층 커지는
아시아 의존도

LPGA투어의 아시아 의존도는 앞으로 더 커질 전망이다. 미국 내에서는 현실적으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영역을 넓혀야 하고 그 대상이 바로 아시아다. 한국과 일본, 대만, 중국, 태국 등에서의 성공적인 마케팅에 자신감을 얻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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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