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박의 남자’ 이원종 청와대 신임 비서실장

공중전화 수금원서 청와대 2인자로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이병기 전 비서실장이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 자리에 이원종 신임 비서실장이 투입됐다. “소통과 협치의 정치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5일 여야 3당 원내지도부와 청와대 회동을 한지 불과 이틀 만에 청와대 참모진 개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는 4·13 총선 민의를 수용해 여야 정치권은 물론 각계와의 소통·협치 정치를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인사 때마다 
총리 물망에 

특히 여야 정치권을 중심으로 청와대 참모진과 내각의 인적쇄신과 개편이 강하게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 청와대 비서진의 상징인 비서실장을 전격 교체하고 국정 전반의 정책을 총괄하는 정책수석,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경제수석을 교체함에 따라 앞으로 국정 운영에 있어서 소통·협치, 민생·경제에 방점을 찍었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김성우 홍보수석은 지난 15일 춘추관에서 이런 내용의 청와대 참모진 개편 인사를 발표했다. 김 홍보수석은 “이원종 신임 비서실장은 행정 전반에 걸쳐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고 친화력과 신망이 있는 분이다”며 “박 대통령을 원활히 보좌하여 국민 소통과 국가 발전에 기여할 적임자”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비서실장이 친박이 차기 대선후보로 점찍어 놓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충청모임 ‘청명회’에서 함께 활동해온 멤버라는 점에서 ‘박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반 총장을 차기 대선후보로 영입하기 위한 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런 정치권의 반응에 대해 이 비서실장은 “두텁다고는 하는데 같은 고향인 정도”라며 “각별하게는 뭐…”라고 청와대 기자들에게 말했다. ‘최근에 언제봤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오래됐다. (반 총장이 청와대) 수석 하실 때 부부 모임으로 청와대 초청받아서 식사하는데 옆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반 총장 방한을 앞두고 있는 미묘한 시기에 이 비서실장의 인사가 이뤄져 정치권에는 적지 않은 파장이 일고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이번 인사에 대해 반응이 엇갈렸다.

총선 참패 후 참모진 개편카드
행정 전반에 걸쳐 풍부한 경험

민경욱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이 비서실장은 행정 전반에 걸쳐 풍부한 경험을 갖췄을 뿐 아니라 대통령직속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근무하여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한 분”이라며 “탁월한 친화력과 신망을 갖춘 분으로 앞으로 청와대와 정치권 간 원활한 의사소통 등에도 앞장서 주시리라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번 인사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재경 더민주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비서실장 교체 등 일부 청와대 참모진 교체는 총선 민의와 거리가 있는 인사다”며 “교체폭과 인사 내용이 총선에서 드러난 성난 민심에 최소한의 답도 되지 못한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손금주 국민의당 수석대변인 역시 “박 대통령의 이번 비서실장 교체 인선 등 참모진 개편의 폭과 내용에대해서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며 “이 비서실장이 민심을 가감 없이 직언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 비서실장은 임명 직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국가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님을 보필하는 소임을 맡게 돼 우선 두려운 생각과 아울러서 어깨가 매우 무겁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평생 공직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이요.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며 “앞으로 노력해서 대통령께서 지향하는 희망의 새시대, 국민이 행복한 시대를 열어가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체신학교 나와
신화적인 존재

박 대통령이 이 비서실장을 발탁한 것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오랜 공직 경험으로 이른바 ‘행정의 달인’으로 불려온 이 비서실장은 대통령 보좌 및 청와대 업무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데 있어 적임자라는 평가 속에 박 대통령의 낙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2월 말 임명된 이병기 비서실장은 4·13 총선 이후 사의를 표명했으나 박 대통령이 사표 수리를 미뤄왔다.

이 비서실장은 현 정부의 4대 실장이다. 초대 허태열(경남 고성), 2대 김기춘(경남 거제), 3대 이병기(서울) 비서실장에 이은 첫 충청권 출신 인사이기도 하다.
 

이 비서실장은 ‘두루 원만하고 무난하게 일을 처리하는 안정적인 사람’이라는 게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 비서실장은 어릴적 소나무 껍질로 허기를 채울 만큼 어렵게 자랐으나 서울시장과 충북도지사를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올랐다.

이 비서실장은 1942년 충북 제천 출신이다. 너무 가난해 고교 진학을 꿈도 꾸지 못한 이 비서관은 국립 체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63년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전화국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한다. 가죽가방을 매고 걸어 다니며 서울시내 공중전화기의 동전을 거둬들이는 일을 했다. 밤에는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야간으로 다녔다.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서울시청 사무관으로 첫 발을 내디딘 뒤 대부분 공직 경험을 서울시에서 쌓았다. 용산·성동·강동·성북·동대문 등 5개 지역 구청장을 지냈다.

광화문 전화국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
충북지사 3번 자타공인 ‘행정의 달인’

이 비서실장은 사무관 시절 청와대 내무행정관으로 근무했고,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새마을운동의 기초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서실장은 2014년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새마을운동 사업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겐 못살고 굶주린 농촌을 바꿔야겠다는 무서운 집념이 있었다”며 “아침마다 대통령께서 밤새 고민한 흔적이 글과 그림으로 표시된 쪽지가 내려오는데 그 쪽지를 받아들고 열심히 연구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 비서실장의 이런 경력 때문에 ‘아버지’와의 인연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또 노태우정부 때인 1991년에는 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 이듬해 관선 충북지사(제26대), 1993년에는 관선 서울시장(제27대)으로 일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 서울시장에서 물러났지만, 검찰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강의하고 청주 서원대 총장을 지내는 등 교육계에 몸담기도 했다. 정치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 살아가지만, 지방자치제 선거를 통해 다시 부활한다.

1998년 지방선거 때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소속으로 민선 제2기 충북지사(제30대)에 당선됐다. 당시 당선소감문에서 “박달재 알쫑이(알토란 같은 원종이)가 충북을 꿈과 희망이 넘치는 한반도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며 일성을 밝혔다.


2002년 선거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바꿔 31대 충북지사 재선 고지를 밟았다. 관선까지 합쳐 모두 3차례에 걸쳐 충북 도정을 이끌었다. 충북지사 재임 때 2002 오송 국제바이오엑스포를 개최하는 등 오성바이오단지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50%가 넘는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불출마를 선언하며 용퇴했다.

소탈한 스타일
반기문과 연결?

이 비서실장의 성품은 소탈하고 부드러워 정치권과의 관계가 두루 원만하다는 평이다. 박 대통령이 이 비서실장을 발탁한 배경이기도 하다. 충북지사 시절 비서실 직원도 모르게 맏딸 결혼식을 치를 정도다. 또 자기 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친화력이 장점으로 꼽힌다. 풍부한 행정 경험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국무총리 인선 때마다 단골 후보자로 물망에 올랐다. 현 정부 출범 이후 2013년 8월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에 임명됐다. 


<min1330@ilyosisa.co.kr> 

 

[이원종은?]

▲1942년 충북 제천 ▲제천고 ▲성균관대 행정학과 ▲한양대학교 행정학 석사 ▲제4회 행정고시 ▲서울시 용산구청장 ▲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 ▲제26·30·31대 충북지사 ▲제27대 서울시장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 법무행정분과 자문위원 ▲제4대 서원대학교 총장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석좌교수 ▲한국지방세연구원 이사장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  

 


<기사 속 기사>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강석훈 경제수석은 누구? 
 

새누리당의 4·13 총선 패배 한 달 만인 지난 15일 전격 단행된 청와대 경제팀 개편인사로 안종범 신임 정책조정수석과 강석훈 신임 경제수석을 발탁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경제브레인의 한 축인 강 수석의 등판은 기업 구조조정 등 현안과 함께 4대 구조개혁 등 핵심 국정과제에 대한 공격적 대응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다른 축인 안 수석을 거중 정책조정을 담당하는 정책조정수석으로 업그레이드시키면 국정 기조도 뚝심 있게 밀어붙이겠다는 뜻도 분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강 수석과 안 수석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만든 주인공들로 ‘진박’으로 통한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속도감 있는 경제정책 운영이 예상된다. 일각에선 청와대 경제팀의 무게감은 경제부총리보다 무거울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강 수석은 경제학자 출신으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시절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2012년 대선 당시엔 새누리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실무추진단 부단장을 맡아 공약을 주도했다. 아울러 강 의원은 19대 국회에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여당 간사로 활동했고, 공무원연금제도개혁TF 위원을 맡아 공무원연금 개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강 의원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대우 경제연구소를 거쳐 한국재정학회 이사, 성신여대 입학홍보처장 등을 재임했고, 18대 대통령직인수위 국정기획조정분과 인수위원을 지냈다. 강 의원은 또한 20대 총선에서 재선을 노렸지만, 당내 경선에서 박성중 당선인에게 패배해 낙천했다.

안 수석은 1981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1984년 동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를 마친 후 1991년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대우경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1996년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조정부장, 2002년까지 감사원 국책사업감시단 자문위원 등을 역임한 경제 전문가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시립대학교, 1998년부터 현재까지 성균관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학계에도 몸을 담았다.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 예산재정개혁특별위원회 간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개혁소위원회 간사 등을 지냈다.

특히 2012년 새누리당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캠프 정책메세지 본부장, 제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고용복지분과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며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총괄하고 2014년부터 최근까지 경제수석을 역임하면서 현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로 평가 받는다. 청와대에서는 안 정책조정수석이 각종 정부 정책을 원활히 보좌해 후반기 정책운영 효율성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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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