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회피 의혹' 정재계 거물 리스트

칼 빼든 사정당국…'유령계좌' 몽땅 턴다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아이슬란드 총리의 사임을 시작으로 각국 정상들이 연이은 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OECD 산하 국제탈세정보교환센터의 회원국 대표들은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 모든 게 ‘파나마 페이퍼스’로 명명된 비밀문서의 공개 후 벌어진 일들이다. 물론, 국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벌써부터 거물급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더 큰 파장이 몰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 문건은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익명의 취재원에게서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자료를 입수하면서 시작됐다. 유출된 자료는 2.6TB에 달한다. 자료의 방대한 규모와 공적 가치를 고려한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협업을 요청하면서 대형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드디어 공개
커지는 의혹

모색 폰세카는 해외법무법인으로서는 세계 4번째 규모의 대형 법인으로 홍콩, 마이애미, 취리히 등 전 세계 35개 이상에 지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주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고 있으며, 고객에게 조세당국이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어렵도록 도움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파나마 페이퍼스가 알려지자 세계 각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 회피 의혹에 대한 관련 조사에 나섰다. 국내에서도 파나마 페이퍼스의 파급력은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다. 유출 데이터에 ‘Korea’로 검색되는 1만5000여건의 파일 중 한국 주소를 기재한 195명의 한국인 이름이 포함된 까닭이다.

시작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재헌씨였다. 파나마 페이퍼스를 분석하던 조사단은 노씨가 노 전 대통령의 장남과 같은 이름이라는 점을 기반으로 생년월일과 사진을 검토한 결과 동일인물임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2012년 5월18일 버진아일랜드에서 3개의 회사를 설립해 주주 겸 이사에 취임했던 노씨는 2013년 5월 이사직에서 사퇴했다. 3개 회사 모두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에 가까웠다.


현재 노씨는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노씨는 즉각 반박자료를 내고 “중국사업을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으나 사업진행이 안돼 계좌개설도 하지 않았다”며 “관계당국에서 필요하다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세회피처나 비자금 등과는 일절 무관하다”고 말했다.

노씨는 첫 단추에 불과했다. 노씨와 관련된 의혹을 제기하면서 <뉴스타파>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추측되는 나머지 인물들에 대한 추가 공개를 공언했고 조금씩 해당 인물들의 정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인 고 서성환 회장의 자녀인 서영배·서미숙씨, 박병룡 파라다이스 대표, 김광호 전 모나리자 회장, 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곳곳 드러난
페이퍼 흔적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은 2004년 9월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워터마크 캐피털’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워터마크 캐피털은 1달러짜리 주식 1주를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다. 주주는 서 회장 1명이었고 이사 역시 서 회장 혼자였다. 주소지로 명시된 버진아일랜드의 아카라빌딩은 모색 폰세카 버진아일랜드 지점이 있는 곳이다. 노재헌씨의 유령회사가 등록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서 회장은 2013년 6월 이 페이퍼컴퍼니의 실소유주 명단에서 사라졌고, 대신 ‘얼라이언스 코퍼레이트 서비시즈’라는 회사가 주주 겸 이사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실제 주인을 감춰주는 차명 서비스용 회사인 것으로 확인됐다.

고 서 회장의 다섯째인 서미숙씨도 2006년 4월 버진아일랜드에 ‘웨이즈 인터내셔널’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것으로 파악됐다. 보통의 페이퍼컴퍼니가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하는 것과는 달리 이 회사는 주식을 4주 발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씨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의 주주는 그녀의 세 아들이었다. 불법 증여 혹은 상속을 위해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마나 페이퍼스’ 만든 인사들 공개 
속속 드러나는 의혹들…검찰 수사는?


국내 최대 카지노 기업인 파라다이스 그룹의 페이퍼컴퍼니와 스위스 계좌도 확인됐다. 해당 페이퍼컴퍼니 이름은 ‘엔젤 캐피털 리미티드’(Angel Capital Limited)고 박병룡 파라다이스 대표이사는 회사가 만들어진 20여일 후에 단독 이사로 등재됐다.

다만 박 대표를 실소유주로 단정 짓기는 힘들다. 해당 회사는 설립 당시 무기명 주식 1주를 발행해 주주를 익명으로 감춰놨다. 이후 2003년 6월 익명 주주를 차명주주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크레디트 스위스가 개입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모섹 폰세카에 차명주주 변경 서비스를 의뢰했고 연간 1500달러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김광호 전 모나리자 회장은 지난 2008년 5월20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트랜스 인터컨티넨탈(Trans Intercontinental)’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의혹을 받고 있다. 설립 서류엔 김 회장의 여권 사본과 서명 등 그가 이 페이퍼컴퍼니의 실소유주임을 증명하는 다양한 자료가 들어있었다. 이 회사에는 김 회장이 유일한 이사와 주주로 등재돼 있다. 트랜스 인터컨티넨탈은 2008년 5월 설립돼 2012년 11월 폐쇄된 것으로 나온다.

전통 도자기 제조업체인 광주요그룹의 조태권 회장도 모색 폰세카를 통해 조세도피처인 바하마에 1998년 8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8년 부친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조 회장은 바하마에 설립된 ‘와 련 엔터프라이즈 리미티드(Wha Ryun Enterprise Limited)’라는 페이퍼컴퍼니의 이사로 등재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회사의 1998년 9월7일자 회의록에는 조 회장뿐 아니라 부인인 성복화씨를 이사에 임명한다고 기록돼 있다. 두 사람은 페이퍼컴퍼니 설립 당시 일본의 주소를 거주지로 기재했다. 이 회사는 1달러 짜리 주식을발행했다. 조 회장 부부가 이사로 등재돼 있고, 계좌 서명권자도 조 회장 부부로 해놨다. ‘와 련 엔터프라이즈’는 설립 후 약 9년 뒤인 2007년 6월 폐쇄됐다.

그룹 차원에서 페이퍼컴퍼니를 개설했다는 의혹을 받는 곳도 눈에 띈다. 지난달 8일 <뉴스타파>는 포스코가 수백억원을 들여 영국 소재 페이퍼컴퍼니를 인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포스코의 주력 계열사인 포스코건설과 포스코엔지니어링이 2011년 S&K홀딩이라는 파나마법인으로부터 ‘이피시에쿼티즈’(EPC Equities LLP)라는 회사의 지분을 각각 50%(394억원), 20%(157억원)씩 인수한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이피시에쿼티즈가 영국 법인이지만 2008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영국 공시자료에 자산이나 현금흐름이 완전 ‘0’인 휴면법인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

모색 폰세카는 이피시에쿼티즈 쪽 법률대리인 자격으로 이 인수계약에 참여했다. 유출 자료엔 지분 인수 계약서 등 포스코 관련 문서가 수백 건 확인되는데 이 중엔 인수 당시 포스코건설 대표이사이던 정동화씨의 여권 사본도 포함돼 있다.

삼성테크윈(현 한화테크윈)은 지난 2001년 터키에 K-9 자주포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현대로템은 2009년 터키에 K-2 흑표전차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각각 조세회피처의 유령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모색 폰세카의 유출 자료에 따르면 삼성테크윈과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지난 2001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코오롱리미티드’, 현대로템이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2003년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KTR리미티드’다. 이 유령회사들은 사실 한 회사나 마찬가지다.

삼성테크윈과 현대로템이 계약을 맺은 유령회사들은 모두 스위스 UBS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 주주는 무기명으로 돼 있고, 회사 이사는 차명 서비스에 전문으로 이름을 빌려주는 인물들이었다고 <뉴스타파>는 전했다.

하이닉스 자회사였던 하이디스의 매각 과정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유령회사도 발견됐다.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C&H 트레이딩(C&H Trading ltd.)’라는 회사의 설립 일자는 2003년 4월16일이다. 회사는 1달러짜리 주식 2주를 발행했으며 당시 하이디스 사장이었던 최병두씨와 중국인 한궈진씨가 각각 1주씩을 소유했다. 한씨는 당시 하이디스를 인수했던 중국 BOE 그룹의 임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C&H 트레이딩'이 설립된 2003년 4월은 하이디스가 중국 BOE 그룹에 매각된 지 5개월 뒤다.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2004년 2월 28일에는 한씨가 자신의 주식 한 주를 최 전 사장에게 양도했다.


이름 오르내리는
거물급만 40명

파나마 페이퍼스의 후폭풍은 어느새 재계 유력인사들을 벌벌 떨게 만들만큼 확대되고 있다. 일전에 조세도피처 개설 의혹을 받던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금 오르내리는 양상이다. 이들 상당수는 지난 2013년 조세회피지역에 유령회사를 세웠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정·재계 거물들이다.

당시 언급된 인물들은 ▲김석기 전 중앙종금 대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삼남 김선용씨 ▲이수영 OCI 회장과 부인 김경자 OCI 미술관 관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 회장과 그 장남 조현강씨 ▲최은영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 ▲조용민 전 한진해운 홀딩스 대표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역사 황용득 사장 ▲조민호 전 SK증권 대표 부회장과 그 부인 김영혜씨 ▲이덕규 전 대우인터내셔널 이사 ▲유춘식 전 대우 폴란드 차 사장 등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조세회피 의혹을 받는 유력 인사들만 해도 40명이 넘는다. 수년 전부터 페이퍼컴퍼니 설립 의혹을 받았던 김석기 전 중앙종금 대표는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지난 2013년 8월 <뉴스타파>는 김씨가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RNTS MEDIA N.Y’(이하 RNTS 미디어)라는 해외법인을 통해 국내 어린이용 교육 콘텐츠업체인 빅스타글로벌을 972만 유로(당시 140억원)에 인수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씨는 자신이 만든 페이퍼 컴퍼니 ‘멀티럭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RNTS 미디어의 지분 33%를 보유한 1대 주주였으며 한국 관련 사업을 직접 총괄했다고도 전했다.

RNTS 미디어는 지주회사로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다. 이 법인은 조세 리조트(Tax Resort)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에 설립돼 있어 직접세와 간접세를 내지 않는다. 이 법인의 2015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RNTS 미디어 2대 주주는 지분 10.26%를 보유한 ‘SYSK Limited’인데, 여기에 배우 윤석화씨의 이름도 함께 게재돼 있다. 김씨의 부인인 배우 윤씨는 수백억원대 주식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절부절’ 거론되는 사람만 40명
‘흐지부지’ 검은돈 추적 이번엔?

파나마 페이퍼스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름이 다수 발견되자 당국의 발걸음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국세청은 한국인 명단을 확보한 뒤 탈세 혐의와 관련 세원이 포착되는 경우 즉각 세무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명단을 입수하는대로 정상적인 기업활동인지 거주자인지 등의 여부를 분석해 역외탈세인지 확인한 뒤 엄정하게 처리할 방침이다. 그러나 한국인 명단을 찾아 분석하고 조사하는 데까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외탈세 혐의자에 대한 신병확보다. 탈세 혐의를 확인한 뒤 세무조사에 착수하게 되면 출국금지 등 신병확보를 할 수 있지만 탈세 혐의자들이 세무조사 이전에 해외로 나가버리면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세회피처를 통한 역외탈세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난 2013년에도 국세청이 압수수색을 하러 현장에 나가보면 자료가 다 삭제되고 당사자는 해외로 도주해버린 경우가 상당수였다.

당시 유령회사를 설립했다고 여겨지던 한국인 182명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삼남 김선용씨,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 등 유력인사의 이름이 다수 포함됐다. 그러나 182명 중 실제 세무조사를 받은 경우는 48명에 그쳤고 고발조치가 취해진 인물은 3명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추징한 금액은 총 1324억원이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당장 국세청이 세무조사나 고발조치를 하기도 어렵다. 유출된 명단과 해당 인물들의 계좌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도 수사를 늦추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솜방망이 처벌
이번에는 과연

통상 페이퍼컴퍼니는 서류상 법인자격을 갖추었으니 자회사를 두고 영업활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탈세 목적의 자금세탁창구로 이용되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유령회사라는 이름이 뒤따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단순히 몇명만 고발조치했다는 수치만 갖고 판단하는 건 부적절하다“며 ”혐의내용이 법위반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만 고발조치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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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