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 전쟁 서막' 시험대 오른 재벌 3세들 막전막후

잘 차려진 밥상에 금수저 얹었다

[일요시사 경제팀] 박호민 기자 = 올해 재벌 3세들은 면세점 사업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칠 전망이다. 실제로 삼성, 한화, 신세계, 두산 등 4개 그룹의 재벌 3세(두산은 4세)들은 일제히 면세점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각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사업 군으로 분류되는 면세사업에 ‘내 새끼’를 투입해 이른바 자녀들 공적쌓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면세점 사업권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인식은 최근 몇 년동안 지속되온 기조다.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시장규모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의 면세점 시장은 2010년 4조5000억원, 2011년 5조3000억원, 2012년 6조3000억원, 2013년 6조8000억원, 2014년 8조3000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빠른 성장
비중 확대

지난해는 사상 첫 10조원대를 돌파할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5년간 두배 가까이 매출이 확대된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늘어난 중국인 관광객이 국내 면세사업 성장을 이끌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14년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 관광객은 1420만1516명을 기록했다.

전년 1217만5550보다 16.6% 증가한 규모다. 5년 전인 2010년(879만7658명)에 비해서는 61% 확대됐다. 중국인 관광객(요우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요우커는 612만6865명으로 전년 432만6869명보다 41.6% 늘었다. 요우커가 전체 외국인 관광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기준 43.1%에 달한다.

면세점에 대한 전망도 밝다. 중국인 관광객이 향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에 따라 해외여행을 희망하는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지만 여권을 소지한 국민은 전체의 6%에 불과해 향후 시장은 급격히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관세청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쇼핑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기업 2곳(HDC신라면세점·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과 중소기업 1곳(하나투어) 등 총 3곳에 신규 면세점 특허권을 허가했다. 또,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과 SK네트웍스의 워커힐면세점을 사업권을 두산면세점과 신세계디에프에게 넘겨 면세시장을 재편했다.

면세점 사업권을 새로 따낸 이들 기업들은 면세사업을 캐시카우로 키우기 위해 사업경영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은 면세사업에 오너 3세를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면세점 사업장의 오너일가 3세들의 경영능력을 시험하는 무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간 경쟁도 치열할 전망이다. 경영능력이 한 눈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지난 12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한화건설 과장이 공식석상에 얼굴을 비쳤다. 지난달 22일 열린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63스퀘어에서 열린 ‘갤러리아면세점63’ 기자간담회에서다. 김 과장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기자간담회서 김 과장은 한화의 새로운 먹거리 산업인 면세점 사업에 참여할 계획을 밝혔다. 김 과장이 본격적인 경영 수업에 들어간 셈이다. 1989년 생인 김 과장은 김 회장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다. 미국 태프트 스쿨을 졸업하고 다트머스대학교로 진학해 지리학을 전공했다.

“고속성장’ 전망 밝은 황금알 낳는 거위
오너 아들·딸 경영능력 시험무대 주목

그는 갤러리아 승마단 소속 승마선수이기도 하다. 올해 리우올림픽 승마 마장마술 부분에 출전한다. 이번 리우올림픽 출전시 국내 승마 마장마술 선수 중 유일하게 가장 수준 높은 국제승마대회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월드컵 파이널 등 3개 대회를 모두 출전한 선수가 된다.

김 과장은 지난 2014년 10월 한화건설에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경영수업을 받은 기간이 짧아 이번 면세점 사업은 그에게 경영 능력을 입증할 절호의 기회다. 김 과장은 언론의 관심을 경계했다.


그는 이번 면세사업 참여와 관련해 “당장 저의 역할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일단 배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후계구도 관련해서는 아직 저희 삼형제가 다 어리고 아버님도 젊으셔서 그런 걸 논할 단계가 아니고 배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화그룹이 이번 면세점 사업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에 향후 김 과장의 경영 성과에 따라 후계구도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관측이다. 갤러리아면세점 63을 시작으로 국내 공항·시내 면세점 추가 출점 및 해외 진출을 성사시켜 회사내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이날 간담회에 김 과장과 함께 참석한 황용득 한화갤러리아 대표이사는 “최소한 2017년 중반까지는 내부 역량을 강화해 앞으로 시내 또는 공항, 해외 면세점을 착실히 준비해 나가겠다”며 “면세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화그룹의 중추계열사로 일어설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도 성과”라고 말했다.
 

범삼성가 3세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부문 사장도 면세사업을 통해 경영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정 사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외손자로 범삼성가 3세다. 정 사장은 지난 12월초 백화점부문 총괄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백화점부문은 정 사장이 이마트 사업부문은 정용진 부회장이 맡는 모양새다. 정 사장에게 신세계그룹 사상 처음으로 진행하는 서울 면세점 사업의 성과가 중요하다.

면세사업 부문에 향후 5년간 530억원을 투자해 10조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세계는 본점 신관의 절반 규모인 7개 층을 면세점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면세점을 중심으로 백화점을 운영하겠다는 방침이다. 업계 2위 도약을 위해서 면세점 사업의 성공적인 안착은 상당히 중요하다. 정 사장은 이번 면세점 사업과 같은 큰 프로젝트를 이끌어 본 적이 없다.

패션부문을 중심으로 그룹내에서 입지를 다져온 정 사장이 성공적으로 면세사업을 안착시킬 수 있을지 우려 섞인 시각도 존재한다. 다양한 활동으로 그룹내 존재감을 높였지만 실패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 화장품 사업 실패가 대표적이다. 정 사장은 2012년 색조화장품 ‘비디비치’를 인수해 100억원 가량의 투자를 했지만 실적 부진으로 체면을 구긴 바 있다. 다만 정 사장이 패션 분야에 대해 잔뼈가 굵어 면세사업을 잘 이끌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이화여대 응용미술학과를 거쳐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를 졸업했다. 경영수업은 1996년 조선호텔 마케팅담당 상무보로 입사하면서 받기 시작했다. 2009년 신세계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부사장으로 재직했다. 3대 주주로 지분 2.52%를 갖고 있으며 조선호텔과 신세계인터내셔널 업무를 맡고 있다. 정 사장은 신세계로 자리를 옮겨 경영에 힘을 보탰다.

좋은 기회
다른 입장

또 다른 범 삼성가의 3세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도 최근 새롭게 면세점 사업을 벌였다. 신라면세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 사장은 올해 현대산업개발과 손잡고 신규 면세사업권을 따냈다. HDC신라면세점이란 이름으로 지난 12월 말, 용인에 문을 열었다.

이 사장의 경우 다른 3세들과는 다른 상황이다. 경영능력면에서는 검증이 끝난 상황. 이 사장은 올해 6년째 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오빠인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을 대신해 ‘리틀 이건희’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는 호텔신라의 성장세를 이끌며 사장 취임 이후 4배 가량 시총을 늘려 범삼성가 내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시장에서도 이 사장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이번 현대산업개발과의 협업 역시 그의 경영감각을 드러냈다는 평이다. 당초 이미 면세사업을 하고 있는 호텔신라가 신규면세사업권 심사에서 사업권을 획득할 것으로 확신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산업과 손을 잡고 협업을 강조하면서 면세점사업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 사장은 HDC신라면세점 사업 외에도 해외 면세사업부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호텔신라는 2014년 10월 중국 마카오 국제공항 면세 사업권을 따내 운영을 시작했다. 또한 지난 3월에는 기내 면세 사업자 세계 1위 기업인 미국 디패스(DFASS)의 지분을 매입했다. 이에 따라 면세사업부에서 차지하는 해외 면세점 매출 비중은 확대될 전망이다.

이 사장은 1970년 생으로 연세대 아동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삼성복지재단, 삼성전자를 거쳐 2001년 호텔신라 기획부 부장직을 맡으며 호텔신라와 인연을 맺었다. 2010년에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오른 후 현재까지 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쉬운 사업이란 평가
맡은 역할은 제각각

최근 경영난으로 대규모 인원 구조조정을 단행한 두산그룹에게는 체질 변화를 위해 면세점사업이 중요한 시점이다. 재계에서는 두산그룹이 중공업 중심의 B2B 기업에서 소비재의 사업으로의 사업영역 확대를 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두산그룹은 2000년대 들어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 전환했다. 그룹의 외형은 1996년 매출 4조원대에서 2008년 23조원대로 6배 가까이 성장했다. 그러나 최근 주력 계열사의 부진으로 중공업 중심의 기업경영에 한계를 보이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따라서 이번 면세점 사업은 두산그룹의 신성장동력이자 소비재 사업 영역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두산그룹에게 중요한 사업으로 평가된다.
 

두산그룹은 중책에 오너일가 4세 박서원 오리콤 크리에이티브총괄 부사장을 낙점했다. 그는 두산 면세점 최고전략책임자로 임명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박 부사장은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이자 박승직 창업주의 증손자다.


박 부사장은 오리콤 부사장과 ㈜두산 면세점 전략담당 전무를 겸하면서 내년 봄 동대문 두산타워에 개장할 면세점 사업에 참여한다. 박 부사장은 두타 쇼핑몰, 면세사업 등과 관련된 전략을 담당할 예정이다. 면세사업과 관련된 유통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는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지난 12월1일 박 부사장이 면세점 최고전략책임자로 임명됐다”며 “향후 동현수 사장을 보좌, 면세 사업과 관련된 전략을 담당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 부사장은 주로 광고부분에서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에 이번 경영 참여로 승계구도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형제경영으로 유명한 두산그룹은 3세 경영을 지나 4세 경영 체제로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이다. 현재 그룹 3세 맏형격인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두산 회장,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 등이 회사의 중역으로 안착했다.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 박진원 전 두산 산업차량BG 사장· 차남 박석원 두산엔진 상무,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장남 박태원 두산건설 부회장 등도 계열사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따라서 박 부사장은 면세사업을 통해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 사업을 발굴하는 목표 외에도 그룹 내 기반을 다지기 위해 성공적으로 면세사업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다.

무난한 사업
“공적 쌓기”

한편, 재벌 3세 경영인들이 면세사업에 몰리는 것을 두고 단순히 치적 쌓기 아니냐는 분석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다른 사업군에 비해 안정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갈 수 있는 면세사업부문에 오너일가를 투입해 경력을 화려하게 꾸미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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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