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안박' 거부한 안철수의 노림수

'새판' 짜든지 '친노' 빼고 헤쳐모이든지?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안철수 의원이 문재인 대표가 제안한 ‘문(문재인) 안(안철수) 박(박원순) 연대’를 거절하고 당 내외 모든 야권주자들이 참여하는 혁신전당대회를 역제안 했다. 이로써 야권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최대 분수령을 맞게 됐다. 정치권에선 문 대표와 안 의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최악의 경우 안 의원이 탈당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안 의원이 문안박 연대를 거절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새정치연합 안철수 의원이 문재인 대표가 제안한 ‘문(문재인) 안(안철수) 박(박원순) 연대’를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안 의원은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3인이 당권을 분점해 총선을 치르자는 문안박 연대만으로는 당의 화합과 당 밖의 통합이 이루어질 지 미지수고 지지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며 문 대표의 제안을 거절했다.

혁신전당대회
문안박 연대

안 의원은 대신 문 대표에게 “더 담대하고 더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문 대표를 포함한 모든 야권주자들이 참여하는 혁신전당대회를 개최하자”고 역제안 했다. 안 의원은 본인 또한 전당대회에 참여하겠다며 “꼴찌를 해도 좋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감당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 대표는 지난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안 의원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했다. 혁신전대를 반대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총선을 앞두고 전당대회를 열면 ‘공천 줄 세우기’ 전당대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내년 총선까지 5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일정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안 의원은 문 대표 측이 제안을 거부하자 “더 좋은 안이 무엇인지 내놓아야 한다”며 거듭 문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안 의원의 최근 행보에 대해 “안 의원이 탈당의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달라진 안철수, 연일 강공드라이브
'복당녀' 박근혜 전술 따라하기?

실제로 안 의원은 문 대표의 문안박 연대를 거절한 다음날 야권의 심장으로 불리는 광주를 방문해 의미심장한 행보를 이어갔다. 안 의원은 광주를 찾아 첫 일정으로 ‘정권교체를 위한 야당의 혁신, 어떻게 할 것인가’란 주제의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친노세력의 패권적 행태를 무너뜨려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신당 지지가 합리적일 수 있다”고 말했고, 패널로 참석한 호남지역 인사들이 ‘호남 홀대론’ ‘문재인 지도부 퇴진’ 등을 언급할 때마다 청중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이날 토론회를 지켜 본 한 당 관계자는 “주제는 야당의 혁신이었는데 마치 문 대표를 비롯한 친노세력에 대한 성토장 같았다”고 말했을 정도다.

안 의원은 또 광주에서 청년사업가들과 간담회를 가진 직후 기자들과 만나 문안박 연대에 대해 “본인 입으로 얘기할 때는 적어도 (문안박 중) 자기 이름을 제일 뒤에 넣어야 하지 않겠냐”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사실상 문 대표와 친노진영을 겨냥해 “개인이나 각 계파의 이해타산이나 대선출마 욕심이 앞서면 공멸한다”고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진흙탕싸움 시작?
문-안 정면충돌

지난 대선 이후 안 의원은 사실상 문 대표와 줄곧 대립하는 관계였지만 안 의원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문 대표를 겨냥한 행보를 이어나간 적은 처음이다. 대선출마와 신당창당 등을 포기하면서 이름을 빗대 ‘철수정치’를 한다는 비아냥을 들었던 안 의원은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강철수(강한 안철수)’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문 대표에게 밀리기만 했던 안 의원이 내년 총선과 향후 대선을 목표로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일각에선 안 의원이 문 대표를 압박해 결국 내년 총선에서 지분 챙기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고 평가절하 했지만 안 의원이 겨우 지분을 챙기려고 했다면 문안박 연대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내년 총선에서 지분을 조금 더 챙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친노세력이 주도하는 당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안 의원의 이 같은 행보는 내년 총선을 기점으로 친노세력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것이고 드디어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내 비주류 인사들은 안 의원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세 결집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안 의원이 광주를 찾았을 땐 광주지역 국회의원들이 대거 안 의원과 동행했다. 문 대표가 지난달 18일 광주 조선대 강연에 나섰을 때 광주지역 국회의원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안 의원은 광주를 방문해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호남 물갈이론으로 궁지에 몰린 호남 의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안 의원은 “왜 호남만 물갈이 되어야 하느냐”며 “특정지역을 떠나 전체적으로 투명하고 공정한 공천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주류 인사들은 안 의원의 혁신전대 주장에도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호남 중진인 주승용 최고위원은 “안 의원이 제안한 혁신전대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치켜세웠고, 비주류모임인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민집모)’은 안 의원의 혁신전대와 관련해 “문 대표가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기 위한 결단을 신속히 내려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안 의원의 비서실장을 지낸 문병호 의원은 심지어 “당 내에서 혁신과 통합의 실천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새로운 흐름을 선택할 수도 있다”며 안 의원의 탈당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문 대표를 압박하고 나섰다.

당내 비주류 의원들은 윤후덕, 신기남, 노영민 의원 등 공교롭게도 모두 문 대표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중진 의원들이 최근 각종 구설에 휘말리자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당이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거센 공격도 퍼붓고 있다. 

이 같은 당내 움직임에 발맞춰 외부에서 신당창당을 추진하고 있는 인사들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새정치연합을 탈당 한 후 각자 신당창당을 추진해온 천정배 의원과 박주선 의원, 박준영 전 전남지사, 김민석 전 의원 등은 최근 연대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빙부상을 당한 박주선 의원의 상가에 모여 신당통합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고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상가에는 국민모임에 참여해 신당창당을 추진했던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도 방문해 신당 추진 인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신당 추진 인사들은 지난달 25일 광주에서 열린 토크쇼에서 다시 한 번 모여 문 대표를 성토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친노가 나가든지
우리가 나가든지

이날 토크쇼에는 신당 추진 인사들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비노인사인 조경태 의원과 유성엽 의원도 패널로 참석했다. 지난달 2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박주선 의원 주도로 열린 ‘통합신당 추진위원회’ 출범식에는 신당창당에 우호적인 발언을 해왔던 새정치연합 정대철 상임고문이 축사를 맡아 눈길을 끌었다. 친노를 제외한 모든 야권세력이 외부에서 뭉치고 있는 모양새다. 정치권에서는 이들이 외곽에서 신당창당 작업을 완료하면 결국 안 의원도 합류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안 의원 본인도 혁신전대 제안을 문 대표가 받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혁신전대를 제안하고 나선 것은 결국 문 대표와 갈라 설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냐”며 “신당 추진 인사들이 창당 작업을 마치고 나면 거기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려는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곽에서 뭉치는 신당세력
비노진영도 내부서 세력화

신당 추진 세력의 구상은 내년 총선에서 원내 제3당 정도의 의석을 확보해 다당제 의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당을 추진하고 있는 박주선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여당과 야당이 투쟁만 하는 국회보다는 다당제 하에서 양당의 충돌을 완화하고 또 조정하는 정치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신당이 비록 원내 제3정당에 머무른다고 해도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면 향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신당이 호남에서만 돌풍을 일으켜도 교섭단체 요건(20석)은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안 의원이 새정치연합을 탈당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난 2008년 박근혜 대통령이 구사했던 전술을 벤치마킹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당시 총선에서 박 대통령은 측근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끝까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남았다. 박 대통령의 측근들은 친박연대라는 신당을 통해 총선에 출마했고 친박연대는 돌풍을 일으켰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남아 그들의 복당을 꾸준히 요구했고 복당한 친박연대 인사들은 박 대통령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그때 측근들을 따라 당을 뛰쳐나갔다면 고작 제3당의 당수로 정치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근혜 될까?
문국현 될까?

이와 마찬가지로 안 의원 역시 당에 끝까지 남아 내년 총선을 치른 후 문 대표가 물러나고 나면 신당인사들과 통합함으로써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것 아니냐는 시나리오다. 문 대표가 물러나고 나면 가장 유력한 차기 당권주자는 누가 뭐래도 안 의원이다. 내년 총선에서 새정치연합이 패하고 나면 자연히 당권은 안 의원에게 넘어오게 되는데 안 의원이 탈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총선 패배 이후 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통합전대가 치러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에 한 관계자는 “(야권이 분열된 상태에서 치러지는)20대 총선에선 새누리당에 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21대 총선에선 제1당으로 복귀하는 것이 최종 목표 아니겠느냐”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야권세력이 연대해야 하는 데 통합전대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 의원이 지금 이 시점에서 통합 전대를 제시한 것은 내년 총선을 위한 포석이 아니라 총선 이후를 겨냥한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과연 안 의원의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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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