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째" 악질 체납자 백태

얼굴에 철판 깔고 ‘맘대로 해’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아궁이에서 무려 6억원의 돈뭉치가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호화주택에서는 고급 와인만 1200여 개가 방에 가득 쌓여 있다. 누구 것이었을까. 세금 내지 않고 버텨오던 체납자들이 숨긴 돈이다. 상습·고액 체납자들의 재산은닉 백태를 공개한다. 

국세청은 고액·상습 체납자 2226명(개인 1526명과 법인 700곳)의 명단을 인터넷 홈페이지(www.nts.go.kr)에 새로 공개했다고 지난달 25일 밝혔다. 국세청은 5억원 이상의 국세를 체납 이후 1년 넘게 내지 않고 버티고 있는 개인이나 법인의 명단을 매년 공개하고 있다.

국세정보공개심의위원회는 지난 4월 명단공개 예정자에 대해 사전 안내 후 6개월 이상 소명기회를 부여했다. 명단공개 예정자 중 납부 등을 통해 체납된 국세가 5억원 미만이거나 체납액의 30% 이상을 납부한 경우, 불복청구 중인 경우 등 요건에 해당하는 자는 공개대상에서 제외했다. 고액·상습체납자 2226명의 명단공개 대상을 확정했다.

3조7000억 미납
개인최고 276억

고액·상습체납자 명단공개제도는 2004년부터 시행되고 있으며, 직접징수 효과뿐만 아니라 체납자의 정보 공개를 통해 체납발생을 억제하는 등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에 추가된 체납자들이 내지 않은 세금은 총 3조7832억원이다. 1명 또는 법인 1곳 당 평균 17억원의 세금을 체납한 셈이다. 개인 최고액은 276억원, 법인 최고액은 490억원으로 드러났다. 


고액·상습체납자의 연령은 주로 40∼50대이며, 지역은 수도권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명단공개자 1526명 가운데 40∼50대가 62.6%, 체납액의 64.0%를 차지했다. 명단공개자(개인)의 주소지 분포는 수도권(서울·인천·경기)이 공개인원의 62.6%, 체납액의 61.5%에 달했다.

또 명단공개자(개인)의 체납국세 규모는 5억∼30억원 구간이 공개인원의 91.5%를, 체납액의 66.5%로 집계됐다. 법인 명단공개자 700개 업체의 경우 소재지별 분포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수도권 지역이 전체의 65.6%, 체납액의 67.2%로 비중이 높았다. 

명단공개자(법인)의 체납 국세 규모는 5억∼30억원 구간이 공개인원의 88.5%, 체납액의 55.6%를 차지했다. 업종별 분포는 도소매·건설 업종이 공개인원의 53.6%, 체납액의 56.2%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 새로 공개된 고액·상습 체납자 1위는 전투기 정비업체 ㈜블루니어의 박기성 전 대표(54)로 276억원의 세금을 안 냈다. 공군 부사관 출신인 박씨는 구입하지도 않은 부품으로 공군 전투기를 정비한 것처럼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243억원의 정부 예산을 가로챈 혐의로 지난해 12월 구속된 바 있다. 

고액·상습 체납자 2226명 명단 공개
‘죽어도 세금 못내’ 체납액 3조 육박

박씨는 지난 7월 1심에서 징역 6년에 벌금 30억원을 선고받았으며 조세포탈 혐의로 다시 기소돼 이달 초 징역 2년 6개월에 벌금 47억원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박씨의 개인체납 세금과 별도로 블루니어는 법인명의 세금 179억원도 내지 않아 법인 고액·상습 체납자 순위 7위에 올랐다. 

이어 오메가게임랜드의 신성엽 씨(225억원), 대동인삼영농조합의 김용태 전 대표(219억원)가 개인 체납순위 2, 3위에 이름을 올렸다. 2008년 1월 회삿돈 157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종민 퓨쳐비전㈜ 전 대표(49)는 149억원의 세금을 내지 않아 10위에 올랐다. 


법인 중에서는 CNH케미칼(대표 박수목)이 490억원을 체납해 1위에 올랐고, SSCP(대표 오정현)가 체납액 403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연 매출액이 1730억원이던 SSCP는 2012년 9월 12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최종부도 처리된 뒤 코스닥에서 상장 폐지된 회사다. 

일각에서 부도 이후 오 대표가 조세피난처 국가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830억원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통해 오 대표에게 수백억원의 세금을 추징하고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사실이 지난해 국정감사를 통해 알려졌다.

국세청은 올해 9월 ‘현장수색 집중기간’으로 정해 재산을 빼돌려 호화생활을 하는 고액 체납자들을 추적했다. 상습 체납자들이 재산을 은닉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었다. 국세청이 현장 수색을 하자 은닉한 재산을 아궁이에 숨겨 놓기도 했다. 양도소득세 9억여원을 내지 않은 서모씨의 재산을 찾기 위해서 국세청이 현장 수색에 나섰다.

서씨는 부동산 경매로 배당받은 수억원의 자금을 세탁해 집안 어딘가에 현금으로 숨겨놓은 상태였다. 최근 부동산 매매로 거액의 양도차익을 챙긴 서씨가 국세청 감시망에 포착됐다. 양도소득세를 내야 했지만, 서씨는 돈이 없다며 세금을 체납한 뒤 행방마저 감췄다. 국세청은 탐문 끝에 그가 부인 명의로 마련한 경기도의 호화 전원주택에 은거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다.

가마솥 아궁이에
숨긴 현금 6억원

지난달 초 국세청 조사반원이 그가 숨어 지내던 전원주택으로 들이닥쳤다. 서씨는 국세청 직원들에게 “세금을 낼 돈이 없다”고 버텼다. 완강하게 서씨는 문을 걸어 잠그며 수색을 거부했다. 그러자 국세청 직원은 경찰의 협조를 받아 개문 후 주택 내·외부를 수색했다.

당황한 서씨는 빼돌려놨던 현금을 가마솥 아궁이에 급하게 숨겼다. 국세청 조사반원은 경찰과 함께 집 안 곳곳을 수색했지만 현금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한 직원이 우연히 가마솥 아궁이 속에 놓인 검은색 가방을 발견했다. 잿더미 속에서 끄집어낸 검은 가죽가방 속에서 5만원권 등 한화 5억원, 100달러짜리 등 외화 1억원어치의 지폐뭉치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전체 액수가 자그마치 6억원에 달했다.

중개업체 대표 이모씨는 소득세 등 수백억원을 체납한 채 서울 성북동의 대저택에서 호화생활을 즐겼다. 국세청은 이씨가 미국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를 이용, 회사에서 빼돌린 돈으로 주택을 구입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 외국법인 페이퍼 컴퍼니는 재산은닉을 목적으로 설립한 체납자 가족 명의의 유령회사였다.

유령 외국법인
호화주택 취득

국세청은 이런 사실을 확인한 뒤 주택처분금지가처분 및 소송을 제기해 놓고 즉시 현장을 찾았다.시가 80억원에 달하는 이 저택에서는 와인 저장고에 놓인 고급 와인 1200여병, 명품 가방 30개, 그림 2점, 골프채 2세트, 거북선 모양으로 된 금장식 등이 발견돼 압류·봉인조치됐다.

고미술품 감정·판매업자인 김모씨는 양도소득세를 줄여서 신고하는 수법을 써 93억원이 넘는 세금을 체납했다. 김씨는 고액체납이 발생하자 폐업 후 미술품들을 비밀장소에 은닉한 후, 차명으로 사업을 영위하며 타인명의로 임차한 고급 오피스텔에서 호화생활을 즐겼다.
 

미행과 탐문을 통해 김씨의 거주지, 미등록 사업장(미술품 은닉장소)의 위치 등을 확인한 후, 현장수색을 했다. 국세청은 김씨가 숨겨뒀던 고미술품 500여점을 압류했으며, 이중 값비싼 것들을 중심으로 1차 공매를 준비하고 있다.

수도권 경부고속도로 인근 한 골프장은 그린피를 현금 위주로 받아 매출을 속이는 방법으로 체납 처분을 회피해오다 국세청에 덜미를 잡혔다.

주주간의 이권 다툼으로 인해 경영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골프장은 고액체납이 발생하자 카드매출 압류를 피하기 위해 현금 결제를 유도해 왔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국세청은 이렇게 받은 현금을 은행에 입금하지 않고 클럽하우스 내 사무실 금고에 보관, 운영비로 지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기상천외 재산은닉 수법
국세청 잠입해 끝장추적

국세청은 골프장 이용객이 몰리는 토·일요일 후에 현금이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월요일 업무시작 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급습, 현장수색을 실시했다. 사무실에는 4개의 금고가 발견됐으며 캐디 사물함, 책상서랍 등에도 분산 보관 중이던 현금 2억원이 발견돼 체납 세금을 현금으로 거둬들였다.

국세청은 서울 강남의 여관건물을 매각한 뒤 양도소득세를 신고해 놓고 20억원을 체납한 조모씨가 지인 명의를 빌려 주택을 매수한 사실을 확인했다. 여관 양도대금 사용처를 조사한 결과 아들의 채무를 상환했다. 남은 대금으로 체납자가 거주하는 주택을 매수한 매수인에게 지급된 것을 확인됐다.

체납자와 주택매수인의 자금흐름 조사를 통하여 체납자가 지인(매수인)의 명의를 빌려 주택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매수자금을 지급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인에게 지급한 주택취득자금에 대해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체납액 수억원을 징수했다.
 

허위근저당을 설정해 재산을 은닉한 체납자도 있다. 윤모씨는 제2차 납세의무자로 자신이 과점주주로 있던 법인에 대한 세무조사가 있을 것을 사전에 눈치 채고, 본인 소유의 부동산(3건)을 친인척 3인(형, 누나, 형수)의 명의로 각각 허위근저당을 설정했다. 친인척 3인에게 소유권을 이전하는 방법으로 체납처분을 회피했던 것.

타인 명의 빌려
숨긴 고가 물품

국세청은 윤씨에 대한 금융추적조사를 실시해 허위근저당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친인척 등 관련인들에 대한 범칙조사에 착수했다. 결국 윤씨는 허위근저당임을 시인하고 회피하려 했던 체납액 수십억원 전액을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심달훈 국세청 징세법무국장은 “앞으로도 고액·상습체납자의 은닉재산을 끝까지 추적하고, 악의적인 체납자는 형사고발하는 등 엄정하게 대처할 것”이라며 “성실 납세자가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체납자 공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또다시 고액·상습지방세 체납자 공개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19일 서울시의회 서윤기(새정치민주연합·관악2) 의원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지방세 양도소득세분 4억1000만원(가산금 포함)을 아직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2월 검찰 추징금 환수팀이 3남 재남씨 명의의 한남동 빌딩이 전 전 대통령의 명의신탁 재산으로 보고 공매처분한 데 따라 발생한 3억8200만원의 지방소득세(양도소득세분)에 가산금을 더한 금액이다.

앞서 전 전 대통령은 2003년 자택인근의 경호동 건물 공매 처분 이후 발생된 지방세 양도소득세분 4400만원을 체납했다가 2013년 1만4500명의 지방세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에 포함된 바 있다.

지난해의 경우 검찰 추징금 환수팀이 고가 미술품을 압류해 공매처분하면서 체납자 명단에 이름이 빠졌다.

서 의원은 “자녀들의 재산은 어마어마한데 본인 재산이 29만원이라 징수를 못하는 실정이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 강력한 징수활동을 전개해 달라”고 말했다. <창>


<기사 속 기사> 조세포탈범 27명 명단 공개
풀살롱 업주가 136억 탈세

국세청은 26일 조세포탈범 27명과 해외금융계좌 신고의무 위반자 1명의 인적사항 등을 국세청 홈페이지(www.nts.go.kr)를 통해 공개했다. 이번에 신원이 공개된 조세포탈범은 거짓 세금계산서를 수취하거나 장부를 파기하는 등 부정한 행위로 연간 5억원 이상 조세를 포탈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강인태(51)씨와 전종철(41)씨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흥주점 ‘아프리카’를 운영하며 매출장부를 파기하는 등 수법으로 총 136억원에 이르는 세금을 포탈했다. 이들은 유흥주점 건물을 통째로 빌려 모텔까지 운영하는 ‘풀살롱’성매매 영업까지 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122억여원에 달하는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하지 않은 박종호(43·기업 대표)씨의 이름도 이번에 함께 공개됐다. 국세청은 또 50억원이 넘는 해외금융계좌 금액을 신고하지 않다가 적발될 경우 과태료 부과 및 탈루세금 추징뿐만 아니라 형사고발하기로 했다.

다만 국세청은 내년 3월 말까지 최대한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미신고 역외소득 등을 재산 자진신고 기간 안에 신고해올 경우 명단공개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법령에 따라 조세포탈범 및 해외계좌 신고의무 위반자의 명단을 공개해 세법의 실효성을 높이고 국민의 건전한 납세의식을 확립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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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