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황당한 이혼 사유 백태

힘들면 갈라서…참고 살지 않는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이혼은 현실이라 했던가. 꿈같던 부부가 갈라서는 과정을 보면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혼하는 이유는 성격차이, 성생활, 외도, 빚 등 다양하다. 하지만 몇몇 사례를 보면 황당한 이유로 이혼해 세간의 눈길을 끌었던 사건들이 있다. 혹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이혼을 당한 사례도 있다. 황당한 이혼 백태를 정리해봤다.  

 
서울시는 지난 20년 동안(1993∼2013년) 서울의 혼인·이혼 변화 양상을 조사해 발표했다. 통계에 따르면, 1996년 정점에서 1997년부터 급격한 감소추세를 보이던 혼인과는 대조적으로 이혼은 1997년을 계기로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 정점에 도달한 이후 점차 낮아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연간 2만건 이상의 이혼이 발생하고 있다. 

별일 아닌데…
님에서 남으로 
 
이혼 사유 중 가장 주된 원인은 부부간 성격차이로 꼽혔다. 성격 차이는 2003년 이혼사유의 41.5%에서 매년 꾸준히 증가하며, 2008년에 49.3%를 차지했다. 이후 2011년에는 44.0%로 감소하였으나 다시 증가하여 2013년에는 47.9%까지 상승했다.
 
▲열받은 기러기아빠 =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딸과 아내를 8년간 뒷바라지해 온 ‘기러기 아빠’가 낸 이혼 청구를 법원이 받아들였다. 부정행위 등 혼인 파탄의 직접적인 요인은 없었지만 남편이 아내의 귀국 거부 등으로 오랫동안 고독했다는 점에서 부부간 정서적 유대감이 상실됐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지난 6일 부산가정법원에 따르면 A(54)씨의 부인 B(59)씨는 2006년 딸(당시 13세)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갔고, 국내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A씨는 이들에게 생활비와 교육비를 보냈다. A씨는 2009년 12월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힘들다. 친구들에게 돈 빌리는 문제로 우울하고 외롭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아내에게 국내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후에도 이혼을 요구하거나 국내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면서 경제적 사정과 건강이 좋지 않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A씨 아내는 2012년 3월 800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한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A씨는 5000만원을 송금했다. A씨 아내는 여러 조건을 내세우며 귀국 의사를 내비친 적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2006년 2월 미국으로 간 이후부터 지난해 6월까지 8년 넘게 한번도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산가정법원 가사2단독 김옥곤 판사는 “장기간 별거와 의사소통 부족 등으로 부부간 정서적 유대감이 상실돼 혼인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며 “남편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고 장기간 귀국하지 않은 아내에게도 혼인 파탄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4년간 용돈 10만원 = 한 달 용돈 10만원 준 아내에게 이혼소송을 낸 남편이 법원에서 “이혼은 정당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지난 7월27일 서울고등법원에 따르면 가장인 A씨는 매달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모두 B씨에게 갖다 줬고, 한 달에 10만∼20만원씩 용돈만 받으며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가정주부로 있으면서 돈 관리를 도맡아 했다. A씨는 용돈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워 아르바이트로 건설 현장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결혼한 지 4년 가까이 되던 해 겨울 어느 날 폭설로 근무지에 비상이 걸려 A씨가 퇴근하지 못하고 다음날 집에 갔는데, B씨는 몸이 아픈 자신을 혼자 뒀다고 불만을 나타내며 지병을 치료하겠다고 친정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1997년부터 급격히 늘어…매년 2만건

성격차이·외도·빚문제 때문에는 ‘옛말’
 
A씨는 며칠 뒤 갑작스러운 구토 증상으로 병원에 가려고 아내에게 병원비 10만원을 송금해달라고 부탁했지만, B씨는 송금하지 않고 A씨를 찾아왔다. 화가 난 A씨는 B씨를 만나지 않고 휴대전화로 이혼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A씨는 살던 집의 전세보증금 4000만원을 받아 이사비 등으로 쓰고 나머지 3800만원을 B씨에게 송금하면서 자신의 명의로 부담하는 2800만원의 전세자금 대출 채무를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B씨는 이를 갚지 않고 그냥 보관했다. A씨는 결국 법원에 이혼소송을 내면서 위자료 5000만원을 청구했다.
 
낙태 강요에      
용돈 갈등도
 
재판부는 “피고는 경제권을 전적으로 행사하면서 원고와 원고 가족에 대해 인색하게 굴고 원고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원고 역시 속으로 불만을 쌓아가다가 갑자기 이혼을 요구했다. 원고와 피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재산분할은 각자 명의대로 소유권을 확정하되 B씨가 보관하는 A씨의 전세자금 대출 채무 2800만원만 돌려주라고 명했다.
 
 
▲며느리에 낙태 요구 = 시아버지가 여아를 임신한 며느리에게 낙태를 요구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이유로 며느리가 이혼과 위자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달 2일 서울고등법원에 따르면 ㄱ씨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상대로 낸 이혼과 위자료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밝혔다. 
 
ㄱ씨는 17년 전 현재의 남편과 결혼한 이래 시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ㄱ씨는 결혼 이듬해 첫 딸을 출산하고 2년 뒤 둘째 딸을 낳았다. 이후 다시 4년 뒤에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성별 검사 결과 여아로 밝혀졌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ㄱ씨에게 임신중절수술을 요구했고, ㄱ씨는 결국 이를 받아들여 낙태했다. 시아버지는 ㄱ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무라고, 자녀 양육 문제와 생활비 지출 문제 등을 놓고 의견이 다를 때 자신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잦았다. ㄱ씨는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대체로 순응하며 살았다.
 
그러나 시아버지와의 갈등, 남편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이 점점 깊어졌다. 결국 ㄱ씨는 결혼 생활 15년 만에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별거하기 시작했다.
 

ㄱ씨는 이혼 소송을 내면서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위자료 5천만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ㄱ씨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민법 840조에 규정된 이혼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1심은 “남편이 부인의 가출 이후 관계 회복을 바라면서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 왔고, 시아버지도 자신의 존재로 인한 아들 부부의 고통을 뒤늦게 알고서 분가를 허락하는 등 노력하는 점, 원고가 가출 전까지 이혼을 요구한 적이 없는 점 등을 종합하면 혼인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구걸한 12억 들고 튄 남편 = 30년 동안 구걸로 16억원 상당의 재산을 모은 시각장애인 부부가 돈을 들고 잠적한 남편 때문에 갈라서게 됐다. 법원은 재산의 절반을 부인에게 나눠주라고 명령했다.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장모(68)씨와 최모(59·여)씨부부의 생계 수단은 구걸이었다. 1976년 결혼해 4남 3녀를 둔 이들이 30년 넘게 구걸로 모은 재산은 확인된 금액만 15억9200만원. 부부는 남편 장씨가 가정의 경제권을 독점하고 자녀들까지 동원해 구걸을 시켜 다툼이 잦았다. 
 
 
아내는 ‘자녀들만큼은 구걸시키지 말자’며 반대했지만 돌아오는 건 남편의 욕설과 손찌검뿐이었다. 자녀들에게도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던 장씨는 자녀들이 장성해 더이상 완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2010년경 시중 은행 4곳에서 현금 12억여 원을 출금해 자취를 감췄다. 실제 장씨 명의의 순재산은 서울 강남 소재 아파트와 은행에서 빌린 부동산 대출금까지 합하면 20억원에 육박했다. 
 
깐깐한 남편

무심한 아내 
 
반면 아내 최씨 이름으로 된 재산은 0원. 최씨는 거주지는 물론 생사도 알 수 없게 된 남편으로부터 사는 아파트라도 지켜보겠다는 심정에 이혼을 결심하고 지난해 법원 문을 두드렸다. 
 
서울가정법원은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부장판사 권태형)는 최씨가 제기한 이혼청구 소송에서 “원고와 피고는 이혼하고 남편은 위자료 3000만원을 지급하라”며 ‘공시송달’에 의한 이혼 판결을 내렸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재판부는 “재산 취득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부부가 노력해 형성 또는 유지한 공동 재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재산분할 비율을 50 대 50으로 해 7억9600만원씩 나누라”고 판단했다.
 
▲메모로 잔소리한 남편 = 아내에게 수시로 메모를 남겨 잔소리를 한 남편의 행동은 이혼 사유가 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1999년 김모(46)씨와 결혼해 전업주부로 살아온 박모(37·여)씨는 남편이 학원강사로 일하기 시작한 2003년부터 밤늦게 귀가해 ‘김치 쉬겠다. 오전에 뭐한 건가’ ‘주름 한 줄로 다려줄 것’ 등 살림살이에 일일이 간섭하는 메모와 문자메시지를 남기자 참다못해 결혼 7년만에 이혼 소송을 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는 박모씨가 남편 김씨를 상대로 낸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소송에서 “두 사람은 이혼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위자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지난 2011년 10월29일 밝혔다.
 
재판부는 “김씨가 수시로 메모와 문자메시지로 지적을 해 아내를 불안과 긴장 속에 살게 했다”면서 이혼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황당무계 이유 눈길
 
▲두집 살림한 외국인 = 본국에 처자식을 둔 사실을 숨긴 채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본국을 드나들며 '두 집 살림'을 한 외국인 남성에 대해 체류 불허 처분을 내린 것은 적법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C씨는 2002년 7월 산업연수생(D-3)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와 머물다 2005년 말 한국여성 D씨와 혼인신고를 하고 국민의 배우자(F-2)로 체류자격 변경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C씨는 결혼 8년 만에 D씨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고 이듬해 법원의 조정을 거쳐 위자료 등을 포기하기로 하고 이혼했다. 이후 C씨는 난민인정 신청을 한 뒤 출입국관리소에 체류기간 연장 허가를 신청했으나 출입국관리소는 올해 초 ‘혼인의 진정성 결여 및 배우자의 귀책사유 불명확 등 사유’로 연장을 불허하고 보름 안으로 출국하라고 명령하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C씨는 “한국에서 8년 동안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해 오다 아내의 음주, 폭행 등으로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른 것인데도 출입국관리소가 인정하지 않은 처분은 위법하다”고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냈다.

두집 살림에
돈 들고 퇸 남편도
  
그러나 재판부는 “원고는 본국에 처와 아들 2명이 있음에도 D씨와 혼인신고 당시 미혼이라는 취지의 허위 공증서류를 제출해 혼인신고를 했다”며 “D씨와의 혼인 중에도 파키스탄의 부인 사이에 아들 2명이 새로 태어난 사실 등이 인정된다. D씨와의 혼인관계가 유지될 수 없었던 데에는 원고의 책임이 있다”며 A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외국에선…기상천외 이혼 사유 
외계언어 사용해 파경
  
영국의 부부들이 이혼할 때 근거로 삼는 기상천외한 이유가 화제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 이혼법은 당사자 간 합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간통·배우자 유기 등 5가지 이유가 있어야 이혼이 가능하다. 상당수 파경커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내세워 이혼 절차를 밟기에 황당한 사연들도 때론 등장한다.
 
한 부인은 남편이 영화 <스타트렉>에 등장하는 외계인 ‘클링온 족’의 언어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복장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며 이혼 소송을 냈다. 한 남편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참치 요리를 부인이 악의적으로 반복해 내놓았다며 이혼 신청을 했다.
 
또다른 남성은 부인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렸으며, 정작 본인은 그것을 그만 둘 수 없다고 까놓고 이야기했다며 이혼 절차에 들어갔다. 이밖에 ‘부인이 TV 안테나를 악의적으로 망가뜨렸다’ ‘평소 즐겨 먹는 요리를 일부러 버렸다’며 이혼을 청구한 남편도 있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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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