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대담> '의원직 상실위기' 박지원 작심토로

"황당한 재판내용 알면 국민들도 내 편들 것"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새로운 증거나 증언이 나온 것도 아닌데 1심과 2심 재판부의 판결이 180도 달라진 '이상한 재판'이 있다. 바로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에 대한 재판이다. 유일한 증거는 돈을 줬다는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뿐이지만 재판부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 박 의원은 곧바로 의원직을 잃고 내년 총선에도 출마하지 못한다.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판사 강영수)는 지난 9일 보해저축은행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 박지원 의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증거나 증언이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1심과 2심 재판부의 판단은 180도 달랐다. 법조계에서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마침 야권을 향한 사정정국이 조성된 미묘한 시기였다.

이번 재판에서 인정된 유일한 증거는 박 의원에게 돈을 줬다는 오문철 전 보해저축은행 대표의 주장뿐이다. 재판과정에서 오 전 대표가 의도적인 위증을 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재판부는 그의 주장만을 철석같이 믿었다. 2심 재판과정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기본적인 대원칙조차 전혀 지켜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재판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요시사>가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박 의원을 만나봤다. 다음은 박 의원과의 일문일답.

- 지난 9일 항소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일부 유죄를 선고했다. 심정이 어떤가?
▲ 새로운 증거나 증언이 나온 것도 아닌데 1심 재판부의 판결과 2심 재판부의 판결이 완전히 달라졌다. 법조계에서는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2심 재판부는 물증도 없이 오직 오문철 전 보해저축은행 대표의 말만 믿고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굉장히 황당한 심정이다. 재판부는 제가 오 전 대표에게 3000만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보해저축은행은 이미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회사에서 돈을 받을 바보 같은 정치인은 없다.

- 법원은 일부 유죄를 선고한 이유에 대해 오문철 전 보해저축은행 대표의 일관된 진술을 꼽고 있다. 오 전 대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왜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 오 전 대표와 관련된 또 다른 사건으로 구속됐던 썬앤문(현 라미드그룹) 김성래 부회장은 옥중에서 ‘매일 검찰이 불러서 박지원에게 돈을 주었다는 진술을 하라고 해 자살을 해서라도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국회 법사위원회에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 전 대표는 지금도 수감되어 있는 사람이다. 거의 매일 검찰청에 불려가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으면서 검찰의 압박과 회유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김 부회장의 폭로에 따르면 진술이 조작되고 연습되었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반면 당시 오 전 대표와의 만남에 동석했다는 한모 전 목포경찰서장은 박 의원님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진술이 오락가락해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 오 전 대표가 저에게 돈을 줬다는 날짜가 2010년 6월이다. 기자님도 오늘 인터뷰를 하지만 5년 후에 제가 어디에 앉았고 배석자들이 어디에 앉았었는지 전부 기억할 수 있겠나? 당연히 기억을 더듬어 진술하다보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한 전 서장이 그날 만남에 분명히 배석했었고, 오 전 대표가 (현금 3000만원이 담겼 을만한 가방 등이 없이) 빈손으로 왔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사소한 사실관계를 기억해내는 과정에서 진술이 오락가락했다는 이유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하니 억울할 수밖에 없다.


물증도 없이? 무죄추정 원칙 내버린 재판부
"수사 중인 회사 돈 받을 바보 아니다"

- 오 전 대표는 당시 세부적인 상황까지 기억해냈나?
▲ 아니다. 오 전 대표 역시 저에게 돈을 줬다는 진술만 일관되게 하고 있지 세부적인 내용은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오 전 대표의 진술만은 그대로 인정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중잣대다.

- 의원님과 오 전 대표가 만났을 당시 동석한 한 전 서장은 의원님과 가까운 사이라고 하던데, 재판부로서는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제가 한 전 서장과 잘 아는 사이인 것은 맞다. 하지만 당시 한 전 서장뿐만 아니라 오 전 대표의 측근인 김모씨와, 오 전 대표의 운전기사조차도 가방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오 전 대표는 현금으로 3000만원을 저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현금 3000만원이 양복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나?

오 전 대표는 그날 저를 만나러 가면서 차에서 가방을 가져갔다고 진술했지만 오 전 대표의 측근인 운전기사조차 가방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2심에서는 오 전 대표의 진술만 신빙성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 운전기사나 김모씨의 진술은 왜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나?
▲ 모르겠다. 재판부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들은 오락가락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일관되게 진술을 했는데 2심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 당시 만남에 한 전 서장이 동석했다는 내용의 수첩기록에 대해 재판부는 수사가 진행되고 난 후 쓰여 졌다고 판단했다. 한 전 서장이 동석했다는 것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인데.
▲ 추가일정을 밑에 적는 것은 평소 메모습관이다. 공간이 없어 추가일정을 하단 빈칸에 기록한 것이다. 그동안 제가 써온 메모패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억울해서 국과수 판정을 받아보자고 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우리 측의 요구를 묵살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말만 믿고 메모가 뒤늦게 작성된 것이라고 했다.

- 당시 오 전 대표를 만나줬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오 전 대표의 회사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상황으로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었다.
▲ 그날 면담은 한 전 서장이 오 전 대표를 데려와서 만났던 것이다. 당시 보해저축은행이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면담 전까지는 몰랐고 면담 과정에서 알게 됐다. 저는 지역에서 저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만난다. 국회의원으로서 제 지역구에 있는 저축은행 대표를 만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 오 전 대표뿐만 아니라 임석 전 솔로몬저축은행 회장, 임건우 전 보해양조 회장 등도 의원님에게 돈을 전달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만약 검찰의 짜맞추기식 기획수사가 맞다면 야권에 대권주자들도 즐비한데 왜 하필 박 의원님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하나?
▲ 2012년 검찰의 기소 당시 여권 인사들이 비리사건으로 줄줄이 수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 검찰에서는 여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임석 전 회장은 저와 고향이 같고, 학교 후배다. 보해저축은행도 제 지역구에 있는 회사다. 제가 타깃이 되기 딱 좋았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제가 원내대표로서 저격수 역할도 하고 여권에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저를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닌가 의심된다. 지금까지 검찰이 저를 탈탈 털었지만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다. 이번에 유일하게 유죄를 받은 것도 오 전 대표의 증언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이미 위증 저질러 증언 신빙성 없어"
"2심은 분명한 오심, 끝까지 싸우겠다"

- 재판부는 오 전 대표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면서도 오 전 대표가 지난 2011년 3월 의원님에게 또 다시 3000만원을 줬다고 진술한 부분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 오 전 대표는 지난 2011년 3월에 제게 3000만원을 주면서 청탁을 하니 제가 그 자리에서 김석동 금융위원장에게 전화를 해 민원을 해결했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 위원장은 같은 시간 국회 정무위에 출석해 있었다. 재판정에서 아예 김 위원장의 국회 출석 영상을 틀어줬다. 확실한 물증이 있다 보니 재판부도 그 부분은 어쩌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오 전 대표는 매우 악의적으로 위증을 한 사람이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뇌물을 건넨 사람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그 진술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사람의 말만 믿고 저를 유죄라고 한 것이다.

- 이외에도 오 전 대표의 진술 중 오류는 없었나?
▲ 오 전 대표는 제가 3000만원을 받고 수원지검 검사에게 전화를 해 보해저축은행 관련 청탁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검찰에 제가 도대체 수원지검 누구에게 청탁을 했다는 건지 밝혀 달라, 같은 검찰식구니까 알 거 아니냐고 호소했다.

그런데 검찰은 제가 누구한테 청탁을 했는지 결국 밝혀내지 못했다. 이외에도 사소한 오류들이 많았다. 재판과정에서 재판장이 오 전 대표에게 ‘진술이 다른 피고인들과 전부 엇갈리는데 어떻게 박 의원에게 돈을 줬다는 그 시점의 일만 세세하게 기억하느냐, 그러니까 피고인이나 변호인들이 검찰에게 회유 받은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하는 것 아니냐’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 재판과정에서의 편파적인 진행은 없었나? 사정정국이 조성된 후 재판부의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고 보나?
▲ 변호인들이 항소심 재판정이 이상하게 굉장히 까다롭게 한다고 하더라. 1심에서 증인으로 나와 이미 증언을 한 사람들을 항소심에서 전부 다시 불러서 증언을 하게 했다.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아무리 까다롭게 해도 우리는 명명백백하게 돈을 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재판결과에 자신이 있었다. 변호인들도 전부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 새정치연합 혁신위는 검찰에 기소만 돼도 당직을 정지시키는 혁신안을 발표했다. 이번 재판으로 내년 총선 공천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재판이 정치적 탄압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정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 정권이 바뀌어도 늘 검찰의 정치편향성이 문제로 지목된다. 검찰의 정치편향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나?
▲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기 곤란하다.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저는 법사위원을 하면서 사법부를 존중해왔지만 이번 2심 판결은 분명한 ‘오심’이라고 생각한다. 대법원에서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겠다.

- 끝으로 3심 재판을 앞두고 하고 싶은 말씀은?
▲ 맨 처음에 검찰은 제가 10억원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혐의를 입증하지 못해서 고작 3건에 8000만원을 받았다고 기소했다. 그나마 재판부에서는 1건 3000만원만 유죄로 인정했다. 이 판결조차 물증은 없다. 일단 정치인이 법정에 서면 나중에 무죄를 선고받아도 국민들은 믿지를 않는다.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저를 욕할 땐 욕하시더라도 재판내용이 무엇인지,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재판내용을 제대로 알고 나면 국민들께서도 제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mi737@iyosisa.co.kr>

 

[박지원 의원 프로필]
▲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
▲ 미국 뉴욕한인회 회장
▲ 제14, 18, 19대 국회의원
▲ 제2대 문화관광부장관
▲ 김대중 대통령비서실장
▲ 민주당 원내대표
▲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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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