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만 회사 직원 한 맺힌 사연 공개

"박 회장, 인간다운 경영인 되시오"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박지만 EG 회장의 계열사 노조 간부인 양우권씨가 지난 10일 박 회장을 비난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이다. 그는 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양씨와 함께 10년 가까이 투쟁해온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김정기 부장의 입을 빌려 그의 한 맺힌 사연을 공개한다.

박지만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EG그룹 계열사 EG테크의 유일한 노조원인 양우권씨가 지난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에서 박 회장을 지목해 “당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사람이었다”며 “당신은 기업가로서의 최소한의 갖추어야 할 기본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양씨는 또 박 회장에게 “권력 옆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제발 당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진정 인간다운, 기업가다운 경영인이 되어 달라. 내가 하늘에서 두 눈 부릅뜨고 내려다 보겠다”고 썼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일요시사>는 양씨와 함께 10년 가까이 투쟁 해온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김정기 부장의 입을 빌려 그 한 맺힌 사연을 공개한다.

“말도 섞지 마라”

양씨는 지난 1998년 EG테크에 입사해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 산화철 폐기물 포장 업무를 했다. 악몽은 지난 2006년 금속노조 EG테크지회가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회사 측은 노조에 가입한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노조에서 탈퇴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회사 측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결국에는 양씨 혼자 노조에 남게 됐다.

김정기 부장의 증언에 따르면 노조가 있는 하청회사에는 원청회사에서 일을 잘 안 맡기려고 하고, 일을 맡기더라도 여러 가지 패널티가 존재한다고 한다. 때문에 회사 측에서는 노조를 없애려 혈안이 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양씨만 탈퇴하면 노조는 없어지는 것이니 회사 측에서 얼마나 양씨를 괴롭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 측은 양씨를 월 임금이 약 40만원이나 감소되는 직무로 보직을 변경하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대기발령을 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양씨를 탄압했다. 툭하면 흡연이나 근무 중 수면, 태도 불손 등의 이유로 감봉 처분 등의 징계를 주기도 했다. 양씨는 그런 사실이 없다며 항의했지만 일부 사측 인사들의 추측성 진술만으로 회사는 징계처분을 내렸다. 

물론 회사 측의 달콤한 회유도 있었다. 회사 측은 만약 양씨가 노조를 탈퇴할 경우 임금 손실분 및 감액된 성과금을 보상하고 원직 복직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양씨는 사측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대해 김정기 부장은 “양씨가 불의를 용납 못하는 성격이었다. 회사 내에서 부조리한 것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런 것들을 바꾸기 위해 끝까지 노조에 남은 것”이라며 “낙하산 인사들이 고위직으로 임명된 후 직원들 복리후생에는 관심도 없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했다. 하청 근로자 임금 수준이 원청 근로자 임금의 40% 수준밖에 되질 않는다. 노조가 없으면 이런 부조리한 것들을 어떻게 바꾸겠나?”라고 말했다.

양씨의 나홀로 투쟁이 길어지면서 사측의 탄압도 더 잔인해졌다. 김 부장은 “사측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양씨가 우울증, 강박증 등의 정신적 질병을 앓았다. 원래 굉장히 활발한 사람이었는데 약물 치료까지 받고 후유증으로 말도 어눌해졌다. 손 떨림 증상도 심했다. 어느 날은 두통이 너무 심해 조퇴를 요청했는데 사측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사측은 양씨에게 근무지 이탈로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내렸다”고 말했다.

EG 계열사 노조간부 스스로 목숨 끊어
공개 왕따…유서로 노골적 괴롭힘 밝혀


게다가 사측은 양씨에게 정직 처분을 내려놓고는 정직 기간에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황당무계한 이유로 양씨를 해고 시켰다. 이후 양씨는 회사와 법적 다툼을 벌인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 판결을 받고 복직했다. 사측이 온갖 치사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양씨를 압박한 것이다.

양씨는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사내 하청은 기본임금이 박하다. 원래 하청은 추가 근무를 하면서 수당을 챙겨야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데 사측은 양씨를 추가 근무를 할 수 없는 부서로 옮겨버렸다. 김 부장은 “아이들 학비도 내야하는데 양씨의 급여는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양씨의 부인이 부업을 하고 모친의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서 생활했다”고 말했다. 


이직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철소 내에서 동종 업계에 재취업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을 하려면 50이 넘은 나이에 전혀 새로운 직종의 직업을 알아봐야 했다. 양씨로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버티며 투쟁하던 양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사내 왕따'였다. 김 부장은 “양씨가 죽음에 이른 결정적인 이유는 왕따라고 생각한다. 그런 어려움을 내게 자주 토로했다. 원래 무척 성격이 밝아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 회사에서 아예 양씨를 격리 시켰다”며 “양씨와 친했던 사람들에게 양씨와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밥도 같지 먹지 말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양씨가 있는 자리에서도 대놓고 수차례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양씨와 친했던 직원들이 사측의 지시를 무시하고 양씨와 말이라도 한마디 나누면 사측은 그 직원들을 따로 불러 협박을 했다.

양씨가 부당해고 재판 끝에 복직된 후에는 수개월간 별다른 일도 주지 않고 하루 종일 사무실 구석 책상에 앉아있게 했다. 사측은 그 모습을 CCTV를 통해 감시했다. 양씨에게 노트북 한 대가 지급됐지만 인터넷조차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양씨는 그런 굴욕을 견디며 수개월을 버텼다.

그러다 지난 5월1일 사무실 촬영 보안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시 정직 2개월 처분을 받는다. 당시 양씨는 사측의 부당한 탄압을 알리고자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은 노트북 한 대뿐인 자신의 책상을 촬영해 언론사에 보냈는데 사측은 이를 ‘촬영 보안위반’이라고 규정하고 징계를 내린 것이었다. 결국 양씨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병원도 못가게 막아”

하지만 박지만 회장 측은 박 회장은 EG그룹의 회장이고 양씨가 속해있던 EG테크의 대표이사는 따로 있다며 양씨가 박 회장을 지목해 비난하고 자살한 것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김 부장은 “EG테크 대표이사는 형식적인 자리고 실질적인 권한은 없다. EG그룹이 노조를 탄압한 것은 기본적으로 박 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양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박 회장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요시사>는 EG테크 측의 해명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취해봤으나 EG테크 측은 끝내 답변을 거부했다.

 


<mi737@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박지만 사업 발자취

박지만 EG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이다. 1981년 육군사관학교를 제37기로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한 동시 방공포병과 소위로 임관했으며, 재직 중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의무복무만을 마치고 86년 육군 대위로 예편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어머니를 잃고 육사 생도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박 회장은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뒤 한동안 마약 등에 손을 대며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도움을 받아 EG그룹의 회장이 될 수 있었다.

EG그룹은 1987년 삼양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으며, 포항제철의 그늘 아래 알짜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냉연강판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의 독점권을 부여받은 삼양산업은 2차 가공을 통해 모니터 부품 등에 필수적인 산화철을 만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EG는 세계 고급 산화철 시장에서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15%가 넘는 점유율을 유지하며 세계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EG는 2013년 연결기준 매출 1230억원에 영업이익 63억4986만원, 당기순익 47억4938만원을 기록했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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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