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노계 '호남판 자민련' 플랜 실체

"친노 들러리 서느니 우리끼리 새집 짓자"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지금 야권에서 신당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4·29재보선에서 참패한 후 야권에서는 신당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신당 창당 움직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호남판 자민련 플랜'은 그 여느 때보다 구체적이다. 호남신당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20대 총선을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달 치러진 4·29재보선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전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것이다. 특히 ‘성완종 게이트’라는 호재를 등에 업고 대부분 야권 텃밭에서 치룬 선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격이 더 크다. 이런 선거에서도 이길 수 없다면 당장 내년 총선에서는 100석도 얻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호남의 불신임
흔들리는 친노

무엇보다 광주에서의 패배는 뼈아팠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광주 선거는 사실상 친노(친노무현)진영에 대한 심판이었다. 호남에서는 ‘친노가 호남에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불만이 팽배하다. 호남 주민들은 더 이상 친노가 이끄는 새정치연합에는 표를 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도 계파 갈등은 극에 달한 모양새다. 새정치연합 주승용 수석최고위원은 재보선 참패 이유에 대해 “친노 패권주의 때문에 졌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주 최고위원은 “당내에 친노 피로감이 만연돼 있다. 우리 당에 친노가 없다고 하는데 과연 친노가 없는가? 이번 재보선 공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친노)후보를 세워서 야권분열의 빌미를 준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광주 선거 끝까지 지원 안한 비노
문재인 사퇴 요구하며 명분 쌓기?

지난 2월 전당대회에서 ‘친노가 당권을 잡으면 당이 깨질 것’이라던 예언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당시 문재인 대표 측은 호남신당론에 대해 “가장 유력한 당권주자인 자신을 견제하기 위한 비노진영의 실체 없는 협박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호남의 민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현재 새정치연합의 유력 대권주자가 모두 영남 출신인데 당권까지 친노가 가져가면 호남은 친노 거수기냐는 말이 나온다. 지난 2002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10년 이상 호남이 중앙정치권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호남소외론’은 호남신당론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친노계에 대한 호남의 성난 민심은 지난 4일 문재인 대표의 광주 방문현장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이날 문 대표는 재보선 참패 후 ‘회초리를 맞겠다’며 광주를 찾았지만 광주공항에 내리자마자 광주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시위에 맞닥뜨려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날 20여명의 광주시민들은 ‘문재인은 더 이상 호남민심을 우롱하지 말라’ ‘호남이 봉이냐’ ‘새정련은 각성하라’ 등의 피켓을 들고 문 대표의 방문에 항의했다.

광주 방문
격렬 시위

호남에서 새정치연합이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다. 지난해 치러진 6월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돌풍이 호남을 휩쓸었고, 그해 7월 재보선에서는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까지 연출됐다.

호남이 돌아서자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지기반인 호남이 새정치연합을 외면한다면 수도권도 위험하다. 항상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는 수도권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들은 새정치연합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우리 당이 호남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당장 내년 총선에서 새정치연합 마크 달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당에 남아야 하는 것이 맞는지 지금 떠나야 하는 것이 맞는지 눈치싸움이 치열하다”며 “의원들 사이에서는 지금 신당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데 늦게 갈아타면 불이익을 당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최근 야권에서는 이른바 호남판 자민련 플랜이 주목받고 있다. 호남은 타 지역과는 달리 선거에서 새정치연합과 신당 간 1대1 구조를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만약 수도권에서 새정치연합과 신당이 격돌한다면 새누리당만 어부지리를 얻는 결과가 나올 수 있지만 호남을 기반으로 한 신당이 출범할 경우에는 그런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호남판 자민련 플랜의 중심에는 4·29 광주 서구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무소속 천정배 의원이 있다. 천 의원은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취재진과 만나 “내년 총선에서는 광주호남에서 새정치연합과 경쟁하겠다”며 “(새정치연합) 의원 절반 정도를 빼와 다 뒤집어엎어야겠다”고 밝혔다.

천 의원은 이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내년 총선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호남에서 DJ를 이을 만한 인재들을 널리 모아 새정치연합과 경쟁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천 의원은 비록 “신당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다”고 말하긴 했으나 사실상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은 과거 충청권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정당이다. 1995년 3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주도로 창당돼 2006년 4월까지 충청권을 대표했던 자민련은 창당 3개월 만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4명을 당선시켰고, 1996년 치러진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50명을 당선시켰다. 제3당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물론 호남판 자민련을 만들려는 움직임에 대한 비판도 있다. 친노계로 분류되는 새정치연합 이해찬 의원은 지난 6일 기자간담회에서 “호남신당은 제일 한심한 소리”라며 “전국정당이 아니고는 국가 일을 할 수가 없다. 자민련이 국회의원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지역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제2의 자민련
과연 성공할까?

그러나 동교동계를 비롯한 비노진영의 생각은 다르다. 과거 자민련처럼 사안에 따라 때로는 여당과 손잡고 때로는 야당과 함께하는 유연한 스탠스를 취하면 호남의 몸값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호남판 자민련은 선거 때마다 표를 몰아주고도 친노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받아왔던 호남의 니드(NEED)를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과거 DJP연합을 주도했던 한화갑 한반도평화재단 총재도 한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해 “호남판 자민련은 호남 발전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한화갑 총재는 “DJP연합 당시 JP의 요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 보는 사람을 장관에 덜컥 임명할 정도로 당시 JP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며 “호남판 자민련이 출범하면 호남이 정국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재 호남에 걸려있는 의석수는 30석 정도인데 신당이 차기 총선에서 선전한다면 교섭단체 구성 요건인 20석을 충분히 넘길 수도 있다.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넘기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원내3당 자리는 꿰찰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중요 법안 처리를 놓고 극렬하게 대립할 때마다 여야가 신당에 찾아와 읍소하게 되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천정배 승리로 신당 가능성 확인
이희호 여사 적극 설득작업 중?

호남판 자민련 플랜은 이미 시작된 모양새다. 호남신당의 성공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다. 호남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이 호남신당을 지지해준다면 당장 내년 총선에서 호남신당은 날개를 달게 된다. 때문에 이미 신당 창당을 모색하고 있는 이들이 이 여사에 대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는 풍문도 들린다. 이 여사는 지난 전당대회에서는 동교동계인 박지원 의원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신당설이 불거질 때마다 분열은 안 된다며 만류했지만 호남의 민심이반현상이 심각한 만큼 이번에는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천 의원은 이미 지난 6일 이 여사를 예방하기도 했다. 이 여사를 예방한 자리에서 천 의원은 자신이 김대중 정신을 잇는 ‘적자’임을 은연중 강조하면서 자신의 탈당과 무소속 출마가 야권분열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닌 야권 내 경쟁을 위한 결단이었음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동교동계로 분류되는 한 인사는 “신당 창당을 무조건 분열이라고 비판할 일인가? 신당 창당은 분열이 아니라 야권 내 경쟁을 유도하는 일이다. 특히 호남은 오랫동안 1당 독재로 침체되어 있었는데 호남에서 야권이 치열하게 경쟁할수록 호남은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비노계가 문 대표의 사퇴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신당 창당을 위한 명분 쌓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문 대표 사퇴
신당명분 쌓기?

문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한 중진의원은 “그냥 진 것도 아니고 텃밭에서 전패했으면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쇄신책이 나와야 하는데 현재 지도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국민들이 회초리를 들었는데 맞고도 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더욱 화가 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이렇게 선거에 대패하고도 대표 자리를 유지한 전례가 없는데 친노는 뭉개려하니 뻔뻔함에 화가 난다. 무조건 ‘단결해야 한다’ ‘분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으로는 당내 불만을 잠재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재보선 과정에서 비노계 인사들이 의도적으로 광주 선거지원을 외면한 것도 사실상 문 대표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안철수, 김한길 전 대표는 선거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광주를 찾지 않았고, 호남맹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도 선거 초반 광주를 찾은 뒤 발길이 뜸했다. 광주 선거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수상한 행보일 수밖에 없다. 과연 호남판 자민련 플랜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정치권이 호남민심의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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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