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은 문재인-박지원 '이면합의설' 막전막후

불안한 '오월동주' 승리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동교동계의 좌장격인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지난 7일 문재인 대표의 4·29재보선 지원요청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박 의원은 지원요청을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선당후사를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이 차기 총선 공천권 등을 두고 일종의 이면합의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과연 ‘오월동주(吳越同舟)’를 선택한 두 사람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동교동계의 좌장격인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 박지원 의원이 지난 7일 4·29재보선에서 문재인 대표를 돕기로 했다. 박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재보선과 관련해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적극 협력하겠다”고 선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그룹인 동교동계는 당초 당 지도부의 재보선 지원요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동교동계의 한 전직 의원은 “동교동계가 용병도 아니고 선거 때만 되면 불려나갔다가 선거가 끝나면 찬밥 신세”라며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친노(친노무현)계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선당후사?
지분 챙기기?

그런 동교동계가 갑자기 문 대표를 돕겠다고 나선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박 의원은 선당후사 정신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치권에선 이미 문 대표와 박 의원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동교동계의 핵심인사인 권노갑 상임고문은 난데없이 주류와 비주류간 6대4 지분론을 주장해 더욱 논란을 키웠다.

권 고문은 동교동계가 재보선 지원을 결정한 날 불쑥 “당 운영은 반드시 주류와 비주류가 있기 마련”이라며 “그동안 정당정치 관행은 주류 60%, 비주류 40%를 배합했다. 그 정신을 문 대표도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지원 결정, 선당후사라더니
사실상 6대4 지분 요구?


논란이 커지자 박 의원은 기자간담회에서 “권 고문에게 (발언 진위를) 물었더니 권 고문이 전대 과정에서 문 대표에게 한 이야기라고 하더라. 누가 대표가 되든 주류·비주류를 구분하지 말고 협력하자는 얘기를 한 것”이라며 “합의라고 할 게 있느냐. 서로 오해를 푼 것”이라고 일축했다.

한편 박 의원은 재보선 지원을 결정하기 전인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문 대표와 비공개회동을 가졌다. 두 사람의 회동은 오후 6시40분부터 8시20분까지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배석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두 사람만의 비밀회동이었다. 이날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새정치연합 김영록 수석대변인은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회동 이틀 후 박 의원은 재보선 지원을 선언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선당후사라고 말하지만 어제까지 강경하게 반대하던 동교동계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꾼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다”면서 “박 의원이 문 대표와의 회동에서 동교동계를 설득할 만한 무언가를 분명히 얻어왔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장 새정치연합과 경쟁하고 있는 국민모임은 “동교동계가 호남을 볼모로 지분 확대에 나선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몸값 높아진 박
또 당한 문?

문 대표와 박 의원은 지난 전당대회에서 경선룰 논란 등을 겪으며 사이가 멀어졌다. 오죽 억울했으면 박 의원은 전당대회 과정에서 이미 10년이 지난 대북송금특검까지 들먹이며 문 대표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런 두 사람이 이번 재보선에서 다시 손을 잡은 것을 단순히 선당후사 정신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분명히 숨겨진 노림수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우선 문 대표의 경우에는 차기 대권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취임 후 첫 재보선부터 전패 위기에 내몰렸다. 문 대표가 전당대회 기간 가장 강조했던 것이 ‘이길 수 있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번 재보선에서 전패한다면 문 대표의 입지는 크게 좁아질 수밖에 없다. 전임 안철수 공동대표는 지난해 7월 재보선 참패로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선된다 해도 남은 임기가 채 1년이 안되고, 고작 4석이 걸려 있는 미니 선거지만 문 대표가 이번 재보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문 대표로서는 박 의원과 동교동계에 다소 지분을 양보하더라도 그들의 지원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광주 서구을은 물론이고 서울 관악을과 성남 중원이 모두 호남 출신 주민들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호남의 지지를 얻지 않고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동영 전 의원과 천정배 전 의원이 각각 서울 관악을과 광주 서구을에 출마하면서 문 대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만약 두 사람이 이번 재보선에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문 대표는 동교동계가 선거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분합의설이 나돌 정도로 문 대표가 동교동계에 바짝 엎드려 선거 지원을 요청한 것은 결국 그 두 사람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문 대표에게 호남은 아킬레스건이다. 호남만 가지고도 선거에 승리할 수 없지만 호남을 빼고도 승리할 수 없는 것이 새정치연합이다. 하지만 호남에선 친노계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따른 민주당의 분당과 노무현정부의 대북송금 특검 등은 호남인들에겐 아직까지도 아물지 않은 상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은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친노 지도부가 이끄는 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매번 패배하면서 민심이반현상이 더욱 심화됐다. 호남 출신의 정동영 후보와 천정배 후보 모두 이런 호남 민심의 변화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문 대표로서는 동교동계에 지원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지분합의설 논란 등으로 큰 상처를 입더라도 당장 재보선의 승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과거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사례를 볼 때 이번 재보선에서 패하고 나면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또 문 대표로서는 이번 재보선에서 패하더라도 동교동계를 비롯한 비노계와 공동책임을 지게 돼 책임론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내년 총선 공천은 대부분 전략공천 없이 당내 경선을 통해 뽑기로 했는데 문 대표가 지분을 챙겨주고 말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회의 때마다 문 대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계산하지 말자’라는 말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박 의원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박 의원은 지난 전당대회에서 패했지만 요즘 몸값이 한껏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대표에게 패한 이후 정치뉴스에서 사라지다시피한 서청원 의원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일단 박 의원은 전면에 나서 문 의원을 돕기로 하면서 명실상부 동교동계의 좌장자리를 꿰차게 됐다.


지분 합의설
이면합의 있었나?

지난 1990년 미국에서 귀국해 뒤늦게 동교동계에 합류한 박 의원은 그동안 동교동계 사이에서 정통 동교동계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최근 동교동계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동교동계는 동교동계 중 유일한 현역 의원인 박 의원을 통해 의견을 밝히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박 의원이 문 대표와 동교동계 사이에서 이른바 ‘밀당’을 하면서 가장 큰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정치전문가는 “동교동계의 지지를 얻었다고 해서 호남의 민심이 얼마나 변할지는 미지수인데 문 대표가 동교동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내준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며 “문 대표가 사실상 박 의원의 몸값 높이기 전략에 휘말린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재보선 지면 대권도 끝
박지원 몸값만 높아졌다


박 의원으로서는 당초 선거 지원을 끝까지 거부할 명분도 부족했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문 대표가 취임 후 탕평인사를 위해 나름 신경을 쓴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호남을 소외시켰다는 억지 주장으로 끝까지 선거지원을 거부했다면 선거가 끝난 후 박 의원과 동교동계는 엄청난 후폭풍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재보선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문 대표를 돕는 편이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유리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런데 일각에선 박 의원이 문 대표를 성심성의껏 돕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실제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던 김희철 전 의원은 박지원계로 분류되는데 당내 경선에서 친노계로 분류되는 정태호 후보에게 패한 후 경선과정에 불만을 표시하며 정 후보를 돕지 않고 있다.

호남조직을 가지고 있는 김 전 의원이 정 후보를 지원한다면 선거판세는 단숨에 변할 수 있지만 김 전 의원이 움직여주지 않으면서 새정치연합 전체가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특히 김 전 의원 쪽에 있던 자원봉사자 중 상당수가 관악을에 출마한 국민모임 정동영 후보 캠프로 옮겨간 것으로 알려지면서 동교동계의 이중플레이가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필하며 관악지역에서 조직책으로 활동한 정통 동교동계 인사로 꼽힌다.

동교동계 부활?
친노의 갈팡질팡

게다가 박 의원이 문 대표를 도왔는데도 문 대표가 이끄는 새정치연합이 재보선에서 전패한다면 차기 총선을 앞두고 당내에서 ‘친노 불가론’이 힘을 얻게 된다. 박 의원과 동교동계에게는 오히려 입지를 넓힐 수 있는 기회다. 또 권 고문이 이희호 여사의 ‘단결하라’라는 발언을 언급한 것을 두고 박 의원이 불편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박 의원의 진정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박 의원은 이 여사의 말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경우 향후 동교동계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 것 같다”며 “사실상 선거과정에서도 친노가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발을 뺄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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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