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공개> 박원순 가회동 공관 리모델링 비용

호화공관 아니라지만 서민 보기엔 '못마땅'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박원순 서울시장의 가회동 공관 리모델링비용이 드디어 공개됐다. 서울시 측은 가회동 공관 입주 당시 리모델링비용으로 약 8000만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공개했지만 자세한 예산 사용내역은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시가 고작 2년짜리 전세 주택에 8000만원이 넘는 리모델링비용을 사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자세한 내막을 <일요시사>가 단독으로 공개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달 8일 아파트형 은평구 임시공관을 떠나 가회동 소재 단독주택으로 공관을 이전했다. 해당 공관은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 방 5개, 회의실 1개, 화장실 4개가 있다. 전세가는 28억원에 달한다. 은평구 공관(2억8200만원) 전세금의 약 10배다.

불안한 전세계약

가회동 공관의 전세금은 전국 최고가 아파트인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전용면적 244.66㎡) 전세금(23억원)보다도 더 비싸다. 때문에 박 시장은 가회동으로 공관을 이전하면서 ‘황제공관’ 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타워팰리스를 능가하는 거액의 전세금보다 더 논란이 됐던 것은 무려 8000만원이 넘는 공관 리모델링비용이었다. 전셋집 리모델링비로 수천만원을 지출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약이 끝나는 2년 후 집주인이 일방적으로 공관을 비워달라고 요구해도 서울시는 할 말이 없다. 공관 리모델링비로 사용한 수천만원의 혈세는 그대로 날리게 된다.

한편 서울시는 가회동으로 공관을 옮긴 뒤 약 한 달 만에 공관 리모델링 비용 세부내역을 <일요시사>에 공개했다. 서울시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가회동 공관 리모델링에 사용 된 총비용은 8737만원이었다.

우선 서울시는 가회동 공관 경비실 조성 및 내부정비 공사로만 3971만원을 지출했다. 또 가회동 공관 녹지대 정비공사로 1166만원을 사용했다. 서울시가 이처럼 가회동 공관 내부 정비 공사비에 5000만원이 넘는 돈을 사용한 것은 앞으로 공관에서 치러질 여러 행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가 가회동으로 공관을 이전하면서 내세웠던 가장 큰 명분도 국내·외 주요인사 접견 등 대외협력 업무의 필요성이었다.

박 시장은 취임 후 이전 혜화동 공관에서 77차례나 만찬행사를 열어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었다. 이 기간 동안 박 시장이 공관 만찬을 위해 사용한 혈세는 9651만원으로 1억원에 육박했다. 행사비는 대부분 식대로 쓰였는데 한번 행사를 열 때마다 1인당 평균 3만5000원이 넘는 식사가 제공된 셈이다. 박 시장이 그동안 만찬행사에 초대한 사람은 2753명이나 됐다. 전임 시장들도 종종 공관에서 만찬행사를 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주, 또 대규모로 만찬행사를 연 것은 박 시장이 처음이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 시장은 공직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공직선거법에서는 지자체장의 기부행위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박 시장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리긴 했지만 보수진영에선 여전히 박 시장의 만찬정치를 문제 삼고 있다.

지금까지 커튼 설치비만 900만원
전셋집에 수천만원 ‘펑펑’ 왜?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은 “공관 만찬을 직무상 행위로 보는 것은 공직선거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저도 구청장을 지내봤지만 간담회 때 식사를 제공할 수가 없다. 대부분 집무실이나 강당 등 공개된 장소에서 간담회를 진행하고 기껏해야 간단한 다과 정도가 제공된다. 법적 근거도 없이 대량의 인원을 반복적으로 불러 만찬을 연 것은 향응제공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가회동으로 공관을 이전하면서 노후 조명기구 교체 공사비로 737만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측은 “기존 가회동 공관 조명기구는 백열등이었는데 효율이 좋지 않아 전기세가 많이 나와서 LED전등으로 교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요시사>가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시장공관에서 한 해 사용하는 평균 전기세는 400만원 가량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 2년짜리 전세주택의 전기세를 아끼자고 700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조명기구 교체 공사를 진행한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라는 지적이다. 전기세를 아끼기 위한 목적보다는 외부 경관을 좀 더 화려하게 꾸미기 위한 공사는 아니었는지 의심이 됐다.

서울시가 실내외 배관, 배선 및 통신단자함 설치비용으로 822만원을 사용한 것도 다소 이상했다. 가회동 공관이 정상적인 집이라면 배관, 배선 등을 세입자가 이렇게 큰돈을 들여 직접 설치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 측은 “시장님이 공관에서도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자결제 전용선로를 까는 공사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전에 사용했던 은평구 공관은 최신 건물이라 이 같은 공사 없이 공관에서 전자결제를 할 수 있었지만 가회동 공관은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배관, 배선 공사를 전부 다시 해야 했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또 가회동 공관에 361만원을 들여 케이블TV 설치 공사를 하기도 했다. 역시 위와 마찬가지 이유였다. 가회동 공관에 기존 케이블TV 선이 설치되어 있긴 했지만 채널수도 다양하지 않고 전파도 약했다. 케이블TV 선 한 가닥으로 온 집안을 연결하고 있던 것을 각 방마다 단자함을 따로 설치해 각각 다른 선이 들어가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박 시장은 이 공사를 통해 좀 더 선명하게 다양한 채널의 케이블TV를 시청할 수 있게 됐다.

가회동 공관으로 이전하면서 커튼 수선 및 이전 설치비용으로 486만원을 사용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이는 서민적인 삶을 표방하던 박 시장의 평소 행보와는 분명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서울시는 혜화동 공관을 사용하면서도 커튼 설치비용으로 417만원을 사용한 바 있다. 박 시장은 공관을 옮겨 다니면서 커튼 설치비로만 900만원 가량을 사용한 셈이다.


혈세 날리나?

서울시 측은 시정운영을 위해 꼭 필요한 지출이었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소중한 혈세를 낭비한 것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면 어차피 이사할 전셋집에 박 시장처럼 마구잡이로 리모델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이는 서울시민들의 혈세를 마구잡이로 사용한 꼴”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전국적으로 공관을 아예 없애거나 축소하는 추세임에도 오히려 공관을 확장·이전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례로 남경필 경기도지사나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은 기존의 공관을 시민 문화생활 공간으로 되돌리고 자비로 마련한 자택에서 출퇴근을 하며 도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시장 내외만 살기에는 공관이 너무 큰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서울시 측은 “누구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녀 두 분 중 한 분은 현재 공관에서 거주하고 계신다”고 밝혔다. 서울시 측은 이상하게도 두 자녀 중 현재 누가 공관에 거주하고 있는지는 끝까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박 시장은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는데 당초 아들은 결혼 후 미국에서 지내고 있고, 딸은 스위스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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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