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겸직 장관 '지역구 퍼주기' 전수조사

'여왕님 눈도장' 찍으려고 줄 선 이유 있었다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박근혜정부 들어 친박 의원들이 잇달아 국무위원으로 발탁되면서 전체 18명의 각료(장관급 포함) 가운데 무려 3분의 1인 6명이 국회의원을 겸직하게 됐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치권에서는 차라리 의원내각제를 하자는 비아냥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지역구 의원들이 국무위원을 대거 겸직하면서 예산편성 때마다 공정성 시비가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관인 듯 국회의원인 듯 정체성이 모호한 그들의 지역구 퍼주기 실태를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우리나라가 의원내각제(국회 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부 형태) 국가냐? 대통령제 국가에서 총리와 부총리까지 국회의원이 겸직하는 경우는 없을 거다. 지금 내각 구성만 보면 외국인들은 우리나라가 의원내각제 국가인 줄 알 거다.” 

이완구 국무총리, 최경환 부총리, 황우여 부총리, 김희정 장관, 유일호 장관, 유기준 장관까지…. 현재 우리나라 국무위원 18명 가운데 무려 3분의 1인 6명이 국회의원을 겸직하게 되자 정치권에서는 차라리 의원내각제를 하자는 비아냥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장관? 의원?
정체성 모호

박근혜 대통령이 지역구 의원들을 대거 국무위원으로 발탁하면서 발생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예산편성의 형평성 문제다. 장관을 겸직하고 있는 의원들은 아무래도 평범한 다른 국회의원들보다 예산편성 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특히 기획재정부장관이나 국토교통부장관의 경우는 국회의원들이 줄을 서서 찾아와 지역구 관련 예산을 편성해 달라며 읍소하는 자리”라며 “그런 자리를 지역구 국회의원이 직접 겸직하게 됐으니 직무공정성을 두고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의 지역구인 경북 경산·청도는 최 부총리 취임 이후 그야말로 ‘예산폭탄’을 맞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대구지하철 1호선 하양 연장 사업이다. 대구지하철 1호선을 지금의 종착역인 대구 동구 안심역에서 최 부총리의 지역구인 경북 경산시 하양읍까지 연장하는 이 사업은 총 2789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선출직보다 임명직 장관이 낫다?
그들만의 스펙쌓기, 전문성은 제로

그런데 이 사업은 지난 2008년 이명박정부 때만 해도 기획재정부가 실시한 예비타당성 평가에서 경제성이 없다며 퇴짜를 맞았었다. 하양읍의 인구는 고작 2만7000명 가량이고, 경북 경산시의 인구를 전부 합쳐봐야 24만이다. 수천억을 투입하는 사업인데 처음부터 수지타산이 맞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최 부총리가 그 당시 지식경제부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양역 예정지 북쪽에 경산지식산업지구를 조성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지식경제부장관은 산업단지개발을 총괄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결국 대구지하철 1호선 하양 연장 사업은 재실시한 예비타당성 평가를 무난히 통과했다.
 

지난해 예산심사과정에서는 국토부가 대구지하철 1호선 하양 연장 사업의 노선 설계비로 요구한 예산 10억원이 기재부와의 조정과정에서 30억원으로 늘어나는 보기 드문 일도 벌어졌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보통 각 부처들이 올린 예산은 기재부와의 조정과정에서 깎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안대로 통과만 돼도 성공인데 부처 요구안을 기재부가 오히려 증액시킨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라고 설명했다.

장관 일도 바쁜데
챙길 건 챙겼다

이외에도 작년 예산심의 때 청도세계코미디예술제 예산이 4억원 증액됐고, 당초 보건복지부가 낸 예산안에는 없었던 ‘경산 글로벌 코즈메틱 비즈니스센터’ 건립비용 10억원은 난데없이 기재부가 편성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오죽하면 작년 예산심의 당시 국회에서는 최 부총리를 겨냥해 ‘초이예산’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자신의 지역구인 경북 경산·청도에서만 내리 3선을 한 최 부총리의 지역구 사랑은 유별나다. 최 부총리는 부총리 취임 후 바쁜 국정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지역구를 방문해 건의사항을 청취하고 있다. 하지만 최 부총리는 지역구 의원이기 이전에 한정된 국가예산을 공평하게 배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경제부총리이자 기획재정부장관이다. 그런 최 부총리가 특정지역을 유독 자주 방문하고 그 지역의 건의사항만 자주 청취하는 것은 형평성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행보라는 지적이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도 국무위원이 된 후 지역구 퍼주기에 몰두했다. 황 부총리의 2014년도 의정보고서에 따르면 황 부총리는 지난해 지역구예산으로만 약 6700억원을 확보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황 부총리가 교육부장관이 된 후 황 부총리의 지역구인 인천 연수구는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교육도시가 됐다.

황 부총리가 직접 2014년도 의정보고서에 적어 넣은 내용이다. 황 부총리는 19대 국회 전반기에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몸담긴 했었지만 후반기엔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법관 출신으로 교육부장관 임명 당시에도 교육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황 부총리의 2014년도 의정보고서를 살펴보면 황 부총리는 유네스코가 주도해 온 기초교육 보급운동의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15년간 교육발전 방향을 제시하고자 열리는 2015년 세계교육포럼을 송도에 유치했다. 이와 관련한 38억원의 예산도 이미 확보한 상태다.

2016년에 문을 여는 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와 관련해서는 최초 신설비 214억원에 65억원을 추가해 총 279억원의 국비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국립대 전환에 성공한 인천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도 눈에 띈다. 인천대는 전년도 대비 무려 155%나 증액된 102억원의 국비를 지원 받았다.

또 2017년까지 인천 연수구에는 8개의 학교가 신설되는데 황 부총리는 이와 관련한 예산 724억원도 따냈다. 이외에도 황 부총리의 지역구인 연수구에는 해돋이공원 안에 40억원을 들여 해돋이도서관을 건립 중이고, 지난해 특별교부세와 교부금으로만 55억원이 지원됐다. 의정보고서에는 일부 부풀린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황 부총리가 현역 장관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지역구에 예산 퍼주기를 해줬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내년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황 부총리의 의정보고서를 살펴 본 정치권 관계자들은 현역 의원들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입을 모았다.

부러운 장관직
청와대에 충성

지난해 3월 취임한 후 그해 12월 퇴임한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장관의 경우도 눈길을 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가 지역구인 이 전 장관은 취임 후 곧바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팽목항에서 거주하다시피 했지만 2014년도 의정보고서를 살펴보면 이 전 장관은 세월호 참사 와중에도 지역구 관련예산을 살뜰히도 챙겼다.

묻지마 예산에 멍드는 재정건전성
정작 꼭 필요한 예산은 후순위로

우선 이 전 장관은 마산로봇랜드 및 로봇비즈니스벨트 조성 예산 218억원을 확보했고, 마산~거제 도로 건설공사 예산 400억원을 확보했다. 마산 의료원 확장 신축 총사업비 600억여원 중 지난해에만 57억원을 확보했고, 마산자유무역지역 확장 관련 예산 1460억 중 168억원을 확보했다.

이외에도 이 전 장관은 지난해 가포신항만 진입도로 건설비 총 1900억 중 50억, 도심하천 생태화 관련 예산 108억, 마산항 워터프론트 조성사업 119억, 마산 도시재생사업 관련 예산 47억도 확보했다.
 

사실 이 같은 의원 겸직 장관들의 지역구 퍼주기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12년 전임 장관이었던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 가평·양평에 문화부가 주관하는 개발사업 관련예산으로 무려 1600여억원을 지원하려다 감사원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당시 문화부는 해당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공모절차조차 무시한 정황이 드러나 논란이 됐었다. 그야말로 묻지마 장관 지역구 퍼주기 예산이었던 셈이다.


묻지마 예산
지역구선 영웅

이 같은 의원 겸직 장관들의 지역구예산 퍼주기 행태는 비록 중앙 언론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지역언론에서는 대서특필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의원 겸직 장관들의 지역구예산 퍼주기 행태는 철저히 비판 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나열한 사례처럼 국가예산의 분배가 왜곡된다면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요가 없다는 타당성 조사마저 무시해가며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나면 이후 발생하는 적자는 국가재정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또 정작 꼭 필요한 예산들은 후순위로 밀리며 국가발전을 저해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박근혜정부의 유별난 현역의원 사랑이 결과적으로 정상적인 국정 운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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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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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