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 비상' 캠퍼스 성범죄 천태만상

새내기 노리는 늑대오빠들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대학은 학문의 성과를 상아처럼 쌓아올렸다는 의미에서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렸다. 대학의 높은 지성과 고매함을 추켜세우는 말이다.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 학생들도 이런 기대와 청운의 꿈을 안고 첫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빛나는 꿈이 무색하게 대학은 성범죄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서울 유명 사립대 재학생 유정량(가명·25·여)씨는 “최근 대학 내에서 성 문제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민감하고 조심하는 분위기다. 오티에서는 성교육까지 했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서강대학교 경영대 오리엔테이션(OT)에서 갓 입학한 새내기를 상대로 도 넘은 성희롱 문구가 알려지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마셔라, 부어라’
그놈의 술이 원수 
 
지난달 25일 서강대 경영대학 재학생과 신입생 300여명은 강원도 평창의 한 리조트에 2박3일간 오리엔테이션을 갔다. 재학생 선배들은 5개로 방을 나누고 여성의 신체를 빗대 ‘아이러브 유방’ ‘작아도 만져방’ 등 선정적인 이름을 붙였고, 그 아래 방마다 지켜야 할 규칙을 적었다. 
 
규칙 중에는 제일 어린 후배가 한 선배를 지목해 그윽한 눈으로 ‘라면 먹으러 갈래?’라고 말하기가 있었다. 이는 영화에 나온 대사로 “나랑 잘래?”라는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신입 여학생 필수로 대동해 섹시 댄스 추기’ ‘3초 이상 스킨십 하기’ 등 자극적인 문구로 가득했다. 곳곳에는 어린 학생들이 보기에 민망하고, 선정적인 표현이 가득했다. 
 

사건이 불거지자 해당 학생회는 곧바로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 같은 성희롱이 개인의 일탈이 아닌 단과대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분을 사고 있다. 서강대 경영대는 “다음날 바로 문제를 파악하고 학생회 차원에서 재발방지와 대응에 대해 논의했다”며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온 뒤 학생회에서 약식 사과문을 올렸고, 교내에 사과문을 대자보 형식으로 붙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학내 선·후배간 성범죄 사건 잇달아
십중팔구 술 때문에…핑계도 가지각색
 
요즘 대학가 술집은 갓 입학한 앳된 신입생과 술자리를 주도하는 학교 선배들로 꽉 차 있다.  
선배들이 나서 새내기들의 대학생활 적응을 도와준다는 취지로 만든 새내기배움터, 엠티와 각종 술자리는 새내기들의 성범죄의 취약지대로 지적받고 있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위원은 “신입생들 경우 이전에 형성된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성범죄에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또 전문가들은 대학 내에서 성 관련 문제가 불거지는 이유는 술·놀이 문화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술을 마시며 흔히 말하는 ‘왕게임’이나 각종 술 게임을 하며, ‘볼에 뽀뽀하기’부터 ‘키스하기까지’ 수위를 넘나드는 스킨십 벌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새내기들은 싫어도 티를 내지 못한다. 선배들에게 모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올해 대학교 2학년인 정수민(가명·22·여)씨는 “초반에는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했다. 종종 술 게임을 하면서 ‘이건 좀 아니다’라고 싶었지만, 벌칙도 군말 없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 한국정책연구위원은 “술 게임이 벌어지는 분위기에서 집단의 놀이문화에서 소외되기 싫어서 성희롱 위험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서울대 여성연구소에 의뢰한 대학생 성희롱·성폭행 실태조사에 따르면 280건의 학내 성범죄 발생장소 중 술집 등 학외 유흥공간이 15%인 43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학내 공공장소(22건), 엠티·수련회 등 (20건) 순으로 나타났다.
 
“내가 챙길게”
오빠 본심은?
 
‘선배를 조심하라. 그 중에서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 선배를 특히 조심하라’는 흔히 대학가에서 나오는 말이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김정순(가명·25·여)씨는 신입생 때 갓 군대에서 제대한 복학생 선배와 잠깐 사귄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과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그 복학생 선배를 만났다”며 “당시 그 선배가 나한테 무척 잘해줬다. 내가 벌주를 마실 때 대신 마셔주며, 그날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말했다. 이어 “얼마 있지 않아 나한테 고백했는데, 나도 좋은 마음으로 사귀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복학생 선배는 사귄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아 김씨의 주요 부위를 스킨십 했다. 당시 김씨는 불쾌했지만, 사귀는 사이니깐 어느 정도까지는 허락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귄 지 한달 즈음 복학생 선배는 김씨에게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에 김씨는 이를 받아드릴 수 없어 결별을 선언했다고 말했다. 당시 느꼈던 게 “결국 나랑 그 짓하고 싶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김씨는 영리하게 해결한 경우다. 
 
예나 지금이나 
“당하고 후회”
 
지난 6일 <국민일보>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학교 1학년인데 대학 선배랑 잤어요’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다고 보도했다. 글쓴이는 “이틀 전 얘긴데 계속 뒤숭숭해서 글을 올린다”며 사연을 풀었다. 그는 “어쩌다 알게 된 25살 먹은 선배인데 ‘너를 왜 이제 만났느냐’ ‘너 같은 후배가 제일 좋다’하며 자신을 띄워주기에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며, “주량이 센 편인데 그 선배가 권하는 술을 받아먹다 취해버렸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같은 동네 사는 친구에게 챙겨달라고 부탁했는데 기억이 끊어졌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배가 나를 챙긴다며 모텔로 데리고 갔던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런데 “잠자리를 갖고 일어나 보니 선배는 사라지고 없고 동기를 통해 ‘바빠서 연락 못했으니 집에 잘 들어가라’는 내용의 카톡만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끝으로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술 때문에 몸을 챙기지 못한 자신이 한심해서 없던 일로 하려고 하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다”며 힘들어했다. 
  
지방의 모대학교 대학생 남녀 10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성희롱 피해경험 규모를 보면 ‘술자리에서 남성 사이에 끼어 앉거나 술 시중을 들게 하는 경험’이 여성은 104명(21%), 남성은 16명(3%)이며, 여성에 대한 가해자는 선배가 가장 많았다.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신체접촉 당한 경험’은 여성은 86명(17%), 남성은 16명(3%)인데, 여성에게 가해행위를 하는 사람 중 62%가 ‘선배’로 나타났다. 이처럼 대학 내 선·후배간 술자리에서 성 관련 문제는 비일비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암암리에 서로 덮거나, 혹자는 ‘쿨’하게 잊는다고 한다.
 
여전한 폭탄 음주문화

정신 차리니 게임 끝!
 
지난 11일 서강대의 논란에 대해 이상근 서강대학생문화처장명의의 입장 자료를 내고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면밀하게 진상을 파악해 그 결과에 따라 엄중하게 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서강대의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성범죄 관련 상담 건수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서강대 측은 “상담 실적이 한 건이던 두 건이던 개인의 비밀보장 차원에서 보호돼야 한다”며 “학교 정보 노출 우려도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3일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 소속 박주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3일 교육부에 ‘최근 5년간 대학 내 성범죄 현황’ 자료를 요청했다. 일주일 후 박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10년부터 작년까지 4년제 대학의 성범죄 건수는 100건으로 집계됐다. 
 
숨기기 바쁜 학교
나몰라라 교육부
 
문제는 통계에 잡힌 대학이 78개교로 전국 4년제 대학(198개)의 39%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특히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대학에는 최근 성추행 사건이 불거진 서울대와 고려대가 포함돼 있다. 
 

자료 제출이 의무사항이 아닌 데다 학교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 교육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교육부도 대학의 성범죄 통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대학 성범죄에 관한 통계는 국회 등에서 요구할 때 자료를 취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대학 내 성범죄 정책을 세우려면 기본적 통계는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박 의원은 “통계로 현실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정책대안을 만들 수 없다”며 “최근 대학교수의 성범죄 사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교육부는 기초적인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012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시각 미술을 전공하는 에마 셀코위츠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남학생에게 강간 당했다. 이후 그는 다른 피해 학생들을 만나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대학 당국의 조사위원회에 참석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하지만 대학 측은 지난해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남학생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그는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대학 측에 항의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매트리스를 들고 다녔다. 자신을 강간한 남학생이 학교를 떠나기까지 매트리스를 들고 캠퍼스를 돌아다니겠다고 밝혔다.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사람들은 이유를 물었고, 함께 매트리스를 들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컬럼비아대 캠퍼스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기숙사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 사실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의 다른 대학에 퍼졌고, 매트리스는 성폭행 피해 고통에 대한 연대의 상징이 됐다. 지난해 10월29일 전국 행동의 날에는 아메리칸대학 등 미국 내 다른 대학뿐만 아니라 헝가리 등 외국 캠퍼스에서도 침대 행렬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 침대일까.
 
설코위츠는 학내 언론 컬럼비아데일리스펙테이터와의 영상 인터뷰에서 “강간을 당한 뒤부터 그 경험은 내게 무거운 짐이 됐고, 어디를 가나 짊어져야 하는 것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원래 침대는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을 때 물러나 있을 수 있는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지만, 지난 1∼2년간 내 삶은 그 은밀한 곳을 모두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미니인터뷰] 캠퍼스 성범죄 심각성 알리는 원준재 인하대 성평등상담소장
“아직도 피해자 처신을 탓합니까”

 
▲대학 성범죄가 만연하는 이유는?
대학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나는 곳이면 성범죄는 발생한다. 최근 대학의 사건들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지성의 상징이라는 캠퍼스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같은 수준의 범죄라도 대학이 아니고 기업체나 직장이라면 언론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성범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처신을 잘못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된 의식이 변화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성 관련 문제가 불거진다고 생각한다.
 
예전 같으면 조용히 덮었던 사건들이 수면 위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사건이 증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성범죄 예방교육의 효과로 피해자를 바라보는 인식이 전보다 긍정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피해자 신고도 전보다 증가했다. 젊은 세대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주장이 이전의 세대보다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 을 방증한다. 
 
▲과거에도 많았나?
과거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이다. 지금 신고하는 사건 중에는 몇 년 전만 해도 신고 할 수 없었던 사건들이다. 예를 들어 남학생 간의 성추행사건은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던 사건들이다. 또 피해자가 흔히 여성이라고만 생각하기에 남성 피해자들은 신고하지 못했다.
 
남성 피해자가 신고하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답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제는 남성 피해자가 신고해도 ‘많이 괴로웠겠다’라고 이해하는 인식이 높아졌다. 과거에도 지금처럼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 당시 피해자는 그냥 ‘재수가 없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로 여기고 넘기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 선·후배 간의 성추행을 그냥 넘겼던 것과 같다. 
 
▲ 대학 내 성범죄 집계가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학 내 성범죄 집계가 어려운 이유는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칫 사건이 알려지면 피해 당사자가 사회적으로 2차 피해를 볼 수 있다. 2차 피해란 아직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피해자를 향한 사회적 냉기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건이 발생하면 공개해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게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피해 당사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담당자들은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비밀보호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다. 또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대학교나 기업이 성범죄의 온상이라는 이미지가 생기기 때문에 쉽게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 고려대나 서울대의 경우 성범죄 관련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두 학교가 다른 학교보다 성범죄 발생률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성희롱·성폭행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성희롱이 발생하였을 때 바로 ‘안 돼요! 하지 마세요! 그만두세요! 이런 행동은 성희롱입니다!’ 등의 분명한 표현을 상대방에게 해야 한다. 성희롱과 친근함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적 행동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쾌하다면 ‘그만하는 게 좋겠다’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폭력은 예방이 최고다.
 
원치 않게 사건이 발생하면 고민하지 말고 전문가나 전문기관에 연락해야 한다. 이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는 잘못된 인식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줄 수 있다. 또 신고를 통해 다른 범죄를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가 점점 팍팍해지더라도 인간으로서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는 계속 교육돼야 한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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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