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친일재산 환수' 이우영 돈 228억 향방은?

나라 팔아먹고 아직도 ‘떵떵’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과거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토 카뮈가 말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미특위) 강제 해산 이후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던 친일재산 국고 귀속 작업이 올해 완료될 전망이다. 현재 관련 소송은 단 2건만 남았다. 2건의 주인은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낸 소송이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 회장의 228억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해승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친일파이다. 그는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고종과 인척 관계로 조선 왕족이다. 한일강제병합 직후 일본에 협력한 대가로 매국공채 16만2000원(현재가치 20억원)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기간 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이해승은 일제 육·해군에 각각 1만원씩 국방헌금을 전달했다. 해방 후 반미특위는 이해승을 체포했지만, 반미특위가 해체 돼서 풀려났다. 이해승은 6·25 전쟁 중 납북돼 행방불명됐고, 1957년 실종 선고가 내려졌다. 

땅 받아 호텔사업

이해승의 장남은 1943년 사망한 상태여서 손자인 이우영 회장이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 회장은 1957년부터 옛 황실재산총국에 소송을 제기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신탁돼 있던 재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까지 신탁재산의 75%인 땅 890만㎡를 되 찾았다. 이 중 절반가량인 435만㎡를 매각했다. 
 
1988년 이 회장은 반환받은 토지 중 전계대원군의 처 용성부대부인의 묘가 있었던 서울 홍은동 땅에 스위스그랜드호텔을 지었다. 이후 이 호텔은 그랜드힐튼호텔로 바뀐다. 특1급인 이 호텔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동원아이엔씨로 이 회장의 아들이 대표로 있다.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재산조사위)가 발족하면서 친일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회장의 그랜드힐튼호텔부지와 성북동 자택 등이 그 대상으로 결정 돼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재산조사위는 2007년 11월 이 회장이 소유한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 임야 118만㎡를 비롯해 경기도 평택시, 충북, 서울 은평구 땅 192만여㎡를 친일재산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시가로 320억원에 달하는 땅이었다. 재산조사위는 포천시 설운동 임야와 서울 은평구 토지 등 185만㎡(시가 228억원에 상당)에 대해서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재산조사위는 140만8000㎡의 땅은 이해승이 1910년~1932년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은 땅이므로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회장은 ‘할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이 친일행각으로 얻은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2008년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들을 고용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전이 시작됐다.
 
이 회장은 조부의 친일 행위를 인정하지만, “이해승은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이라는 이유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제는 식민 지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조선왕실 종친들을 회유하고 포섭했다. 이 회장은 왕족인 이해승도 포섭 대상이었으며, 작위를 거부하지 못했을 뿐 친일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는 논리다. 또 이해승이 일제에게 받은 땅은 협력한 대가가 아니라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 회장이 제기한 첫 소송에서 재판부는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항소한 이 회장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2심 재판부는 “국가귀속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1심을 뒤집는다. 재판부는 이해승이 한일합병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해승이 일제의 한일합병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다는 데 대한 역사적·도덕적 비난은 별개의 문제”라고 밝혔다.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같은 소송의 다른 하급심 소송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판결은 5개월 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 회장은 첫 소송에서 320억원 상당의 땅을 지켜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한일병합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를 재산 귀속 대상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회장 측은 이를 이용해 ‘한일병합의 공으로’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므로 재산 귀속 대상자가 아니라고 주장해 승소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이해승의 한일합병 이후 친일 행각이 인정되는데도 후손이 상속받은 친일 재산을 환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별법의 문구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국회는 2011년 5월 새누리당 김을동 의원의 대표발의로 서둘러 특별법을 개정했다. ‘한일합병의 공으로’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한일합병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계승한 자’라면 모두 친일 재산 국가 귀속 대상이 됐다. 국회는 당시 ‘한일합병의 공’ 이라는 범위가 분명하지 않고 추상적인 문구이며, 친일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작위를 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미 확정된 소송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나머지 소송을 의식한 법 개정이었다. 
 
이 회장은 개정된 특별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섰다. 그는 2011년 12월 진행 중이던 관련 소송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 심판 제청을 했다. 이 회장은 “친일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기만 해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며 개정 특별법의 처분이 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정인을 겨냥한 법 개정이 평등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재산환수법 10년 만에 마무리 눈앞
친일파 왕족 이해승 유산판결 주목
 
하지만 헌재는 특별법 개정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계승한 자’는 일제의 반민족적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깊이 관여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봤다. 또 일제의 귀족이 됐다는 의미를 짚었다. 헌재는 “일제의 귀족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형성된 친일 세력의 최정점에 있는 상징적 존재”라고 평가했다.
 
지위 자체만으로 친일 세력의 형성과 확대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 체제의 유지·강화에 협력해 조선사회에 심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일제의 작위를 반납하거나 거부한 사람들은 예외로 인정하는 조항이 있다는 점도 참작됐다. 
 
정부는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 회장과 관련된 모든 소송에 승소했다. 2013년 정부는 국가 귀속 절차까지 마친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땅 4만여㎡에 대해 이 회장이 제기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항소심 소송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승소했다. 이해승을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지정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재판과 서울 은평구 토지 12필지에 대한 소송에서도 정부가 이겼다. 
 
오히려 정부는 이 회장을 상대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번 돈 228억원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해 지난해 2월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재판부는 “개정 특별법에 따라 이해승은 친일반민족 행위자에 해당한다”며 “해당 토지도 일제의 식민지 토지정비 정책에 편승해 받은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 회장 측은 소송에 불복, 패소한 모든 사건을 상급법원에 상소했다.

최종 2건만 남아

지난 1일 법무부는 “2006년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결정으로 국고 귀속이 결정된 토지에 대한 소송 96건 중 94건이 상고심까지 확정됐고 2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라고 밝혔다. 이 2건은 모두 이 회장이 제기한 소송이다. 이 회장은 정부가 환수한 친일재산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행정소송 1건과 국가가 이 회장을 상대로 친일재산 처분으로 인한 부당이득을 반환하라며 낸 국가소송 1건이다.
 
이들 사건은 모두 연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선고될 전망이다. 법조계에서는 “현재 계류 중인 2건도 1·2심에서 정부 측 손을 들어줘 국고에 환수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친일재산 환수 현황

친일세력이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해 후손 등에게 넘긴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사업이 착수 10년 만인 올해 모두 마무리될 전망이다. 이 사업의 법적 근거가 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 환수에 관한 특별법’이 2005년 시행된 이후 정부 차원의 조사 활동을 거쳐 친일 재산을 되찾기 위한 소송까지 대부분 완료됐다.  
 
소송은 3가지 종류다. 친일파의 재산을 후손이 처분해 얻은 부당한 이득을 되돌려받기 위해 정부가 소송 원고로 참여하는 국가소송이 96건 중 16건을 차지한다.
 
정부가 친일 재산을 국고로 돌려놓은 데 대해 후손 등이 불복해 낸 행정소송이 71건, 국고 환수 작업의 위헌성을 따지려고 제기한 헌법소송이 9건이다. 확정된 소송 94건 중 정부는 91건에서 이겨 전체 승소율 97%를 기록했다.
 
사건 유형별 승소율은 국가소송 100%(15건), 행정소송 96%(70건 중 67건), 헌법소송 100%(9건) 등이다. 정부가 패소한 것은 행정소송 3건에 불과했다. 문제의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였는지가 불분명하거나 친일행위자로 지목한 인물이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인지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경우로 판단된다. <창>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