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⑮목숨을 구걸한 A급 전범들

재판정 서서 마지막까지 변명과 핑계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그는 자신이 독일, 이태리, 일본의 삼국동맹을 주도하고, 동남아시아 침략을 주도했으며, 진주만 습격을 명령한 전쟁 주범이면서도, 재판에서는 모든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당당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을 변명하는 일로 일관했다.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전쟁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으로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임자가 결정한 사항을 자신은 집행한 것뿐이라며, 모든 죄를 전임자에게 돌리고 선처를 호소했다.

명백한 거짓말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전임자가 결정한 사항을 자신은 집행만 했다는 진주만 공격도 사실은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1937년의 루거우차오(노구교 : 盧溝橋)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 침략을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게 철수를 요구하면서 군수물자 통제에 들어갔다.

특히 당시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은 인도네시아와 중동으로부터 일본으로 가는 석유 수송을 필리핀 해협에서 차단하며 일본에 압박을 가했다. 군수물자 확보가 절실해진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 아래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는 한편 미국과 교섭을 시작했다.

중국으로부터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미국의 주장과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일본의 입장으로 미·일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일본은 드디어 1941년 9월6일 어전회의를 열어 10월 초까지 미·일 교섭이 타결되지 않으면 미국을 공격 한다고 결의한다. 이 어전회의에서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은 굴복이라며, 차라리 미국과 전쟁을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당시의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였다.

그는 미·일 교섭의 진전이 없음에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가 10월 초가 되어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자 그를 사퇴시킬 것을 왕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후임 총리로 부임한 ‘도조 히데키’는 첫 어전회의에서 진주만 공격을 재차 결의했다.

‘대미 교전’을 결정한 어전회의 당시 총리는 ‘고노에 후미마로’였다 해도 대미 공격을 주장한 사람은 바로 당시의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였고, 고노에 후미마로를 대미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총리직에서 쫓아낸 사람도 바로 도조 히데키였다. 그리고 그 후임 총리가 되어 진주만 공격을 재차 의결한 사람도 바로 도조 히데키였다.

"명령 따랐을 뿐 살려달라" 눈물로 호소
모든 죄 전임자에 돌리고 국민 탓하기도


그럼에도 도조 히데키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재판관들이 일본 정치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자신은 전임자가 결정한 사항을 실행했을 뿐”이라며 새빨간 거짓말을 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도조 히데키는 한술 더 떠 “전쟁의 진짜 원인은 서구의 동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정책의 영향과 세계 적화를 꾀하는 공산당의 책동이었지, 결코 일본이 전쟁을 유발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더하여 “나의 정권 아래서 아시아 각국은 일본과 대등한 입장이었지, 결코 식민지거나 피 점령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원폭투하 등 승전국이 자행한 대량 학살에 대해 재판하지 않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며, 그 죄도 추궁하자고 호소했다. 중국과 일본의 전면 전쟁 계기가 됐던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과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 사건’ 등 대중 정책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 정책은 바로 직전의 정권에서 세운 계획으로 자신은 집행만 한 것이지, 자신이 정책을 계획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자신에게 돌아올 패전의 책임을 일본 정부와 국민의 탓으로 전가한 사실도 밝혀졌다.

항복 직후 쓴 수기에 “적의 위협에 겁먹고 손을 들어버리는 내각 지도자와 국민의 나약한 정신을 믿고 전쟁에 나선 것에 대해 개전 당시 책임자로서 깊은 후회를 느낀다”고 말하고 “신 폭탄(원자폭탄)에 움츠러들고 소련의 참전에 움찔해 무조건 항복하면, 국민의 전투 의지는 급속히 사그라진다. 이런 사태는 군을 지휘 통수하는 데 지대한 혼란을 일으켜 전투력을 저하시킨다”며 내각 결정에 반발했다.

이를 두고 ‘도조 히데키’ 연구가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패전을 두려워하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 추궁에 신경을 곤두세운 속마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처형되기 전에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라는 유언시를 남겼다.

이 또한 위선이 아닌가 한다. 처형되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제대로 자살도 못하고, 재판에서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삶을 구걸하던 그가,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에는 마치 의연히 죽는 듯이 유언시를 남기는 행동은 너무 위선이라고 생각된다. ‘도조 히데키’는 전형적인 소심한 인간이었다.

전세가 유리할 때는 무슨 배포가 대단한 사람인 양 확전에 확전을 주도해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고 하와이까지 공격을 강행하면서, 부하에게는 사무라이답게 죽으라며 ‘전진훈(前進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의 훈령을 내렸던 그가 관동군에 있으면서 침략한 중국 난징의 대학살에서 보듯이 점령지 민족들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포악했으나, 막상 패전하자 자신은 겁이 나서 죽지도 못하고, 재판에서는 살아보겠다고 선처를 호소하며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추태를 부렸던 것이다.

부끄러운 추태를 부린 것은 ‘도조 히데키’만이 아니다. 전쟁의 주범, 소위 말하는 A급 전범들은 재판받는 와중에서 서로를 탓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A급 전범 15명이 자신의 변호인 앞으로 제출한 자필진술서에 의하면 “이들 A급 전범들은 태평양전쟁은 스스로 지키려는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자신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쟁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언급하는 진술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책임회피

앞에서 말한 동부 헌병대 사령관 ‘오타니 게이지로’와 필리핀 전선을 지휘하던 ‘무토 아키라’의 추태 외에도, 봉천 특무기관장을 지내면서 그 많은 만주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도비하라 겐지(土肥原 賢二)’는 “전쟁이 부당하다며 작전을 거부하는 것은 분명히 반역자가 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하면서, 자신은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발뺌하며, 형벌을 낮추어 줄 것을 재판관 앞에서 실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이같이 자국민들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강요하며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는 치욕 대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라던 핵심 군국주의자들마저 자결하지 못하고 살아남아, 패전의 책임을 변명하고 전가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추태를 보인다면, 도대체 그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진정한 사무라이의 행동은 어떤 것이냐고 묻고 싶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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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폴 적색수배’<br> 황하나 근황 포착

[단독] ‘인터폴 적색수배’
황하나 근황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마약 투약 혐의로 인터폴 적색수배를 받은 황하나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지난해 1월31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황씨를 형사 입건했다. 앞서 황씨는 2023년 9월, 영화배우 고 이선균을 협박한 유흥업소 실장 김모씨 등과 함께 내사를 받아왔다. 지난해 2월 과천경찰서는 황하나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간이시약 검사 등을 통해 마약 투약 여부를 확인했다. 수사를 받던 황씨는 돌연 태국으로 출국했다. 실제로 황씨는 지난해 3월 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 태국에 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왔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마약과 성매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추가 혐의가 드러나자 태국에 있는 황씨를 검거하기 위해 인터폴 적색수배와 현지 영사 조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폴 적색수배 중인 황씨는 지난 1년 사이 캄보디아로 이동했다. 유튜브 채널 ‘크라임넷’을 운영하는 제보자 A씨에 따르면 현재 프놈펜 소재 한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한국인 남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태국으로 도주한 황씨는 자동차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는 현지인 N씨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N씨는 태국 상류층을 뜻하는 ‘하이소(High-Society)’로 분류되는 유명인사다. 황씨의 지인이자 한국에서 모델 활동을 했던 여성 Y씨는 “(자신과 함께) N씨가 클럽, 유흥업소 등에서 황씨와 파티를 즐겼다”고 알려왔다. 태국에서 상위 10% 미만에 속하는 재벌인 하이소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파티를 즐길 뿐더러, 전관예우 등에 따라 현지 경찰의 수사가 어려운 대상이다. 황씨가 N씨의 비호를 받아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왔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Y씨를 비롯한 다수의 제보자는 황씨가 태국, 캄보디아 등을 오가며 성매매, 마약 유통 등에 가담했다고 전했다. 황씨는 한국에 있던 Y씨 등을 불러 현지 남성과의 성매매를 유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 황씨는 과거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에이미(이윤지) 등 유명인들과 어울리며 여유로운 삶을 이어갔다. 현지 정보망에 따르면 황씨는 하이소들과 함께 했기에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하이소의 권력이 얼만큼인지 나타내는 실제 사례도 있다. 스포츠음료 ‘레드불’ 공동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의 뺑소니 사망사건이다. 오라윳은 2012년 9월 방콕 시내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하고 있던 경찰관을 치어 숨지게 한 후 도망쳤다. 그러나 경찰은 사고 후 스트레스로 술을 마셨다는 오라윳 측 주장을 인정하고 음주 운전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오라윳은 불기소됐고, 이후 마약 복용에 따른 처벌도 면했다. 경찰 추적 중에도 호화 생활 동남아 오가며 ‘환락 파티’ 2022년 현지 언론에 따르면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마약법 개정으로 만료됐다고 현지 검찰총장실 대변인이 밝혔다. 1979년 제정된 마약법을 보면 코카인 불법 복용자는 6개월~3년 징역에 처하고 공소시효는 10년이다. 오라윳의 공소시효는 그해 9월3일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 12월 발효된 새로운 마약법에 따르면, 코카인 복용은 징역 1년에 공소시효는 5년이다. 이에 따라 오라윳의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는 자동 기각됐다는 것이다. 오라윳은 이를 틈타 해외로 도주했다. 불기소 결정 뒤 반정부 집회가 열릴 만큼 반발은 심했다. 결국 총리 지시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검찰과 경찰의 조직적 비호가 있었다는 정황도 포착했다. 검·경은 뒤늦게 부주의한 운전에 의한 과실치사에 코카인 불법 복용 혐의도 추가했다. 하지만 오라윳의 행방은 묘연하다. 검찰은 경찰이 오라윳을 체포해 데려오기 전까지는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할 수 없다고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현재 오라윳에게 남은 혐의는 과실치사뿐이며 공소시효는 2027년 9월3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를 종합하면, 황씨는 동남아로 도주하기 전 마약을 투약한 것과 더불어 지인에게 마약을 권하기도 했다. 황씨의 지인 J씨는 취재진과 전화 통화에서 “황하나가 나에게 좋은 거 있는데 해볼래?”라며 팔에 주사로 된 약물을 주입했다. 그는 “좋은 거라길래 설마 했는데, 속이 울렁거리면서 구토를 하게 됐다”며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에 주사기들이 놓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J씨는 “마약을 투약한 것 같다”고 경찰에 자수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이어 황씨는 지난해 3월19일 취재진과 통화에서 “술은 왜 마셔요? 마약이 더 좋은데”라며 “왜 기자들은 내 기사만 쓰는지 모르겠다. 다른 약쟁이들도 많은데, 좀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황씨의 아버지 황재필씨는 “딸이 적색수배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카카오 메시지를 읽었지만, 묵묵부답이다. 태국 재벌 ‘하이소’ 조력 “나 잡아봐라” 수사망 피해 한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로 전환된 황하나에 대해 출국금지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고 말했다. 적색수배가 내려진 황씨가 이번에 귀국하게 되면, 앞으로 1년 이상 태국에 재입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이자, 동방신기 출신 박유천의 전 약혼녀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은 2018년 9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수차례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황씨는 2019년 11월 항소심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면서 석방됐다. 앞서 여러 차례 마약 투약으로 처벌받은 이력도 있다. 2015년 5~9월 자택 등에서 필로폰을 세 차례 투약했다. 2018년 4월에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처방 없이 사용한 혐의로 기소됐다. 집행유예 기간 중인 2021년 7월9일 재차 마약을 투약해 1심 판결로 추징금 40만원에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9년에 마약 투약죄로 선고받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동종범죄 재범에 이종범죄까지 저지른 대가로 가중처벌을 받은 것이다. 당시 마약 혐의와 함께 2020년 11월, 시가 500만원 상당의 명품 신발 등을 훔친 혐의도 받았다. 기소된 이후 세 차례 반성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2021년 10월28일 2심 판결서 검찰은 황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구형했다. 황씨는 최후 진술에서 “휴대전화도 없애고 시골로 내려가 열심히 살고 제가 할 수 있는 성취감 느끼는 일을 찾아 열심히 살아보겠다”면서 “지난 3~4년간 수면제나 마약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제가 너무 하찮게 다뤘고 죽음도 쉽게 생각하며 저를 막 대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변론했다. 그해 11월15일 2심 판결서 재판부는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년8개월을 선고했다. 추징금은 4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태국서 이동 이후 2023년 이선균 마약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황씨를 포함해 총 8명이 마약을 투약한 단서를 포착하고, 일부는 형사 입건해 내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당시 황씨는 내사자 신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내사 대상에 오른 인물 1명과 성명불상자 1명을 공갈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사실도 파악했다. 다수의 제보자들은 “황하나는 이선균이 협박당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이선균을 협박해 금품을 뜯은 전직 영화배우 박모씨와 유흥업소 여종업원 김씨의 협박 행각이 검찰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