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미군이 들쑤신' 동두천 가보니

기지촌 불은 꺼졌지만…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시기가 2020년대 중반 이후로 미뤄졌다. 사실상 무기한 연기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달 23일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이 같이 협의하고, 미2사단의 210화력여단을 동두천 캠프케이시에 잔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동두천 시민들은 반발했다. "60년을 참고 살았는데 더는 못 참겠다"며 "청와대 상경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별렀다. 5일 오후 미2사단 정문 앞에선 미군 잔류결정에 반대하는 '동두천시민 규탄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한국 정부의 약속 파기를 따져 물었다.

지난 4일 동두천시청 앞에는 20여명의 고교생이 모여 현장학습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났는지 자전거를 타고 시청 옆길을 지나가는 중학생도 있었다. 청사 정면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는 이 아이들에게 남겨줄 동두천시민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동두천 지원 없는 미군 잔류 절대 반대."

얼핏 반미구호를 연상케 하는 현수막은 청사뿐아니라 시내 한복판에도 버젓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현수막 하단에는 주로 보수시민단체의 명의가 적혀 있었다. 동두천시 안에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반미 아냐"

박용선 동두천시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회 사무장은 보산동 중심가로 기자를 안내했다. 박 사무장이 건넨 첫 마디는 "한 번 거리를 보세요. 사람이 없습니다"였다. 허울이 좋아 중심가였지 행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동두천시를 관통하는 지하철 1호선 보산역 앞 상점도 마찬가지였다. 1시간 남짓한 이른 저녁시간 동안 가게를 찾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인근 가게는 모두 셔터를 내리고 영업을 종료한 듯 했다.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면서 동두천시는 자연스레 기지촌 역할을 했다. 많은 상인은 미군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미군은 그들에게 일종의 전략적 동반자였다. 그렇게 63년을 살았다. 명암은 뚜렷했다. 경제적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졌고, 한편에선 늘 기지촌이란 오명에 짓눌려 살아야 했다.

박 사무장도 그랬다. 그는 "솔직히 어릴 때 (미군과 한국인이) 거리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부끄러웠다"며 "요즘은 현저히 줄었지만 그때는 크고 작은 미군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참고 살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시민들이 지금껏 동두천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것은 정부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2002년 LPP(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에 따라 2016년까지 동두천에 주둔하는 미군을 평택으로 완전 이주하기로 협의했다. 미군이 떠나고 남은 캠프는 지자체가 주도하는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생활·여가·교육시설 등으로 탈바꿈할 것이라 기대됐다.

그러나 시민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한미 양국은 지난달 23일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미2사단 210화력여단을 동두천 캠프케이시에 잔류시키기로 결정했다. 동두천시민들의 상실감은 컸다. 시가 사활을 걸고 추진한 도시개발계획은 삽도 떠보기 전에 중단됐다. 많은 시민들은 "미군이 주둔하는 한 동두천시는 영원히 밑지는 장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탄식했다. 왜일까.

전작권 전환 미루면서 미군 사실상 잔류
도시개발계획 수포…시민들 반발 최고조


박 사무장은 "동두천시의 절반 가까이를 미군이 쓰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무상 제공한 미군 공여지는 40.63㎢로 시 전체면적(95.68㎢)의 42%를 차지했다. 여기에 주민 대부분이 미군을 상대하는 자영업자인 것을 고려하면 미군이 활용하는 땅은 훨씬 넓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이 쓰고 있는 토지에 비해 경제 기여도가 낮다는 점이다. 박 사무장은 "한때 2만명 넘게 주둔하던 미군이 지금은 2000여명 수준으로 줄었다"며 "미군 1명당 1만평씩 깔고 앉아있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수치(2014년 기준 미군 규모는 약 4000여명으로 추산된다)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그만큼 시민들이 느끼는 체감은 상당했다.

클럽가의 원조나 다름없는 보산동 외국인 관광특구는 개점휴업 상태로 접어들었다. 오후 영업을 준비해야 할 클럽이나 주점 등은 적막했다. 호황을 누렸던 옷가게도 서너 곳만 명맥을 잇고 있었다. 보산역 개통과 함께 미군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분위기의 홍대나 이태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클럽가의 몰락은 주변 상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객관적인 지표라 할 수 있는 경기개발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난 60여년간 동두천시가 입은 경제적 피해액은 18조원으로 추산됐다. 또 매년 300억원대의 재산세 손실이 추정 집계됐다.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매년 430억원의 지방세와 연간 32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한종갑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장은 재향군인회 출신이다. 그는 "우리가 반미하자는 것도 아니고 희생에 상응하는 합당한 대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미군의 존재가 한때는 안보적인 불안을 해소했던 것도 맞다"며 "시 인구가 채 10만명도 안 되는데 인구 유입이 안 되는 것은 지역에 변변한 공장 하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 위원장은 그러면서 국방부로부터 받은 문서를 공개했다. 대책위가 9월26일 '동두천에 미군이 잔류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에 대한 답변이다. 10월13일 국방부는 "미2사단이 LPP에 따라 재배치되면 계획대로 평택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정부는 같은달 24일 SCM에서 LPP를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불과 9일 만에 자신들의 답변을 뒤집은 셈이다. 일부 언론은 미군 기관지 <성조>를 인용해 "우리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동두천 캠프케이시 잔류를 먼저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결과적으로 평택 기지로의 이전이 지연되면서 우리 정부가 부담하게 될 이자는 연간 84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한 위원장은 "기본적인 행정이라면 주민과 최소한 협의를 거치든가 그게 어려웠으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줬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 "평택의 경우는 '국가지원도시'로 지정돼 국고보조를 받고 있지만 동두천은 정부 지원 없이 미군 입만 쳐다보다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워했다.

경제는 파탄

기자가 방문한 당일 미2사단 정문 앞에선 1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박 사무장은 "집회 신고를 해도 경찰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제약이 많다"고 말했다. 1인 시위에 참석한 김성보 대한노인회 동두천시지회장은 "여건이 되는 한 계속 (시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시민 2000여명은 같은 곳에 모여 '동두천시민 규탄대회'를 열었다. 동두천시는 지금 폭풍전야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동두천시 범시민 궐기대회


지난 5일 미군 잔류에 반대하는 '동두천시민 규탄대회'가 미2사단 정문 앞에서 열렸다. 동두천시 미군 재배치 범시민대책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집회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약속을 뒤집은 박근혜정부를 강력 규탄했다. 이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잔류가 불가피하다면 평택에 준하는 지원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시민뿐 아니라 공무원도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오세창 동두천시장은 선두에서 집회를 독려했다. 오 시장은 "지난달 24일 정부는 동두천 미군기지 이전 약속을 깨고 아무 대책 없이 210여단을 남기겠다고 통보했다"며 "동두천을 폐허로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오 시장은 "반미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동두시민이 국방을 위해 희생한다면 그에 따른 최소한의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에는 경찰 추산 1200여명(주최측 추산 2000여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구호 제창을 하다 기습적으로 캠프 케이시 정문으로 행진을 시도했으며 이를 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지속된 대치는 오 시장이 흥분한 시민들을 설득하면서 마무리됐다. 이후 시위대는 예정대로 중앙시장 쪽으로 행진했다.

한편 경찰은 시위대 중 일부가 현행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사법처리할 방침을 밝혔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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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박희영 기자 =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고 경고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끝으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김 전 비대위원장을 만나 그가 제시하는 정국 진단 결과와 향후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들었다. 다음은 김 전 비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출범 100일을 넘긴 이재명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100일 동안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했다고 본다.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추석을 앞두고 지급된 2차 민생회복 소비쿠폰에 대한 의견은? ▲민생 경제가 굉장히 어렵고, 우리나라의 총수요가 낮아졌다. 한국은행이 진단한 올해 성장률도 0.9%밖에 안 된다. 쿠폰을 풀면, 약간의 소비 촉진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겉보기엔 훈훈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3500억달러 투자 펀드 조성 요구와 노동자 317명 추방 등 사태와 맞물려 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거졌다. ▲우리 경제 부처 장관들이 미국 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의 요구는 보증·대출을 거쳐 이행하면 될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근본적인 시각 차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되지 못했다. 그런데 국민에겐 마치 타결된 것 같은 인상을 줬다. 한 달도 안 돼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하는 미국의 MAGA 진영은 우리나라 일각의 부정선거론을 지지하면서 “한국이 공산주의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미국이 어떻게 위대한 나라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의 MAGA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와도 관계가 없다. “MAGA 진영이 우리 정치에 개입할 것”이란 믿음은 국내 보수 진영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검찰 해체를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한다. 민주당이 새로 구상하는 검찰 체계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