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말년에 체면 구긴 박희태 전 국회의장

만지긴 만졌는데 성희롱은 아니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전당대회 돈봉투’ 파문 장본인이자 새누리당 상임고문인 박희태(76) 전 국회의장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 골프장 캐디 A씨의 신체 부위를 수차례 만진 게 알려지면서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박 전 의장은 “손녀 같아서 귀엽단 표시는 했지만 정도를 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불렀다.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말년에 먹구름이 제대로 꼈다.
 
지난 11일 오전 10시께 강원도 원주의 한 골프장에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캐디 A씨의 신체를 함부로 만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다음날인 12일 해당 골프장 측은 “전날 오전 8시30분 박 전 국회의장을 포함한 남자 2명과 여자 2명이 라운딩을 시작했고 9번째 홀에서 라운딩을 함께하던 A씨가 캐디 마스터에게 교체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골프장 측은 9번째 홀에서 A씨를 다른 캐디로 교체했다. 골프장 측은 “교체 요청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데 따른 것으로 확인됐다”며 “자문변호사를 통해 A씨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덧붙였다.

“가슴 한번 
툭 찔렀을 뿐“
 
김 전 의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A씨의 동료들도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분개하는 상황이다. A씨의 동료 B씨는 “어제 ‘동료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골프장 전체에 퍼졌다”며 “제대로 된 경찰 조사가 이뤄져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년 전에 내가 모시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행실이 과히 좋지 않았다”며 “캐디 동료들 사이에서 기피 고객으로 소문이 났다”고 주장했다. 박 전 의장은 사건 당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날 밤 A씨를 다시 만나는 등 적극적으로 수습을 시도했지만, 이룬 것이 없었다고 전해졌다.
 

A씨는 성추행을 당한 다음날인 12일 오후 3시30분께 원주경찰서를 찾아 자신이 당한 피해신고를 접수했고, 피해자 진술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피해신고가 접수됨에 따라 박 전 의장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박 전 의장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였다. 경찰 관게자는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는 상관없다. 혐의를 입증할 만한 상당한 정황과 진술이 있다”고 말했다.
 
수사를 맡은 강원지방경찰청 성폭력특별수사대는 16일 박 전 의장을 피혐의자(피내사자) 신분으로 한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박 전 의장은 10일 이내에 출석해 조사를 받아야 하지만 경찰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경찰은 박 전 의장이 출석요구에 응할 때 까지 2차, 3차 출석 요구서를 추가로 발송할 계획이다. 경찰은 골프장 측 등 참고인 조사까지 완료한 상태다.
 
또 경찰은 박 전 의장의 소환조사 이후 정식 입건할 뜻을 내비쳤다. 지난해 6월부터 성범죄 친고죄 조항이 폐지되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와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해도 수사기관이 인지해 처벌에 나설 수 있게 된 점도 입건 가능성을 높게 하고 있다.
 
골프장 캐디 추태 일파만파
궁색한 해명에 비난의 화살 
 
지난 14일 새정치민주연합 전국여성위원회(위원장 남윤인순)는 성명을 통해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며 “세월호 사고와 국회 파행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집권여당의 상임고문은 골프나 치고, 성추행 사건까지 일으키고 있다. 집권여당의 정국 상황 인식 수준에 기가 막힌다”고 비판했다.
 
다음날 정의당 김제남 원내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이번 일이 수없이 반복돼온 새누리당 관련 인사들의 성폭력 사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4대악을 척결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선언이 무색할 정도로 정부·여당 관계자들의 성추문 파문이 연이어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뻔뻔한 해명
 
17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성명을 통해 “박희태는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 번 툭 찔렀다’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 ‘등허리나 팔뚝을 만진 것은 큰 문제가 없지 않나 싶다’고 하는 등 자신의 행위가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때 한 번만 싫은 표정을 지었으면 그랬겠냐. 전혀 그럼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나타낸 일이 없다’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박 전 의장을 비판했다.
 
또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그간 정치인은 자신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 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친밀감의 표시였다’고 발뺌하는 방식으로 대처해왔다. 또한 사건 처리과정에서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그 결과 유야무야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19일 새정치민주연합은 허영일 부대변인 ‘법은 만민 앞에 평등해야 한다’며 논평을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우발적 행동보다 골프 치면서 홀마다 성추행을 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님의 죄질이 더 무겁다”면서 “박희태 전 의장의 행적과 언행에는 증거인멸의 가능성도 농후하기 때문에 경찰은 박 의장에 대한 체포영장도 발부해야,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세월호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대해 법의 원칙적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경찰의 과잉의지와 정권 눈치보기에 일일이 대응하기에도 지친다”며 “개미지옥을 파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개미귀신을 보는 것 같다”고 힐난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사건 발생일부터 현재까지 박 전 의장의 성희롱 고소 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박 전 의장 캐디 성추행 논란은 부끄럽게도 외신을 탔다. 미국의 국제적인 골프뉴스 사이트 <골프뉴스넷>이 지난 14일 ‘한국 유명 정치인 여성 캐디 성추행 혐의’라는 제목으로 박 전 의장의 얼굴과 함께 성추행 소식을 올렸다고 외신전문사이트 <뉴스프로>가 18일 전했다. <골프뉴스넷>은 인터넷 뉴스와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미국에 2600만명, 해외에 수백만명의 네티즌들에게 서비스하는 사이트다. <골프뉴스넷>은 박 전 의장이 2012년 당권다툼에서 동료 당원들을 매수한 혐의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력도 덧붙였다.
 
박 “싫은 표정 아니었다” 
캐디 “홀마다 더듬었다”
 
박 전 의장은 2008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를 살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당시 전당대회 직전 김효재 전 정무수석 등을 통해 같은 당 고승덕 전 의원실에 300만원이 든 돈봉투를 제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또 1심과 2심에서 모두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박 전 의장은 이명박 정부 말기 특별사면을 받았다.
 
박 전 의장이 돈봉투를 뿌린 사실이 알려지게 된 건 고승덕 전 의원이 <서울경제>에 ‘로터리 칼럼’을 쓰면서부터였다. 그는 칼럼에서 “한번은 전당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필자에게 봉투가 배달됐다. 어느 후보가 보낸 것이었다. 상당한 돈이 담겨 있었다. 필자는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소신에 따라 봉투를 돌려보냈다. 필자는 어차피 그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 후보에게 투표했다.
 
문제는 그 후 벌어졌다. 당선된 후보가 필자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싸늘했다. 이상했다. 지지했는데 왜 그렇게 대할까. 정치 선배에게 물어보니 돈을 돌려보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며 “지금까지도 그 선배의 냉대는 계속되고 있다. 필자에게 죄가 있다면 당내선거에서 돈을 말없이 돌려주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몰랐던 점”이라며 한나라당 전당대회의 문제점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고 전 의원의 말은 여의도 정가에서는 대부분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한나라당 간판 바꾼
돈봉투 사건의 주범
 
박 전 의장은 2008년 한나라당 대표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2008년 친이계는 실제로 자신들을 대표할 인물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가 박 전 의원을 공식후보로 추대했고, 그해 전당대회에서 친이계의 지지를 받은 박 전 의장이 한나라당 대표로 당선됐다. 300만원 돈봉투를 전달한 김효재 전 정무수석은 박 전 의장이 당 대표가 되자, 당 대표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박 전 의장 돈봉투 사건은 당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혁신 작업에 매진하던 새누리당에게 엄청난 악재로 작용했다. 박 전 의장은 국회의장 신분으로 무당적 신분이었지만 새누리당에서 6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이를 두고 ‘친이계(친이명박) 죽이기’라는 당내 논란까지 겹치며 해묵은 친이-친박 계파갈등이 임계점으로 치달았었다.
 
때문에 새누리당은 이 사건을 즉각 검찰에 수사의뢰하는 등 박 전 의장의 ‘결자해지’를 바랐지만 통하지 않았다. 당시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박 전 의장은 “문제가 된 이 사건은 4년 전의 일이다.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 제기됐던 ‘국회의장 사퇴 요구’도 일축했다. 그저 총선불출마 입장만 밝혔던 것이다.
 
6선 의원에 국회의장

돈봉투 파문으로 망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당시 황우여 원내대표에게 “국회문제이므로 여야 원내대표들이 조속히 현명하게 처리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만큼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정치쇄신에 역행하는 모습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년 만에 새누리당은 박 전 의장을 상임고문으로 위촉하면서 당의 ‘어른’으로 모셨다. 정치쇄신 역행의 꼭지점을 찍었던 것. 이는 지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개정한 당헌·당규나 윤리강령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새누리당 당원규정 7조는 ‘공사를 막론하고 품행이 깨끗한 자’ ‘과거의 행적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지 아니하는 자’로 당원자격심사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공정경선 의무를 명시한 윤리강령 13조에는 “당직 또는 공직후보자 경선에 출마하는 자는 공정한 경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며”라며 “금품이나 향응을 주고받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행위 첫 머리로 올려놨다.
 
박 전 의장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3회 고등고시 법학과에 합격해 오랫동안 검사로 재직했다. 그는 1988년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에 영입돼 고향 남해군이 포함된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해 제13대 국회에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초선 때인 88년 12월부터는 당 대변인을 맡아 4년3개월간 직을 수행했다. 대변인 시절에 ‘정치 9단’ ‘총체적 난국’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등의 정치 조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93년에는 김영삼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으나, 이중국적을 가진 딸이 이화여대에 특례입학 혜택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돼 장관 취임 10일 만에 사퇴했다.
 
같은 해 말부터 94년 초 사이에는 당시 민주당 김원웅 의원이 여야의원 137명의 서명을 받아 반민법의 취지를 이어받은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밀려 무산된 바 있다. 당시 법사위원장이었던 김 전 의장이 완강히 심의를 거부해 아예 상정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 9단이…
순식간에 몰락
 
14, 15, 16, 17대 선거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국회 내 입지를 굳혀간 그는 17대 시절에는 국회부의장직도 수행했다. 5선을 기록한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중진의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8년 4월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공천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7월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정몽준 의원을 제치고, 한나라당 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후 경남 양산 재출마를 선언으로 당 대표직을 사퇴했다. 2009년 10월28일 양산 재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내세운 친노 후보 송인배에게 쫓기며 고전하다 3000여표 차(3만801표(38.1%), 송인배 2만7502표(34.1))로 가까스로 당선되면서 6선이라는 진기록을 세웠고, 당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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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