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일파만파 1심 판결 후폭풍

'한통속' 박근혜·이명박·원세훈 모두 살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대선의 열기가 대한민국을 달궜던 2012년 12월11일.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는 오피스텔의 문을 스스로 걸어 잠갔다. 김씨는 대선을 앞두고 인터넷에 정치댓글을 단 혐의를 받았다. 경찰은 서둘러 김씨의 혐의를 벗겨줬다. "대선 개입은 없었다"는 중간 수사 결과가 5일 뒤인 12월16일 밤 11시에 발표됐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려 640일이 걸린 수사는 1심 판결로 전환점을 맞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유죄를, 박근혜정부는 면죄부를 받았다.


"정치 관여는 했지만 선거 개입은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지만 위법성은 인식하지 못했다" 지난 11일 사법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내린 판결의 요지다.

국정원법 유죄
선거법은 무죄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및 국가정보원법(이하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세부적으로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앞서 원 전 원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됐다. 의혹의 핵심은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직원을 동원해 여당 대통령 후보에게 유리한 댓글을 작성했다는 내용이다.

문제가 된 댓글을 보면 특정 정치세력을 비난하고자 하는 인상이 강했다.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는 '뒈져야 할 사람' '문죄인'으로 비하됐다. 반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우호적인 문장이 쓰였다. 국정원의 댓글 활동으로 득을 보게 될 이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이른바 '댓글사건'은 현 정부의 정통성과 직결된 '태풍의 눈'으로 확대됐다. 만약 국가정보기관이 대선 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 여론을 조작한 사실이 인정된다면 박근혜정부가 입게 될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해 6월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현 정부의 대리격인 법무부와 갈등을 빚었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업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수사팀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채 총장은 원 전 원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징역 2년6월 집유 4년…선거법 위반 무죄
정부 한숨…채동욱 찍어내기 등 숱한 논란

그러나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거론하며 구속영장 청구 및 선거법 위반 적용에 반대의 뜻을 밝혔다. 법무부 입장에서 정권에 해가 되는 수사를 방관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힘겨루기를 하던 두 기관은 절충안을 만들었다. 구속영장 청구를 검찰이 포기하는 대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키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채 총장은 청와대 눈 밖에 났다는 게 정설이다. 채 총장은 원 전 원장 기소 후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혼외아들 보도로 낙마했다.

수사팀 안에서는 '항명 파동'이 일었다. 윤석열 당시 특별수사팀장은 국정원 대선개입수사 과정에서 상관과 법무부의 외압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결재권자였던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야당 도와 줄일 있느냐"는 말로 윤 팀장과 맞섰다고 전해진다. 문제의 사건으로 윤 팀장은 수사팀에서 배제된 후 좌천됐다. 조 지검장은 결백을 주장하며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박근혜 면죄부
반토막 난 검찰


검찰 안에서 나름 중립을 지키고자 애썼던 조 지검장의 사임, 특별수사팀 핵심 인물로 꼽힌 윤 팀장의 부재는 사건 공소유지에 어려움을 불러왔다. 재판이 시작되자 수사팀에 새로 투입된 검사들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사건을 검토할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수사팀이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출한 트위터 멘션(글) 및 리트윗의 증거능력을 둘러싸고도 공방이 가열됐다. 압수수색으로 국정원의 광범위한 사이버 활동을 입증한 것까진 좋았으나 정작 문제는 재판부를 설득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건의 꼬인 매듭을 풀 핵심 증인들은 출석을 거부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안이 가진 폭발력 때문에 심리는 1년 넘게 이어졌지만 권부의 핵심에는 접근조차 못했다.

지난 7월15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채동욱호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기소한 2013년 6월14일 이래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공판에서 검찰은 "국가정보기관이 일반 국민으로 가장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트위터를 대량으로 퍼뜨린 것은 인위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반헌법적인 행태"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검찰의 주장을 일부 인용해 원 전 원장이 국정원법 9조를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정치관여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며 "이는 국민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직접 개입한 것으로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행위로 죄가 무겁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인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무죄 판결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은 북한의 사이버 활동에 대한 대응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원 전 원장은 관련 댓글 활동 등에 대해 위법성을 인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과거부터 지속된 국정원 심리전단의 잘못된 업무 관행을 탈피하지 못하고 답습한 점 ▲특정 후보자를 당선 또는 낙선시키기 위해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이 참작됐다.

특히 재판부는 "보통의 선거운동이라면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특정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심리전단의 트위터 활동은 대선을 앞둔 11월에 감소했다"며 "선거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논란이 됐던 '전부서장 회의 발언(지시·강조 말씀)'에 대해선 "오히려 선거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지시한 사실만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원 전 원장은 선고를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진보 성향의 방청객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 전 원장이 법정을 빠져나간 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박주민 변호사와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 등은 기자들 앞에서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건 도둑질은 했지만 절도범은 아니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이 정치 관여는 했지만 선거법 위반은 하지 않았다는 판결은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원 전 원장은 2012년 4월 전부서장 회의 발언에서 "북한이 총선에서 야당(이) 되면 강성대국은 완성된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했어요. 우리 국정원은 잘못 싸우면 없어지는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법원은 원 전 원장의 발화 시점을 지목하며 후보자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인 데다 특정인을 위한 행위로 볼 수 없다고 짚었다.

도둑질 했지만
절도범 아니다

원 전 원장과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들 국정원 직원이 매달 원 전 원장으로부터 하달받은 이슈 및 논지에 따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비방한 점은 인정했다.

그렇지만 선거법 위반에 대해선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부는 "상명하복이 중시되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이 같은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범행의 위법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이유를 댔다.

이번 판결로 청와대는 마음의 짐을 덜었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대통령을 최대 수혜자로 꼽았다. 국정원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의심과 혹시 모를 정치공세를 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patriamea)에 "원세훈 개인은 처벌하되 정권의 정통성은 살려주는 판결"이라고 적었다.


현직 한 법원 관계자는 "정치적인 고려를 제외하고 판결문만 봤을 때 재판부의 논리를 납득할 만한 했다"고 평했다. 이 관계자는 "선거법은 국정원법과 입법 취지가 다르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다만 이 판결로 다른 선거사범들에게 선거법 위반을 어떻게 적용할지, 쉽게 인정한다면 차별적인 법해석으로 논란이 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스갯소리'라고 강조한 뒤 "중앙(서울중앙지법)인데다 공안사건인데 우리 식구도 승진해야 하지 않겠냐"며 "내가 검사라면 흥분할 상황"이라고 비꼬았다.

언론 안팎에서 제기된 강한 책임론, 자성론과 달리 검찰은 표정관리에 한창이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온 것에 담담해하는 눈치다. 이번 정부 들어 본의 아니게 라이벌로 부상한 국정원을 견제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대 수혜자' GH '숨은 수혜자' MB
사정 라이벌 검·국 나란히 표정관리
[여] 마지막 리스크 해결 
[야] 무너진 최후의 보루

판결 직후 검찰 일각에선 무리한 기소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사건을 진두지휘한 채 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현 수뇌부가 책임질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을 사실로 확인했고, 전직 국정원장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맡은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다.

올 초 검찰은 이른바 '국정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휘말리며 국정원에게 빚을 졌다. 앞서 국정원은 일부 공안라인의 견제가 있었지만 내부 평이 좋았던 채 총장을 넘어뜨린 '주범'이라는 의심을 샀다. 때문에 이번 판결로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수장을 찍어낸 국정원에게 '모종의 복수'를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항소 과정에서 국정원법 위반에 대한 공소유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국정원은 잃은 게 많은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혐의를 떠나 그간 국정원이 수행해온 대북·방첩활동이 잘못됐음을 수차례 지적했다. 원 전 원장의 양형 감경 사유로는 '국정원의 잘못된 업무 관행'이 언급됐다.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사이버 활동이 이전보다 위축됐을지언정 북한과 연관된 활동을 사실상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범죄 사실을 "정부의 정책기조에 반대하는 특정 정당 및 정치인을 비판한 행위"로 한정했다.

때문에 국가 안보라는 이유를 붙이면 언제든 유사행위가 반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다음 대선 과정에서 똑같은 수위의 댓글이 달려도 선거 개입이 아니라는 선례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번 판결의 숨은 수혜자로 꼽힌다. 원 전 원장이 본인의 직무 범의로 제한된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권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배후로 주장했지만 재판부가 대선개입 의혹을 부정하면서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됐다.

날개 단 여당
벼랑 끝 야당

여당은 반색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정권 차원의 리스크를 덜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세월호 특별법'을 제외하고 여당에 불리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형 이슈가 전무하다. 이제 여당은 여론 굳히기에 들어간 모양이다.

지난 12일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은 "판결을 비난하는 것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며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고 집요하게 주장해왔던 사람들, 또 이걸 갖고 입지를 키워온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고 힐난했다.

야당은 벼랑 끝에 몰렸다. 무려 600일 넘게 공들인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 규명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정국을 타개할 마땅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다. 지지세를 결집할 동력도 정부를 압박할 최후의 보루도 모두 잃었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판결 다음날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렇게 한다면 앞으로 공무원들이 특정 후보를 당선·낙선시키기 위해 비난글을 여기저기 퍼 나르고 악의적으로 유포해도 어떻게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겠냐"고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산 권력'은 어느 누구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죽은 권력'인 원 전 원장만 지루한 법정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 별건의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항소심에서 징역 1년2월을 선고받은 원 전 원장은 지난 9일 형기만료로 출소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법정에 섰다.

하지만 원 전 원장은 이번 판결로 재수감될 처지를 면했다. 따지고 보면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자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됐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세훈 선거법 무죄' 이범균 부장판사는?

이범균(50·사법연수원 21기) 부장판사는 서울 출신으로 1995년 부산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양승태 당시 대법관(현 대법원장)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판결 업무만 맡았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부임한 후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다뤘다. 그가 속한 형사21부는 선거법과 부정부패 사건 전담부로 알려져 있다. 이 부장판사는 올 초 이른바 '공무원 간첩 사건'을 심리했는데 당시 그는 간첩 혐의를 받은 유우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보수 각 진영 입장에선 한 번씩 유리한 판결이 나온 셈이다.

때문에 복수 언론은 법원 내부 관계자를 인용, 이 부장판사가 정치 중립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고를 둘러싸고 법원 내에선 큰 소란이 일었다. 이유인 즉 이 부장판사가 법리를 어기고 정치적인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5기)는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그는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판결은 '지록위마(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름)'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김 부장판사는 "집행유예 선고 후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정독했다"며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정말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또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며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 이것은 궤변이다"고 일갈했다.

더불어 김 부장판사는 "이 판결은 정의를 위한 판결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인가.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파문이 커지자 대법원은 직권으로 김 부장판사의 글을 삭제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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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 오세훈 한강버스, 아라호 흑역사 오버랩

1000억 오세훈 한강버스, 아라호 흑역사 오버랩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시가 돛을 올린 한강버스가 고장 끝에 결국 멈췄다. 과거 ‘아라호 사업’도 재조명되고 있다. 아라호 사업은 2010년대 초반 경인 아라뱃길을 중심으로 관광 활성화와 교통난 해소를 위해 인천시와 공동으로 수백억원을 들여 기획한 수상 교통 프로젝트였다. 아라호는 시민들의 외면과 운영 적자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반면교사’로 삼았던 걸까? 서울시는 한강을 따라 운행되는 수상 교통수단으로, 서울 전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으로 지난 18일 한강버스 운항을 시작했다. 여의도, 잠실, 뚝섬 등 주요 한강변 거점과 지하철역을 연계해 시민과 관광객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게 핵심이다. 관광이냐 출퇴근이냐 서울시는 한강버스를 통해 관광 교통수단을 넘어 서울을 ‘한강 중심의 스마트 모빌리티 도시’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식 운항을 시작한 지 열흘 만에 운항이 중단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9일 오전 시청에서 열린 주택 공급 대책 관련 브리핑 도중 “한강버스 관련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며 “시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열흘 정도 운행 통해 기계적·전기적 결함이 몇 번 발생하다 보니 시민들 사이에서 약간 불안감 생긴 것도 사실”이라며 “이번 기회에 (운항을) 중단하고 충분히 안정화시킬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시는 이날부터 10월 말까지 한강버스 시민 탑승을 중단하고 성능 고도화와 안정화를 위한 무승객 시범 운항을 한다. 시는 국내 최초로 한강에 친환경 선박 한강버스를 도입해 지난 18일 정식 운항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22일에는 잠실행 한강버스가 운항 중 방향타 고장이 발생했고, 같은 날 마곡행도 운항 준비 중 전기 계통에 문제가 생겨 결항했다. 26일에도 운항 중 방향타 고장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운항 중단과 재개가 반복되자 운항 중단을 결정했다. 과거 아라호의 값비싼 교훈을 남겼지만, 실패 요인을 분석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결과다. 한강버스 역시 또 하나의 혈세 낭비 사례가 될 수 있다. 서울시 한 관계자는 “아라호 사례를 철저히 분석해 이번에는 실질적인 시민 편익을 제공하고 지속 가능한 운영 모델을 구축하겠다”고 강조했다. 한강버스가 서울의 새로운 교통 패러다임으로 자릴 잡을지, 아라호의 전철을 밟을지는 향후 몇 년간의 운영 성과에 달려 있다. 서울시 아라호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첫 임기 때인 2010년 서울시가 예산 112억원을 들여 만든 2층 유람선으로 지난 2009년 5월부터 1년5개월을 들여 건조됐다. 오 시장의 지시로 건조된 아라호는 시민들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연과 한강특화공원 관람이 동시에 가능한 선상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한다는 영리 목적보다 공공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민자 유치 대신 재정이 투입된 사업이었다. 당초 아라호를 한강에서 인천 앞바다까지 운항하는 관광 크루즈선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여덟 차례 시범 운항과 21회 시험 운항만 했을 뿐 사실상 사업은 중단됐다. 제작 당시부터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논란을 빚었던 아라호는 정식 취항도 해보지 못한 채 팔렸다. 실제 운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보험료와 유지비 등 관리 비용에만 연간 1억원이 들어간다는 점도 매각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112억원 들여 29억원에 판 아라호 출항 나흘 만에 고장…오, 좌불안석 아라호가 정식 운항에 나서지 못했던 배경에는 서해뱃길 사업을 둘러싼 서울시와 시의회의 갈등도 있었다. 오 시장의 아라호 활용 계획에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다수인 시의회가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10월 고 박원순 전 시장이 취임 후 사업 타당성 문제로 매각을 결정하면서 오 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이 백지화됐다. 결국 서울시는 아라호 매각을 결정한 후 지난 2013년 5월, 106억원의 예정 가격으로 매각 입찰에 나섰으나 응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이후 2차 입찰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알만한 이들은 알겠지만, 선박 사업은 수요를 찾기 어려운 사업 중 하나다. 결국 서울시는 3차 매각 입찰에서 최초 예정 가격에서 10% 인하된 95억원으로 깎았지만 이마저도 입찰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같은 해 11월, 4차 매각에서 15% 인하된 90억원에 입찰을 시도했지만 응찰자가 없어 가격 인하의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 서울시는 지난 2016년 아라호를 매각하지 못하자 결국 임대 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아라호가 정식 운항도 못한 채 6년 넘게 여의도 한강공원 선착장에 방치되면서다. 서울시가 제시한 사업 기간은 연말까지 8개월이고 한 차례 1년간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다. 당시 최저 임대료는 2억6300만원이었다. 아라호는 임대 사업을 시작해 건조 6년 만에 빛을 봤지만, 운항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강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던 아라호는 지난 2016년 민간업체인 레츠고코리아가 임대사업권을 낙찰받아 3년간 운영하다가 2018년 이랜드그룹 계열사 이랜드크루즈로 사업권을 넘겨줬다. 이랜드크루즈가 사업권을 따낸 시점은 지난 2018년 3월이지만 실제 운영은 2019년 6월부터 시작됐다. 이전 사업자인 레츠고코리아가 서울시의 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유람선과 시설물 반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랜드크루즈는 1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지난 2019년 6월부터 운영을 시작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수익성 악화로 아라호의 임대 운영 사업을 1년 만에 접어야 했다. 애물단지 전락하나 이랜드크루즈는 임대계약 갱신청구권(1년)마저 포기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무렵부터는 주식회사 수가 임대사업권을 이어받았다. 이후 마지막으로 인더라인25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사업하는 조건으로 서울시와 지난 2022년 12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1년 단기 임대계약이 종료된 이후에도 인더라인25가 철거하지 않아 서울시는 골머리를 앓았다. 아라호 운항은 멈췄지만, 선착장을 한 달째 무단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더라인25는 계약 연장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서울시는 인더라인25를 상대로 명도소송, 점유 이전 금지 가처분, 행정 가처분 등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아라호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수요 예측 실패와 운영비 부담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아라호가 연간 수십만명의 승객을 유치할 수 있다고 예상했으나, 실제 이용객은 예측치의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 노선 설계가 시민들의 일상적인 통근이나 이동과 잘 맞지 않았고, 요금 역시 육상 교통수단에 비해 비쌌다. 결과적으로 관광객 유치에도 한계가 있었고,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아라호는 철수될 수밖에 없었다. 아라호는 건조한 지 15년 만에 민간에 팔렸다. 지난 1월 서울시 한강 유람선 아라호는 5차례 입찰 끝에 약 28억5780만원에 팔려 민간업체에 인도됐다. 2013년부터 총 9번의 입찰을 시도한 결과 3분의 1 가격에 달하는 헐값에 팔린 셈이다. 당시 서울시에 따르면 아라호는 2024년 11월 말 공개입찰을 진행한 뒤 지난달 주식회사 마이랜드와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 길이 58m에 688톤 규모의 아라호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과 서강대교 남단을 오갔다. 승객은 총 310명까지 태울 수 있다. 음악회, 공연, 결혼식, 영화 상영을 위한 시설도 보유했다. 선착장에는 편의점, 치킨집 등 부대시설도 있었다. 아라호는 건조 후 15년 만에 매각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후임 고 박원순 시장이 2012년 사업을 백지화하면서 5년간 방치됐다. 2013년 5월 처음으로 공개입찰에 넘겨졌다. 시는 같은 해에만 총 4번의 입찰을 추진했으나, 입찰자가 없어 매번 무산됐다. 실패했지만 이번엔 달라? 서울시는 수의계약 방식으로도 매각을 시도했으나, 매각사의 자금 동원 문제로 불발됐다. 이에 시는 2016년 아라호를 매각하는 대신 민간 위탁하는 방향을 택했고, 2017년부터 민간 위탁을 통해 운영했다. 하지만 임대계약이 만료되면서 지난해 5월 말부터 운항이 중단됐다. 그러자 시는 다시 매각을 시도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총 5차례의 입찰을 진행했고, 같은 해 11월 말 입찰자가 나와 12월 매각 계약을 맺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그간 아라호의 위탁 운영은 선박 운항이 아닌 선착장 내 치킨집 등 부대시설 위주로 돌아갔다”며 “자연스레 선박도 노후화되고, 전반적으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다시 매각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법적 분쟁으로 얼룩진 아라호를 통해 한강에 배 띄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지만, 이번엔 다르다고 한다. 서울시는 이번 한강버스 사업에서 아라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3가지 전략적 과제를 내세우고 있다. 먼저, 실제 수요 기반의 노선 설계를 강조했다. 또 관광 중심이 아닌, 출퇴근·생활 교통을 고려한 정류장 배치, 그리고 지하철·버스 환승과의 연계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요금 체계를 내세우기도 했다. 기존 대중교통과의 환승 할인을 적용하고, 관광·레저용 프리미엄 서비스와 생활 교통 요금제의 이원화를 강조했다. 또 탄소 배출을 최소화한 전기·수소 하이브리드 선박을 도입했고, 실시간 교통 정보 제공 및 안전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서울시가 한강버스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난해 들인 초기 사업비는 약 542억원으로 향후 발생할 총 사업비는 약 1500억~1750억원으로 예상된다. 아라호 사업비보다 10배가량 많은 혈세가 투입될 예정이다. 한강버스는 출·퇴근용 선박인 만큼 이용객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척의 선박이 필요하다. 지난해 3월 한강버스 운영사는 6척의 선박을 납품받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현재는 첫 출항 이후 3척이 운항 중이며, 향후 6척의 선박이 모두 납품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도 선착장 시설, 운영 시스템, 접근성 개선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가 포함돼 총사업비가 1000억원대 중반까지 증가한다. 묻지 마 10배로 베팅 6시에 나와야 9시 출근 아라호는 ‘유람선 제작’이 중심이고, 공연시설 등이 포함된 문화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의 선박이었다. 시설 설계가 크고 복잡한 부분이 있지만, 수량이 하나라 규모 면에서 제한적이기에 한강버스와 다르다는 결론이다. 반면, 한강버스는 여러 척의 선박을 건조해야 하고, 선착장 설치 또는 보수도 그만큼 갖춰져야 한다. 또 전기 또는 하이브리드 선박을 도입한 만큼, 유지비용도 클 뿐만 아니라 홍보, 안전, 시험 운항 등 여타 부대 비용에 민간투자금 및 보조금 등이 혼합돼있어 사업비 증액은 여러 원인으로 발생한다. 한강버스 사업비가 초기 대비 크게 증가한 이유로 업체 선정 과정에서 계약 조건, 예상보다 오래 걸린 공정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를테면 선박 제작 능력이 있는 업체와 없는 업체 간의 차이를 분석했는데, 일부 업체는 인프라가 부족하거나 준비가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아 계약이 무산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강버스는 대중교통 기능이 강조되면서 ‘출퇴근 수단’ ‘교통망 보완’ 등의 역할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초기 투자비가 크더라도 지속 운영을 통한 수요 확보가 전제된다. 하지만 계획 대비 수요가 예상만큼 확보될지, 운영비와 적자 보전 부담이 얼마나 될지는 논란 중이다. 한편, 한강버스는 정식 운항 나흘 만에 선박의 방향타 고장 등으로 잇따라 멈춰 승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지난 23일 기준 누적 탑승객이 1만명을 돌파하는 등 시민들의 큰 관심을 받은 한강버스가 정시성 확보가 중요한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 매체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7시쯤 옥수선착장을 출발한 잠실행 한강버스가 강 한가운데서 20여분간 멈춰섰다. 결국 승객들은 종착지까지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 내려야 했다. 한강버스 운영사는 고장 선박을 뚝섬 선착장에 접안한 뒤 승객들을 모두 하선시켰고, 뚝섬에서 잠실까지 구간의 운항을 취소했다. 지난 18일 정식 운항을 시작한 지 나흘 만에 발생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안내 방송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탑승객은 “20분이 넘게 서 있었고, 안내 방송이 안 나오고 승무원도 안 계시고…. (뚝섬 선착장) 도착하기 2~3분 전에 승무원이 ‘이 배 잠실까지 안 간다’고 뚝섬에 다 내리셔야 된다고…”라고 말했다. 이 사고와 별개로 같은 날 오후 7시30분에 잠실 선착장을 출발할 예정이었던 마곡행 한강버스는 선박 고장으로 아예 결항됐다. 그 바람에 강서 방향으로 이동하려던 시민들은 황급히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다. 승부수? 무리수? 서울시는 두 선박 모두 전날 밤 안정화 조치를 거쳐 다음 날인 23일 운항에는 차질이 없다고 밝혔다. 또 선내 안내 방송이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선 한강버스 운영사가 이상을 감지한 뒤 원인을 파악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려 안내에 일부 지연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현재 한강버스는 마곡-망원-여의도-압구정-옥수-뚝섬-잠실 28.9km 구간을 상하행 7회씩 총 14회(첫차 11시) 운항하고 있다. 소요 시간은 마곡에서 잠실까지 127분이다. 여의도에서 잠실까지는 80분이다. 추석 연휴 이후인 다음 달 10일부터는 출퇴근 시간 급행 노선(15분 간격)을 포함, 평일 기준 왕복 30회로 증편한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