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일파만파 1심 판결 후폭풍

'한통속' 박근혜·이명박·원세훈 모두 살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대선의 열기가 대한민국을 달궜던 2012년 12월11일.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는 오피스텔의 문을 스스로 걸어 잠갔다. 김씨는 대선을 앞두고 인터넷에 정치댓글을 단 혐의를 받았다. 경찰은 서둘러 김씨의 혐의를 벗겨줬다. "대선 개입은 없었다"는 중간 수사 결과가 5일 뒤인 12월16일 밤 11시에 발표됐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무려 640일이 걸린 수사는 1심 판결로 전환점을 맞았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유죄를, 박근혜정부는 면죄부를 받았다.


"정치 관여는 했지만 선거 개입은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지만 위법성은 인식하지 못했다" 지난 11일 사법부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내린 판결의 요지다.

국정원법 유죄
선거법은 무죄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및 국가정보원법(이하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세부적으로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앞서 원 전 원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됐다. 의혹의 핵심은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직원을 동원해 여당 대통령 후보에게 유리한 댓글을 작성했다는 내용이다.

문제가 된 댓글을 보면 특정 정치세력을 비난하고자 하는 인상이 강했다.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는 '뒈져야 할 사람' '문죄인'으로 비하됐다. 반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우호적인 문장이 쓰였다. 국정원의 댓글 활동으로 득을 보게 될 이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이른바 '댓글사건'은 현 정부의 정통성과 직결된 '태풍의 눈'으로 확대됐다. 만약 국가정보기관이 대선 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 여론을 조작한 사실이 인정된다면 박근혜정부가 입게 될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해 6월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현 정부의 대리격인 법무부와 갈등을 빚었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업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수사팀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채 총장은 원 전 원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징역 2년6월 집유 4년…선거법 위반 무죄
정부 한숨…채동욱 찍어내기 등 숱한 논란

그러나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거론하며 구속영장 청구 및 선거법 위반 적용에 반대의 뜻을 밝혔다. 법무부 입장에서 정권에 해가 되는 수사를 방관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힘겨루기를 하던 두 기관은 절충안을 만들었다. 구속영장 청구를 검찰이 포기하는 대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키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채 총장은 청와대 눈 밖에 났다는 게 정설이다. 채 총장은 원 전 원장 기소 후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혼외아들 보도로 낙마했다.

수사팀 안에서는 '항명 파동'이 일었다. 윤석열 당시 특별수사팀장은 국정원 대선개입수사 과정에서 상관과 법무부의 외압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결재권자였던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야당 도와 줄일 있느냐"는 말로 윤 팀장과 맞섰다고 전해진다. 문제의 사건으로 윤 팀장은 수사팀에서 배제된 후 좌천됐다. 조 지검장은 결백을 주장하며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박근혜 면죄부
반토막 난 검찰


검찰 안에서 나름 중립을 지키고자 애썼던 조 지검장의 사임, 특별수사팀 핵심 인물로 꼽힌 윤 팀장의 부재는 사건 공소유지에 어려움을 불러왔다. 재판이 시작되자 수사팀에 새로 투입된 검사들은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사건을 검토할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수사팀이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출한 트위터 멘션(글) 및 리트윗의 증거능력을 둘러싸고도 공방이 가열됐다. 압수수색으로 국정원의 광범위한 사이버 활동을 입증한 것까진 좋았으나 정작 문제는 재판부를 설득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는 점이다. 사건의 꼬인 매듭을 풀 핵심 증인들은 출석을 거부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안이 가진 폭발력 때문에 심리는 1년 넘게 이어졌지만 권부의 핵심에는 접근조차 못했다.

지난 7월15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과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채동욱호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기소한 2013년 6월14일 이래 11개월 만의 일이었다. 공판에서 검찰은 "국가정보기관이 일반 국민으로 가장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트위터를 대량으로 퍼뜨린 것은 인위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는 반헌법적인 행태"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검찰의 주장을 일부 인용해 원 전 원장이 국정원법 9조를 위반했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이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에게 정치관여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며 "이는 국민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직접 개입한 것으로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행위로 죄가 무겁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인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무죄 판결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은 북한의 사이버 활동에 대한 대응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원 전 원장은 관련 댓글 활동 등에 대해 위법성을 인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과거부터 지속된 국정원 심리전단의 잘못된 업무 관행을 탈피하지 못하고 답습한 점 ▲특정 후보자를 당선 또는 낙선시키기 위해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이 참작됐다.

특히 재판부는 "보통의 선거운동이라면 선거일에 가까워질수록 (특정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심리전단의 트위터 활동은 대선을 앞둔 11월에 감소했다"며 "선거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논란이 됐던 '전부서장 회의 발언(지시·강조 말씀)'에 대해선 "오히려 선거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지시한 사실만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원 전 원장은 선고를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떨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진보 성향의 방청객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 전 원장이 법정을 빠져나간 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박주민 변호사와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 등은 기자들 앞에서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건 도둑질은 했지만 절도범은 아니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이 정치 관여는 했지만 선거법 위반은 하지 않았다는 판결은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원 전 원장은 2012년 4월 전부서장 회의 발언에서 "북한이 총선에서 야당(이) 되면 강성대국은 완성된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했어요. 우리 국정원은 잘못 싸우면 없어지는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법원은 원 전 원장의 발화 시점을 지목하며 후보자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상황인 데다 특정인을 위한 행위로 볼 수 없다고 짚었다.

도둑질 했지만
절도범 아니다

원 전 원장과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들 국정원 직원이 매달 원 전 원장으로부터 하달받은 이슈 및 논지에 따라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비방한 점은 인정했다.

그렇지만 선거법 위반에 대해선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부는 "상명하복이 중시되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이 같은 지시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범행의 위법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이유를 댔다.

이번 판결로 청와대는 마음의 짐을 덜었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대통령을 최대 수혜자로 꼽았다. 국정원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의심과 혹시 모를 정치공세를 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patriamea)에 "원세훈 개인은 처벌하되 정권의 정통성은 살려주는 판결"이라고 적었다.


현직 한 법원 관계자는 "정치적인 고려를 제외하고 판결문만 봤을 때 재판부의 논리를 납득할 만한 했다"고 평했다. 이 관계자는 "선거법은 국정원법과 입법 취지가 다르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다만 이 판결로 다른 선거사범들에게 선거법 위반을 어떻게 적용할지, 쉽게 인정한다면 차별적인 법해석으로 논란이 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스갯소리'라고 강조한 뒤 "중앙(서울중앙지법)인데다 공안사건인데 우리 식구도 승진해야 하지 않겠냐"며 "내가 검사라면 흥분할 상황"이라고 비꼬았다.

언론 안팎에서 제기된 강한 책임론, 자성론과 달리 검찰은 표정관리에 한창이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온 것에 담담해하는 눈치다. 이번 정부 들어 본의 아니게 라이벌로 부상한 국정원을 견제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대 수혜자' GH '숨은 수혜자' MB
사정 라이벌 검·국 나란히 표정관리
[여] 마지막 리스크 해결 
[야] 무너진 최후의 보루

판결 직후 검찰 일각에선 무리한 기소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사건을 진두지휘한 채 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현 수뇌부가 책임질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을 사실로 확인했고, 전직 국정원장의 유죄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맡은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다.

올 초 검찰은 이른바 '국정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휘말리며 국정원에게 빚을 졌다. 앞서 국정원은 일부 공안라인의 견제가 있었지만 내부 평이 좋았던 채 총장을 넘어뜨린 '주범'이라는 의심을 샀다. 때문에 이번 판결로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수장을 찍어낸 국정원에게 '모종의 복수'를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항소 과정에서 국정원법 위반에 대한 공소유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국정원은 잃은 게 많은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혐의를 떠나 그간 국정원이 수행해온 대북·방첩활동이 잘못됐음을 수차례 지적했다. 원 전 원장의 양형 감경 사유로는 '국정원의 잘못된 업무 관행'이 언급됐다.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사이버 활동이 이전보다 위축됐을지언정 북한과 연관된 활동을 사실상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재판부는 원 전 원장의 범죄 사실을 "정부의 정책기조에 반대하는 특정 정당 및 정치인을 비판한 행위"로 한정했다.

때문에 국가 안보라는 이유를 붙이면 언제든 유사행위가 반복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다음 대선 과정에서 똑같은 수위의 댓글이 달려도 선거 개입이 아니라는 선례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번 판결의 숨은 수혜자로 꼽힌다. 원 전 원장이 본인의 직무 범의로 제한된 국정원법 위반에 대해서만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권 일각에선 이 전 대통령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배후로 주장했지만 재판부가 대선개입 의혹을 부정하면서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됐다.

날개 단 여당
벼랑 끝 야당

여당은 반색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정권 차원의 리스크를 덜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세월호 특별법'을 제외하고 여당에 불리한 것으로 평가되는 대형 이슈가 전무하다. 이제 여당은 여론 굳히기에 들어간 모양이다.

지난 12일 새누리당 주호영 의원은 "판결을 비난하는 것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며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고 집요하게 주장해왔던 사람들, 또 이걸 갖고 입지를 키워온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고 힐난했다.

야당은 벼랑 끝에 몰렸다. 무려 600일 넘게 공들인 국정원 대선개입 진상 규명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정국을 타개할 마땅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다. 지지세를 결집할 동력도 정부를 압박할 최후의 보루도 모두 잃었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판결 다음날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렇게 한다면 앞으로 공무원들이 특정 후보를 당선·낙선시키기 위해 비난글을 여기저기 퍼 나르고 악의적으로 유포해도 어떻게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겠냐"고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산 권력'은 어느 누구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죽은 권력'인 원 전 원장만 지루한 법정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 별건의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항소심에서 징역 1년2월을 선고받은 원 전 원장은 지난 9일 형기만료로 출소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법정에 섰다.

하지만 원 전 원장은 이번 판결로 재수감될 처지를 면했다. 따지고 보면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자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됐다.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세훈 선거법 무죄' 이범균 부장판사는?

이범균(50·사법연수원 21기) 부장판사는 서울 출신으로 1995년 부산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양승태 당시 대법관(현 대법원장)의 전속 재판연구관을 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판결 업무만 맡았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부임한 후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다뤘다. 그가 속한 형사21부는 선거법과 부정부패 사건 전담부로 알려져 있다. 이 부장판사는 올 초 이른바 '공무원 간첩 사건'을 심리했는데 당시 그는 간첩 혐의를 받은 유우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진보·보수 각 진영 입장에선 한 번씩 유리한 판결이 나온 셈이다.

때문에 복수 언론은 법원 내부 관계자를 인용, 이 부장판사가 정치 중립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고를 둘러싸고 법원 내에선 큰 소란이 일었다. 이유인 즉 이 부장판사가 법리를 어기고 정치적인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5기)는 법원 내부 게시판 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그는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판결은 '지록위마(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름)'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김 부장판사는 "집행유예 선고 후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정독했다"며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정말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또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며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 이것은 궤변이다"고 일갈했다.

더불어 김 부장판사는 "이 판결은 정의를 위한 판결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인가.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파문이 커지자 대법원은 직권으로 김 부장판사의 글을 삭제했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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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