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알면 넘어갈' 군내 가혹행위 백태

무시무시한 후임병 괴롭히기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윤 일병 사망사건의 충격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국방부를 비롯한 군 당국은 사건을 은폐하려다 거센 후폭풍에 직면했다. 스물셋 윤모 일병은 선임병들의 가혹행위와 구타로 끝내 숨졌다. 가해자 이모(26) 병장 등 병사 4명은 상식을 초월한 괴롭힘으로 윤 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사건의 진상 규명과 함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또 다른 윤 일병을 '폭력'이라는 악마로부터 구하는 일이다. 24시간 365일 폐쇄된 그곳에서는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인격 살인'이 자행되고 있다. 같은 인간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범죄 행위가 선량한 병사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직업군인을 아버지로 둔 한 언론계 관계자는 "과거 아버지가 근무했던 부대 인근에서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병사를 창고에 가뒀고, 창고 안에서 병사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굶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섬뜩한 얘기였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증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부대 지휘관이 사체를 포함한 현장 증거를 없앴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군대에서 죽으면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가 쉽지 않았다. 현장 보존은 엉망이었고, 수사권이 있는 군 간부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데 급급했다.

위 사건으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군 복무 중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병사는 많이 줄었다는 게 당국의 시각이다. 유족들을 중심으로 군 의문사 의혹을 제기하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왔다.

착각이었다. 군내 가혹행위는 창군 이래 근절된 적 없었다. 3일에 한 번 꼴로 병사가 죽어나갔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군대 부적응'이라는 핑계로 은폐됐다.

윤 일병 사망사건의 충격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이번에도 군 당국은 평소처럼 사건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윤 일병의 시신은 가혹행위를 은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온몸에 멍이 들고 고문을 당한 것처럼 흉터가 진했다. 실제로 윤 일병은 가해자 이모 병장 등 동료 병사들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지금도 군대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윤 일병이 도움을 청하고 있다. 선임병들의 구타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발생한다. 대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동료를 괴롭히는 것일까. 잔인한 가혹행위를 군 인권센터가 발표한 사례와 일부 수사 기록, 전역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벌레 먹이기]

지난 2011년 7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해병대 2사단 해안 소초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 김모 상병은 따돌림 등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으며, 공범 정모 이병은 선임병들의 가혹행위에 질려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면 아래 있던 해병대의 가혹행위가 드러났다. 사건 직후 군인권센터는 군내 가혹행위 및 인권침해에 대한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

'해병대 병영생활 사례 요약' 사례 4-1을 보면 "먹어봐, 먹어봐" 하며 벌레 억지로 먹였다고 쓰여 있다. 한 해병대 전역자는 "지렁이나 개구리를 삼켰다가 뱉은 경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후임병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명백한 가혹행위다.

육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강원도 양양에 있는 한 부대에서 선임병이 경계근무 중 후임병에게 벌레를 먹으라며 강요했다는 증언이다. 후임병이 이를 거부하자 선임병은 벌레를 전투복 속에 넣고 "가만히 있으라"며 협박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최전방 GP에서는 한 병사가 후임병의 입을 벌린 뒤 풍뎅이를 먹으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악기바리]

김치를 담는 커다란 '락앤락'에 담긴 '짜파게티'를 토할 때까지 억지로 먹이는 가혹행위가 있다. 일명 '악기바리'라고 하는데 먹다 목이 메기 쉬운 샌드류의 과자나 입천장이 잘 까지는 '맛동산류'의 과자, 퉁퉁 분 유탕면류가 주된 음식이라고 군인권센터는 밝혔다.

최근 들어 악기바리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일부 부대에서는 아직 신병이 들어오면 PX를 데리고 간 뒤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라"고 하고, 신병이 고른 음식을 토할 때까지 먹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형사사건 기록을 참고하면 식사 직후 야식을 과다 섭취하도록 한 뒤 주먹으로 배를 수차례 때려 구토하게 한 선임병, 라면을 끓여 국물과 면을 남김없이 먹게 하고 25차례 폭행한 선임병이 확인된다.

또 '생선뼈까지 먹기' '바닷물 마시기' 등을 경험한 병사도 있다.

[불로 지지기]

한 선임병이 불에 달군 숟가락으로 살이 타는 냄새가 날 때까지 후임병의 엉덩이를 지진 일이 있었다. 동일 사건은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불을 이용한 가혹행위는 여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A씨(당시 이병)는 선임병으로부터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에 불을 붙여야 했다. 당시 A씨는 헌병 조사에서 "선임병이 라이터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태웠다"고 진술했다. 해당 선임병은 전출 조치됐다.

또 '인내력을 시험한다'는 구실로 혀를 이용해 담뱃불을 끄게 하는 행위, 피다 남은 담배로 손등이나 손바닥, 배 등을 지지는 행위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군인권센터는 '해병대 병영생활 사례 요약' 사례 19에서 "화염 방사기처럼 에프킬라 뿌리고 라이터로 불붙이면 후임병은 벽에 매미처럼 붙어 피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부대에서는 "성기를 태워버리겠다"며 바지 지퍼 부분에 에프킬라를 뿌리고 불을 붙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오토바이]


선임병이 보는 앞에서 "성경험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자위행위를 강요당한 병사들이 있다. 한 육군 병장은 소속 생활관(당시 내무실)에서 후임병을 눕혀 움직이지 못하도록 누르고 옷 위로 성기를 2∼3분가량 만졌다. 이어 모두 7차례에 걸쳐 일병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성기를 30분~2시간가량 만지거나 흔들어 사정을 유도했다.

또 다른 부대에서는 병사 3명이 6개월 간 육군 이병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이병의 양쪽 다리를 잡은 뒤 발바닥으로 성기를 문지르는 일명 '오토바이' 고문을 가했다.

익명의 전역자는 "속된 말로 꼬인 군번이었는데 선임들이 샤워실에서 자위를 강요하고, 샤워기 호스를 이용해 성기를 자극하는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전했다. 최근 판결문을 보면 후임병이 자위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선임들로부터 집단 조롱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변기 핥기]

지난 7일 해병대에서는 선임병이 전입 신병에게 소변기를 핥게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북 포항 해병대 1사단 소속 전모 일병은 저녁점호 청소 때 소변기 상단에 물기가 있다는 이유로 부대에 전입한지 2개월 된 B 이병에게 변기를 핥도록 강요했다.

과거부터 청소와 관련한 가혹행위는 다수 부대에 존재했다. 이등병만 걸레를 빨도록 돼있기 때문에 걸레에 물기가 남아 있으면 이를 이등병에게 먹이는 식이다. 단지 '간부가 보기에 깨끗하지 않다'는 이유로 유사 가혹행위는 대물림되고 있다. 때문에 변기를 핥게 하는 행위도 군 조직 특유의 청소에 대한 강박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일부 부대에서는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박게 한 뒤 물을 내리는 악습이 최근까지 내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윤일병 사망 여파로 피해 사례 속속 드러나
벌레 먹이고 불로 지지고 '악마 선임들'
주먹·발폭행 기본…전기·물고문 다양
자위행위 강요에 성기삽입까지  

[호흡 방해]

지난 6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피해자 C씨(당시 이병)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2012년 육군 6사단 의무중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증언했다. 해당 부대 선임병들은 군 생활 적응이 더디다는 이유로 C씨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선임병들은 혈압을 재는 측정기를 C씨 목에 넣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바람을 넣는 일명 '풍선 놀이'를 즐겼다.

또 다른 부대에서는 후임병에게 방독면을 억지로 씌운 뒤 호흡이 가능한 구멍을 손으로 막은 선임병이 적발됐다. 이 선임병은 수사 과정에서 후임병의 발을 라이터로 지지는 등의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과거부터 병사가 훈련 외 용도로 방독면을 쓰면 가혹행위로 의심받았다. 후임병에게 방독면을 씌운 뒤 특정 자세를 잡게 하고 주먹이나 팔꿈치 등으로 구타한 선임병도 있었다. 피해를 당한 후임병은 방독면 안에서 구토를 할 때까지 폭행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투 미싱]

의경 출신인 D씨는 휴식시간 중 컴퓨터를 이용했다가 '사수'로부터 수십차례 폭행 당했다. 온라인 메신저로 자신의 의경생활을 알린 사실이 탄로 났기 때문이다. 선임은 D씨의 멱살을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가 주먹과 발 등을 이용해 사정없이 때렸다. 이어 미싱을 하도록 지시했다. 의경에서 미싱은 가혹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법은 이렇다. 치약을 뿌린 수건을 양손으로 잡는다.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의 몸도 최대한 바닥에 밀착시킨다. 얼핏 무릎 꿇은 자세와 비슷하지만 손목을 제외하고 쭈그린 상태로 몸을 일정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근육에 상당한 무리가 간다. 치약이 달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닦는데 물은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치약 박기]

군용 치약 뚜껑에 머리를 박는 체벌은 공포의 대상이다. 때로는 반합뚜껑이나 야삽자루가 같은 용도로 이용된다. 온 체중이 치약뚜껑에 쏠리다 보니 이마가 움푹 패는 외상을 입기 일쑤다. 미끄러질 경우에는 이마가 찢어지기도 한다.

C씨는 수술 외과용 칼을 복부 밑에 놓고 머리박기를 했다. 쓰러질 경우 칼이 배를 뚫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선임들은 수술 외과용 가위 모서리에 이마를 박도록 했다.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면 군화발로 짓밟았다.

[전기 고문]

지난 2006년 공군에서는 선임병 2명이 신병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가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개그맨 흉내를 내도록 신병에게 강요한 뒤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전기고문을 가했다.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신체에 대고 1.5ℓ의 물을 들이붓기도 했다. 피해를 입은 사병은 손등이 감전돼 치료를 받았다.

최근 통신병 출신이라고 밝힌 한 예비역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목이나 복부 등에 감은 뒤 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성폭행]

2000년대 군생활을 했던 한 예비역은 샤워 도중 성폭행을 당할 뻔 했다고 했다. 한 선임병이 자신의 항문을 만지며 성기 삽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인권센터가 작성한 '군대내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기 삽입 시도 또는 성기 삽입'을 목격한 병사는 19명이었다. 이밖에도 한해 373건의 성범죄가 목격됐다. 하루에 한 명꼴로 성범죄 피해자가 생겨났던 셈이다.

한 선임병은 후임병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빨아보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가 전출됐다. 선임이 후임의 가슴을 만지거나 엉덩이를 밀착시키고 성행위를 흉내 낸 사례도 있었다.

[팬티 근무]

이밖에도 한여름 팬티바람으로 야외에 내몰아 모기에 물리도록 하는 행위, 한겨울 수통 등에 있는 물을 뿌리는 행위 등이 가혹행위로 꼽혔다. 또 근무 중인 후임병을 표적으로 대검을 던지는 행위나 소총을 이용해 목을 가격하는 행위 등도 전역자가 기억하는 가혹행위로 전해졌다.

 

<angeli@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