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사설탐정 24시' 비하인드 스토리

"500만원만 주면 뭐든지 합니다"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담배 파이프를 문 날렵한 사내가 살인자를 뒤쫓는다. 유달리 명석한 이 탐정은 채집한 증거들을 모아 탁월한 추리로 범죄자의 숨통을 조인다. 영국을 대표하는 명탐정 셜록홈즈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한 사립탐정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설탐정 제도가 활성화된 영·미권 국가와 달리 한국은 탐정을 공인하지 않고 있다. 주변엔 셜록홈즈 운운하며 사고만 치는 흥신소 직원이 더 많이 보인다. 이제 갓 양성화 단계에 있는 사립탐정, 그 어두운 이면을 조명했다.

차가운 바람이 여민 코트 사이를 파고들었다. 넥타이를 맨 사람들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서류가방을 들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울 모처에 있는 한 대형빌딩, A씨는 이곳 지하 1층에서 의뢰인과 만나기로 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릴 터였다.

셜록홈즈 상상
"소설일 뿐"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건물 로비를 메웠다. 로비를 가로지른 그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모여 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하이힐 소리는 잦아들었다. 탑승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출근 시간은 거의 끝난 듯했다. 기다리던 전화벨이 울렸다.

A씨는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그의 눈앞에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의뢰인이었다.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서로를 탐색했다. 용무를 나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뢰인의 입에서 "무역회사에 있는 유승준(가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봐 달라"는 말이 나왔다. 의뢰인은 유승준이 낮 시간에 누구와 만나는지도 알아봐 달라 했다.

A씨는 의뢰인으로부터 유승준이 다니는 무역회사의 이름을 들었다. 작업에 착수한 A씨는 법인 등기부등본을 열람하여 유승준이 다니는 회사와 주소지, 운행하는 차량을 확인했다. 이후 A씨는 자신의 조력자들과 함께 유승준의 차량이 주차돼 있는 서울 한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조력자는 사람들이 오는지를 살폈고 또 다른 조력자는 GPS 위치추적장치를 차량에 부착했다. 이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A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승준의 차량을 미행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연이어 눌렀다. 촬영된 사진은 의뢰인에게 전송됐다. 사진 한 장 가격은 100만원을 상회했다. 의뢰인은 계속 유승준을 감시해달라고 했다. A씨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었다.


위치추적 기본
대부분 불륜

사무실로 돌아온 A씨는 또 다른 의뢰인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익명의 의뢰인은 "김동규(가명)가 외근을 핑계로 서울 외곽에 있는 오피스텔을 찾고 있다"며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A씨는 낮은 수임료 등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의뢰인의 요청을 묵살했다. 당분간 A씨는 유승준을 미행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현행법상 특정인의 소재나 연락처를 알아내거나 금융거래 등 상거래관계 외에 사생활을 조사하는 일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A씨는 그간 민간조사업자로 소개됐다. '셜록홈즈'란 이름도 사용됐다. 그렇지만 실상은 탐정을 빙자한 심부름센터 직원이었다.

수탁 받은 사건도 그렇고 근사한 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A씨가 받은 의뢰는 며칠 전 아내가 집을 나갔으니 찾아달라는 의뢰, 아내에게 애인이 생긴 것 같으니 뒤를 밟아달라는 의뢰, 특정 주소지에 내연녀가 아직 살고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의뢰, 자신의 동거남이 실제로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 등이다.

세부적으로 보면 A씨는 같은 기간 한 여성 의뢰인으로부터 "남편이 강원도에 있는 한 리조트로 세미나를 갔다고 하는데 정말로 세미나를 간 게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A씨가 한 일이라고는 리조트로 차를 끌고 가서 세미나가 열렸는지를 보고 오는 게 끝이었다. 산업 스파이를 추적하고 지명 수배자를 뒤쫓는 일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을 거점으로 암약한 한 사립탐정은 '불륜 원스톱 서비스'로 유명했다. 그는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증거를 잡아달라는 청탁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며 수익을 올렸다.

업무 특성상 미행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는데 배우자의 차종을 물어본 뒤 대형차는 500만원, 중형차는 300만원 하는 식으로 가격을 붙였다고 했다.


사립탐정 공인 초읽기…이르면 내년 통과
"아직 멀었다?" 흥신소 직원들이 물 흐려

또 불륜 포착 과정에는 위치추적기를 필두로 키홀더형 카메라, 볼펜형 녹음기 등이 동원됐다. 당사자 몰래 채증을 했음은 물론이다.

한 유명 연예인은 흥신소(심부름센터) 직원을 붙여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했다. 해당 흥신소는 아내의 과거 행적과 관련한 뒷조사도 병행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한 중견기업 오너는 아내로부터 집안내력 등과 관련한 뒷조사를 당했다고 한다. 대학교 학적부를 들추고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뒤지는 식이다.

제법 이름 있는 흥신소의 경우는 자신들의 정보원을 가동해 특정인물의 개인정보 조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기자가 공식적으로 접촉한 한 흥신소 직원은 부산으로 출장 중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로부터 의뢰를 받았으며 어떤 사건을 수임했는지 밝히기를 꺼려했다.

만나기 어려우면 전화라도 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 직원은 "전화는 아니다"라며 "예의는 갖다 버렸냐"고 훈계했다. 앞뒤 안 가리고 여기저기 다 물어보는 것이 특기인 이 조사관은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전국 곳곳을 헤집고 있다.

또 다른 흥신소 직원은 대전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소위 말해 경찰과 끈이 닿는 능력자다.

자칭 조폭 출신 자산가 등과도 친하다. 잠시 흥신소 업계를 떠났던 그는 얼마 전 현업에 복귀했다. 그와 의뢰인으로 만나 호형호제하게 된 한 사업가는 "해결사라기보다는 브로커에 가까웠다"며 "경찰을 소개시켜주고 이득을 챙겼는데 나중에 내가 직접 경찰을 뚫으니 만날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업가처럼 누구나 경찰과 끈이 닿을 수는 없는 일. 때로는 "공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범죄자가 '사립탐정'을 찾기도 한다.

해결사 자처
"도장 찍으시오"

탐정 B씨는 지방에 있는 한 교도소를 찾았다. 강간치상죄로 수감 중인 고영진(가명)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영진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한 직원과 만난 뒤 사건을 수임하기로 하고 면회 절차를 밟았다.


면회실 유리벽 틈으로 고영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 관계자와 미리 입을 맞춘 B씨는 "재판에 필요한 단서를 찾고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어 B씨는 "(당신의 무죄를 입증할) 유리한 증인을 찾아 녹음해 증거로 제출하겠다"며 "경비는 나중에 받을 테니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어 달라"고 했다.

B씨의 행동은 변호사가 아니면서도 송사에 관여해 법률사무를 취급한 범죄행위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동행한 직원으로부터 계약비 명목으로 30만원을 받았다. 이어 그는 녹취록 작성비, 교통비, 식비 등의 실비 명목으로 모두 1300만원을 받았다.

앞서 B씨는 "내가 몇몇 사건의 목격자나 증인을 찾아 판결을 뒤집었다"며 "검사의 잘못을 밝히는 능력이 있으니 조사과정의 잘못을 짚어 (의뢰인의) 무죄를 받아주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믿은 고영진은 500만원씩 두 차례에 나눠 B씨가 지목한 녹취전문 흥신소로 현금을 송금했다. 그러나 1000만원을 입금 받은 흥신소는 B씨의 가족이 운영하는 흥신소였다.

연예인에 회장님·사모님도 '기웃기웃'
"뒷조사 해달라" 심부름센터에 사건 의뢰

더구나 B씨의 일처리는 미덥지 못했는데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의 대화를 무차별 녹음하는가 하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녹취록을 작성하는 등 의뢰인의 기대를 저버렸다. 결과적으로 B씨는 의뢰인에 의해 본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굴욕을 맛봤다.

그나마 B씨는 셜록홈즈처럼 사건을 조사하는 흉내라도 냈지만 남의 사생활을 캐던 A씨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승준을 쫓던 A씨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A씨는 유승준 미행을 위해 운전업무 종사자를 한 명을 섭외했다. 그는 A씨의 지시를 받아 유승준의 차량이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과 연결된 지하주차장으로 유승준의 차량이 들어갔고, A씨의 차량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백미러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유승준이었다. 유승준은 주차를 중단하고 A씨의 차량에 따라 붙었다. 당시 유승준은 뒤편의 차가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를 물어보려 했다. 미행이 발각된 것이다.

긴급 상황에 운전자는 당황했다. 유승준은 차문을 열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전자는 가속 페달을 밟아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A씨의 차량이 급발진하자 유승준은 이를 피하다가 주차장 벽기둥에 부딪혔다. 이 사고로 유승준은 허리 부상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주차장을 빠져 나가던 A씨의 차량은 당시 정차 중이던 또 다른 차량을 들이박았다. 해당 차량의 운전자도 부상을 당했다. 이 장면은 주차장 CCTV 및 피해자 차량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녹화됐다. 그러나 운전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도주했다. A씨 일당은 모조리 경찰에 붙잡혔다.

범죄자도 의뢰
유명인도 의뢰

조사 결과 A씨에게 미행을 사주한 의뢰인은 한 법인기업의 회장이었다. 그는 기업 대표이사로 있는 자신의 아들과 유승준의 딸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승준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회장님은 셜록홈즈를 고용해야 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본인 역시 '범털' 신세를 면치 못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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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