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간첩사건' 목 걸린 사람들

증거조작 후폭풍…단두대 누가 오를까

[일요시사=사회팀] 공안몰이 덕을 톡톡히 봤던 박근혜정부가 중대 기로에 섰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파문이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까닭이다. 아직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벌써부터 남재준 국정원장, 황교안 법무 부장관의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우에 따라 김진태 검찰총장의 거취마저 불투명해질 수 있는 매머드급 사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여파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대선 개입, 민간인 불법 사찰, 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등으로 정국을 마비시켰던 국정원은 이번 증거조작 사건의 중심에서 또 다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국정원 정조준
원세훈도 도마

지난 12일 <동아일보>는 간첩 사건과 관련한 증거 위조를 주도한 인물이 국정원 대공수사국 A팀장(3급)으로 특정됐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 수사팀'(팀장 윤갑근 대검찰청 강력부장)은 국정원 조선족 협력자 김모(61)씨가 위조해 온 문서 2건을 가짜 '영사확인서'로 만드는 과정에서 A팀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영사확인서를 만든 건 이인철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4급)지만 그 윗선에선 A팀장이 증거 조작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혹이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중순 대공수사팀 김모 과장(4급)이 조선족 김씨를 만나 "유우성씨 변호인 측의 출입경 기록을 반박할 자료를 구해달라"고 한 것도 A팀장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검찰은 김씨와 이 영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한 뒤 '위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 김 과장에 대해서도 소환 조사를 저울하고 있다.

그간 검찰은 문서 위조를 자백한 김씨의 진술을 근거로 이 영사와 김 과장의 연결고리인 '제3의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A팀장이 증거 조작에 개입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검찰은 유씨에 대한 1심 재판에서 유씨에게 씌워진 간첩 혐의가 무죄로 선고되자 A팀장이 나서 위조를 지시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또 이 영사로부터 사전에 위조 사실을 보고받고도 이를 묵인한 것은 아닌지 등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수사 진행 상황을 보면 유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증거 확보 작업을 컨트롤한 A팀장에게 검찰의 화력이 집중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A팀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보다 더 윗선의 존재가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복수 관계자는 "국정원 조직 특성상 실무진이나 현장요원이 자의적 판단에 따라 증거 조작을 도모하긴 힘들다"고 증언하고 있다.

A팀장의 윗선인 대공수사국장(1급, 정부 부처 차관보나 실장급), 대공수사라인의 총지휘자인 서천호 국정원 2차장이 조사 대상으로 거론된다. 또 국정원의 최종 결정권자인 남재준 국정원장도 파고 들어오는 칼날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국정원 내부의 치열한 실적 경쟁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증거 조작 의혹이 면책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위법 행위에 대한 사법 처벌과는 별도로 문책성 인사가 단행될 것이란 전망은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진퇴양난 남재준
전방위 사퇴 압박

정치권에선 이번 사태의 원흉으로 남 원장을 융단폭격하고 있다. 남 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은 그간 야권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이번 증거 조작 사건을 기점으로 일부 여권 인사가 남 원장과 선을 그으면서 '남재준 해임론'은 탄력을 받고 있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새누리당은 국정원을 '양날의 검'으로 보고 있다. 북한과 관련한 공안사건이 적시에 터질 경우 득을 보는 건 아무래도 여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섣불리 이번 사건을 덮으려 할 경우 자칫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에 등을 돌리는 의원은 속출하고 있다.


지난 12일 열린 새누리당 최고 중진 연석회의에서는 이 같은 여권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한 장본인은 (스스로) 그만둬야 한다"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김용태·조해진·심재철 등 이른바 친이계 의원들은 이 의원의 사퇴 요구에 동조했다.

친박계 일각에서도 '남재준 책임론'이 고개를 들었다.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은 "국정원 수뇌부의 쇄신 등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의원은 "책임질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권 안팎으로 '남재준 해임론'의 명분이 쌓이고 있는 중이다.

검찰·국정원에 화력 집중 "윗선 쳐낸다"
서천호 등 대공라인 대대적 메스질 불가피

때를 맞춰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은 남 원장에 대한 공세 수위를 한껏 높였다. 지난 13일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국민이 납득할 만한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조치가 없을 경우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 촉구 결의안'을 제출토록 하는 등 행동에 돌입하겠다"고 경고했다. 또 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남 원장을 해임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암덩어리로 전락한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얼마 전 박 대통령은 이번 증거조작 의혹에 대한 이례적인 유감 표명을 했다. 지난 10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증거자료의 위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실체적 진실을 정확하게 밝혀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입장을 내놨다. 사실상 수사 전권을 위임받은 검찰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이로부터 6시간 만에 검찰은 국정원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앞서 지난해 4월 국정원 대선 개입 수사로 국정원을 압수수색했던 검찰은 불과 10개월 만에 다시 최고 정보기관의 심장을 겨누게 됐다.

남 원장은 국정원장에 취임한 지 1년 만에 2번이나 조직의 안방을 내주는 굴욕을 당하면서 전방위 사퇴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남 원장은 요지부동이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9일 남 원장은 예상 밖의 타이밍에 보도자료를 뿌려 빈축을 샀다. 관련 내용을 보면 '우리도 당했다'는 식의 해명인데 국정원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한편 수사 결과 위법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관련자는 반드시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했다.

국정원을 향한 십자포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남 원장은 뒷짐을 진 채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시험대 선 김진태
도마 오른 황교안

정치권 한 관계자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과 이번 증거 조작 사건은 결이 다르다고 설명한다. 전자가 원세훈 국정원장 때 벌어진 일이라면 후자는 남 원장 취임 후 생긴 일이라 책임 소재가 다르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남 원장에 대한 문책성 인사가 동반돼야 한다는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은 지난 이명박정부 때부터 준비됐으며, 때문에 남 원장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기 애매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유력 매체는 전직 국정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 "'간첩사건'은 원 전 원장 재임 때 시작된 일이고, 올해 대공수사국 중점 과제는 'RO 사건'이었기 때문에 상부의 관심이 떨어져 단장급 이상은 보고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보통 3급 팀장이 4∼5개의 사건을 함께 관장하는데 국장급(1급)까지 보고가 올라가는 건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될 때"라며 이같이 말했다. 향후 조사 과정에서 A 팀장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윗선을 밝히는 작업은 난관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된다.


키는 검찰이 쥐고 있다. 성실한 수사와 끈질긴 추궁은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그러나 유씨에 대한 공소유지를 하고 있는 검찰 입장에서 이번 수사는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다. 국정원의 증거 조작 의혹을 규명한다면 유씨에 대한 2심 재판은 힘이 빠지게 된다. 검찰 스스로 기소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격이라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유씨에 대한 결심 예정일은 28일, 그 전까지 검찰은 증거 조작 수사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윗선을 캐내기 위한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검찰 안팎에 끊이지 않고 있다.

조직의 명운을 짊어진 김진태 검찰총장은 국정원을 감싸는 듯한 인상을 주며 우려를 사고 있다. 뒷북수사와 때늦은 압수수색으로 의혹의 당사자인 국정원에 시간을 벌어 준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실제로 복수 관계자는 "(국정원과) 수사 가이드라인을 사전에 조율한 것 아니냐"며 의혹을 던지고 있다. 때문에 김 총장 역시 수사 결과에 따라 거센 역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대두된다. 김 총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정치권 안팎에선 국정원뿐만 아니라 검찰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받고 있다. 국정원이 전한 증거물을 검증 없이 재판부에 제출한 것도 문제지만 검찰 측에서 사전에 증거 조작 여부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탄로 날 경우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김 총장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검찰 내부적으로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이현철 부장검사)에 대한 문책이 검토될 것으로 관측된다. 문책 수위는 진상 조사 결과에 따르겠지만 국정원만 책임을 물을 수 없어 검찰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특히 1심 때부터 공조체제를 구축한 검찰이 국정원의 조작 움직임을 몰랐다는 사실은 의심의 대상이다. 또 무리한 수사로 국정원의 반발을 살 경우 자칫 '채동욱 사태' 때처럼 국정원이 반격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전에 알았나 몰랐나
황교안·남재준 해임론

현직 특수부 시절 김 총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등의 입을 열어 여야 정치거물인 홍인길 전 총무수석과 권노갑 민주당 고문 등을 구속한 전력이 있다. 그만큼 권력 눈치 안 보고 수사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박 대통령의 복심이나 다름없는 남 원장과 맞서게 돼 그 셈법에 관심이 쏠린다. 무엇보다 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심판이 청구되는 등 정권에서 요구하는 국정원의 역할이 막대한 가운데 남 원장을 정면으로 조준하는 건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해석도 있다. 청와대 출신 한 관계자는 "결국 청와대의 입을 쳐다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소신 있는 수사에 한계가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거취 문제다. 앞서 공식 외교라인을 통해 증거를 입수했다고 말했던 황 장관은 며칠 뒤 국정원으로부터 문서를 입수했다고 말을 바꾸며 논란을 확산시켰다. 그간 원세훈·김용판 수사 축소 의혹 등으로 홍역을 앓았던 황 장관은 국회 본회의에 해임안이 상정될 정도로 미운털이 박힌 상황이다. 과거 '안기부 X파일' 수사 당시 국정원을 사상 첫 압수수색했던 황 장관은 얄궂게도 국정원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하지만 국정원을 넘어뜨려도 황 장관이 직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검찰 라인에서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김 총장보다는 황 장관 쪽에 무게가 쏠리는 분위기다. 법조계 풀이 두터운 박근혜정부 특성상 황 장관의 공백을 매우는 쪽이 더 쉽다는 계산도 깔려있다. 향후 출구전략을 놓고 청와대가 어떤 결정을 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원세훈카드 만지작
외교라인도 손보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원 전 원장에 대한 '책임 전가 시나리오'가 거론된다는 것이다. 유씨가 체포된 지난해 1월은 원 전 원장의 재직 시절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한창 이슈화되던 때다.

<일요시사> 보도 등에 따르면 유씨의 여동생 유가려씨가 국정원 심문을 받던 시점은 이보다도 훨씬 전이다. 즉 국정원이 서울시 공무원 유씨를 표적으로 한 건 애초부터 박원순 서울시장을 겨냥한 기획수사였고, 이 사건의 책임자가 원 전 원장인 만큼 지난 정권에 책임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이번 사건은 정치권과 권력기관, 행정기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참사다. 더불어 신뢰를 잃은 대중 외교라인과 중국 정부가 취한 강경한 태도는 또 하나의 변수로 우리 외교당국에 부담이 되고 있다.

각 주재국 영사관 등에 파견된 국정원 직원은 일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권에선 벌써부터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카드를 만지작대고 있다. 그간 영사 신분으로 파견된 국정원 직원은 외교부 통제 밖에서 활동해왔지만 이번 사태로 해외공작 파트의 위상과 독립성은 뿌리째 흔들리는 중 이다.

뿐만 아니라 청와대는 취임 1년간 국정원과 검찰의 힘을 톡톡히 봤지만 이번 증거조작 파문으로 국정 운영의 일대 분수령을 맞았다. 전두환·이석기 쌍끌이 수사로 지지율을 끌어올린 현 정부는 공안몰이에 성공했지만 지난 정부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또 다시 휘청거리는 모습이다. 위기를 맞은 청와대의 결단은 무엇일지. 시한폭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코너 몰린 남재준 선택은?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한 전방위 사퇴 압박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그의 진퇴에 관심이 쏠린다. 앞서 남 원장은 육군참모총장 재임 시절 자신을 둘러싼 의혹이 확산되자 사상 초유의 전역지원서 제출로 결백을 주장한 바 있다.

지난 2004년 있었던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남 원장은 육군 장성 진급비리 괴문서 사건과 관련한 언론보도가 나가자 전역지원서 제출로 맞섰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남 원장의 사표를 반려했다.

 남 원장의 청렴성과 도덕성은 자타공인 의심하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나친 원칙주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는 소문이 적지 않다.

특히 노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군 수뇌부들을 초청한 골프대회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또 남 원장은 육군 간부회의 석상에서 참여정부의 국방부 문민화와 군 검찰 독립 등의 사안을 성토하며 이른바 '정중부의 난'을 언급했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육군 장성 진급비리 의혹이 군 검찰 수사 결과 어느 정도 사실로 드러지자 남 원장은 책임을 지고 군을 떠났다. 그는 퇴역을 앞두고 "이번 사태는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괴심을 갖는다"고 변을 밝혔다.

이후 10년 만에 또 다시 진퇴의 갈림길에 놓인 남 원장. 그가 이번에도 깜짝 사퇴로 시국을 돌파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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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