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절대적 신임 속 7·4 남북공동성명 이끌어내
유신체제 확립에 앞장, 김대중 납치사건 막후서 주도
정계 은퇴 후 침묵, 역사적 사건 실체 어둠 속에 묻혀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유신의 실세’라 불렸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향년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락 전 부장은 지난 5월 지병으로 입원한 후 치료를 받아왔으나 최근 상태가 악화돼 결국 숨을 거뒀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관계자는 “이 전 부장이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45분 별세했다”고 밝혔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이자 은밀한 정치공작의 대명사로 불렸던 이 전 부장이지만 권불십년을 빗겨가지 못한 채 쓸쓸히 삶을 정리해야 했다.
이 전 부장은 19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공립농고를 나와 1946년 미군정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했다. 군에서 육군 정보국 차장과 주미대사관 무관 등을 거친 그는 국방부 정보부대에서 CIA의 연락책을 맡으며 친미 정보통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5·16 군사정변에서 큰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5·16 이후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게 됐다. 이 전 부장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히는 것을 계기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미국통 군인에서
‘박정희의 그림자’로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39세의 나이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6년간 정권의 심장부에서 활약하게 된 것.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소내각’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이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의 ‘심복’ 혹은 ‘그림자’로 불렸다.
그러나 1969년 10월 3선 개헌 파동이 나자 박 전 대통령은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했다. 그러나 일본대사로 간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그를 불렀다. 김대중 후보와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의 별명은 ‘제갈조조’.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쳐놓은 것 같이 머리가 비상하고 치밀하다는 뜻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선 승리를 위해 탁월한 ‘책사’인 ‘제갈조조’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
이 전 부장에게 야당인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바람을 잠재우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남산 지휘부를 종합청사로 옮겨 선거공작을 지휘했다. 1971년 대선엔 관권 및 금권 선거가 총동원됐고 김 후보의 매서운 돌풍에도 불구, 박 전 대통령이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이에 김 후보가 선거 후 이 전 부장에게 “나는 박정희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 부장에게 졌소”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이 전 부장은 그렇게 박 전 대통령의 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970년 12월21일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 물러나기까지 3년간 박 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현대사의 중요한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려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1972년 5월 이 전 부장은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주석을 만나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갖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5월2일 그는 3명의 수행원과 함께 판문점을 넘어 비밀 방북을 했다. 3박4일간의 방북기간 중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이들의 회동은 심야에 이뤄졌는데 김 주석은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는 말로 그를 반겼다.
4일 새벽부터 시작된 남북비밀회담에서 남북은 강대국에 대한 공동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다. 이 전 부장은 북측으로부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7·4 공동성명의 기본 원칙’을 받아 돌아왔다.
김 주석으로부터 “훈장을 주고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청와대 습격은)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라는 사과도 받아냈다. 당시 이 전 부장이 김 주석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금강산 선녀도’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국가기록원 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방북 당시 ‘일이 잘못될 경우 자결하겠다’며 자살용 청산가리를 품고 갔던 각오만큼의 성과를 올리고 온 것이다.
이후 북측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박성철 제2부총리가 그해 5월29일부터 서울을 답방, 박 전 대통령 및 이 전 부장과 수차례 회담을 가진 끝에 이후락·김영주 명의의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72년 7월4일 이 전 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판문점을 넘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평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아찔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 뒤 이 전 부장은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남북비밀회담 5개월여 뒤인 1972년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됐는데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직전 이 전 부장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북한에 이를 사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엄선포와 국회해산 대통령 간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체제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1972년 10월16일 이 부장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남한 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많아 질서를 세우기 위한 비상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북한에 통보된 것.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10월 유신은 “통일을 위한 비상조치”로 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비밀스런 방북으로
남북비밀회담 성사
이 전 부장은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에 앞장섰던 것처럼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도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실제 지난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충성심과 권력욕에 발목을 잡히면서다.
그의 충성심은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주일대사 시절 생선 초밥을 좋아했던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오찬에 맞춰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공수했다는 것이다.
정재철 한나라당 상임고문도 회고록 <아름다운 유산>에서 이 전 부장에 대해 ‘만일의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정도로 박 전 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분이셨다’고 적었다.
그러나 유신 실세로 입지를 굳히고 있던 1973년 12월1일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 전 부장에게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쿠데타 모의로 비화되면서 그의 권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전 부장의 심복이었던 윤 사령관의 발언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정치권 안팎의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를 정점으로 하던 군내 하나회 인맥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 전 부장 자신도 ‘윤필용 설화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됐다.
김대중 납치사건도 이 전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분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무십일홍’을 겪은 이 전 부장은 그 해 12월 말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극비의 정보 문서들을 챙겨 영국령 바하마로 출국, 사실상 망명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정가의 추측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친필 편지를 받고서야 1974년 2월 귀국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전 부장이 자신의 치부를 폭로할 것을 우려해 귀국을 종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력에 뒤통수 맞고
몰락의 길로 내쳐져
이후 이 전 부장은 화려한 재기를 꿈꾸기도 한다. 1979년 제10대 총선에서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회’ 회장을 지내다가 공화당에 입당한 것.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1980년 12·12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치 활동을 규제받았다.
당시 신군부가 밝힌 부정 축재 금액은 무려 194억원. 1980년 3월 그는 자신이 축재한 재산과 관련해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말해 한때 ‘떡고물’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쌓은 부에 대해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울산에 조선소를 유치하도록 하면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한 것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조선소 유치에 앞서 엄청난 규모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천정부지로 치솟은 시세차익을 거뒀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다,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결국 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전 부장은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그리고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음에도 광주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30년 가까이 외부와 접촉을 끊고 살아왔다. 1987년 언론에 “될 수 있는 대로 언론을 피하고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한 바 있다.
한때 시대를 호령했던 권력자였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방 밖으로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었다. 5~6년 전부턴 도자기 굽기도 그만뒀다.
이 전 부장 소유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넘어갔다.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1994년 매각됐다.
지난 5월 뇌종양 증세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1녀이며 빈소는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빈소 안팎엔 이명박 대통령, 정운찬 총리, 김형오 국회의장, 원세훈 국정원장,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김태영 국방부 장관, 김승연 한화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정·재계 인사가 보내온 조화 160여 개가 자리했다.
특히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화환과 한광옥 민주당 상임고문의 방문이 눈길을 끌었다. 한 고문은 “고인은 비록 유신독재와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가담했지만 돌아가신 만큼 용서와 화해 차원으로 조문을 왔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만큼 그 뜻에 따라 다 용서해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전 부장의 죽음으로 역사적 사건의 실체는 영원히 시간 속에 묻히게 됐다. 그는 1985년 해금된 후에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발독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묻는 연구자나 언론의 요청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박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과거사위의 발표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의 명예가 실추됐지만 죽기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끝까지 침묵, 역사적
사건 실체 오리무중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이 전 부장의 측근인 양희재 전 비서관은 “고인은 남북 대화와 조국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역사적 평가가 잘못돼 젊은 사람들은 이 전 부장의 부정적인 면만 알고 있다”면서 “지난 30년간 조용히 지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뒤안길로 물러선 분인데 역사적인 평가를 언젠가 해드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로 이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를 언급했다.
이 전 부장의 안장식은 지난 2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서 열렸다. 안장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고인을 모셨던 양 전 비서관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상태에서 40여 분간 진행됐다.
양 전 비서관은 조사에서 “고인은 1972년 5월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 캡슐을 들고 방북, 그해 7월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며 “고인의 사명감과 조국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말로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