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남긴 것들

‘현대사 진실’ 역사의 한 장으로 남기고…


박정희 절대적 신임 속 7·4 남북공동성명 이끌어내
유신체제 확립에 앞장, 김대중 납치사건 막후서 주도
정계 은퇴 후 침묵, 역사적 사건 실체 어둠 속에 묻혀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유신의 실세’라 불렸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향년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락 전 부장은 지난 5월 지병으로 입원한 후 치료를 받아왔으나 최근 상태가 악화돼 결국 숨을 거뒀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관계자는 “이 전 부장이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45분 별세했다”고 밝혔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이자 은밀한 정치공작의 대명사로 불렸던 이 전 부장이지만 권불십년을 빗겨가지 못한 채 쓸쓸히 삶을 정리해야 했다.
이 전 부장은 19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공립농고를 나와 1946년 미군정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했다. 군에서 육군 정보국 차장과 주미대사관 무관 등을 거친 그는 국방부 정보부대에서 CIA의 연락책을 맡으며 친미 정보통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5·16 군사정변에서 큰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5·16 이후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게 됐다. 이 전 부장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히는 것을 계기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미국통 군인에서
‘박정희의 그림자’로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39세의 나이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6년간 정권의 심장부에서 활약하게 된 것.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소내각’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이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의 ‘심복’ 혹은 ‘그림자’로 불렸다.

그러나 1969년 10월 3선 개헌 파동이 나자 박 전 대통령은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했다. 그러나 일본대사로 간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그를 불렀다. 김대중 후보와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의 별명은 ‘제갈조조’.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쳐놓은 것 같이 머리가 비상하고 치밀하다는 뜻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선 승리를 위해 탁월한 ‘책사’인 ‘제갈조조’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


이 전 부장에게 야당인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바람을 잠재우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남산 지휘부를 종합청사로 옮겨 선거공작을 지휘했다. 1971년 대선엔 관권 및 금권 선거가 총동원됐고 김 후보의 매서운 돌풍에도 불구, 박 전 대통령이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이에 김 후보가 선거 후 이 전 부장에게 “나는 박정희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 부장에게 졌소”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이 전 부장은 그렇게 박 전 대통령의 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970년 12월21일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 물러나기까지 3년간 박 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현대사의 중요한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려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1972년 5월 이 전 부장은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주석을 만나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갖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5월2일 그는 3명의 수행원과 함께 판문점을 넘어 비밀 방북을 했다. 3박4일간의 방북기간 중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이들의 회동은 심야에 이뤄졌는데 김 주석은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는 말로 그를 반겼다.

4일 새벽부터 시작된 남북비밀회담에서 남북은 강대국에 대한 공동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다. 이 전 부장은 북측으로부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7·4 공동성명의 기본 원칙’을 받아 돌아왔다.

김 주석으로부터 “훈장을 주고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청와대 습격은)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라는 사과도 받아냈다. 당시 이 전 부장이 김 주석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금강산 선녀도’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국가기록원 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방북 당시 ‘일이 잘못될 경우 자결하겠다’며 자살용 청산가리를 품고 갔던 각오만큼의 성과를 올리고 온 것이다.

이후 북측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박성철 제2부총리가 그해 5월29일부터 서울을 답방, 박 전 대통령 및 이 전 부장과 수차례 회담을 가진 끝에 이후락·김영주 명의의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72년 7월4일 이 전 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판문점을 넘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평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아찔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 뒤 이 전 부장은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남북비밀회담 5개월여 뒤인 1972년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됐는데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직전 이 전 부장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북한에 이를 사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엄선포와 국회해산 대통령 간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체제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1972년 10월16일 이 부장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남한 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많아 질서를 세우기 위한 비상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북한에 통보된 것.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10월 유신은 “통일을 위한 비상조치”로 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비밀스런 방북으로
남북비밀회담 성사

이 전 부장은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에 앞장섰던 것처럼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도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실제 지난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충성심과 권력욕에 발목을 잡히면서다.

그의 충성심은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주일대사 시절 생선 초밥을 좋아했던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오찬에 맞춰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공수했다는 것이다.

정재철 한나라당 상임고문도 회고록 <아름다운 유산>에서 이 전 부장에 대해 ‘만일의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정도로 박 전 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분이셨다’고 적었다.

그러나 유신 실세로 입지를 굳히고 있던 1973년 12월1일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 전 부장에게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쿠데타 모의로 비화되면서 그의 권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전 부장의 심복이었던 윤 사령관의 발언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정치권 안팎의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를 정점으로 하던 군내 하나회 인맥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 전 부장 자신도 ‘윤필용 설화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됐다.

김대중 납치사건도 이 전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분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무십일홍’을 겪은 이 전 부장은 그 해 12월 말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극비의 정보 문서들을 챙겨 영국령 바하마로 출국, 사실상 망명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정가의 추측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친필 편지를 받고서야 1974년 2월 귀국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전 부장이 자신의 치부를 폭로할 것을 우려해 귀국을 종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력에 뒤통수 맞고
몰락의 길로 내쳐져

이후 이 전 부장은 화려한 재기를 꿈꾸기도 한다. 1979년 제10대 총선에서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회’ 회장을 지내다가 공화당에 입당한 것.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1980년 12·12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치 활동을 규제받았다.

당시 신군부가 밝힌 부정 축재 금액은 무려 194억원. 1980년 3월 그는 자신이 축재한 재산과 관련해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말해 한때 ‘떡고물’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쌓은 부에 대해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울산에 조선소를 유치하도록 하면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한 것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조선소 유치에 앞서 엄청난 규모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천정부지로 치솟은 시세차익을 거뒀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다,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결국 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전 부장은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그리고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음에도 광주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30년 가까이 외부와 접촉을 끊고 살아왔다. 1987년 언론에 “될 수 있는 대로 언론을 피하고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한 바 있다.



한때 시대를 호령했던 권력자였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방 밖으로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었다. 5~6년 전부턴 도자기 굽기도 그만뒀다.

이 전 부장 소유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넘어갔다.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1994년 매각됐다.

지난 5월 뇌종양 증세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1녀이며 빈소는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빈소 안팎엔 이명박 대통령, 정운찬 총리, 김형오 국회의장, 원세훈 국정원장,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김태영 국방부 장관, 김승연 한화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정·재계 인사가 보내온 조화 160여 개가 자리했다.

특히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화환과 한광옥 민주당 상임고문의 방문이 눈길을 끌었다. 한 고문은 “고인은 비록 유신독재와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가담했지만 돌아가신 만큼 용서와 화해 차원으로 조문을 왔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만큼 그 뜻에 따라 다 용서해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전 부장의 죽음으로 역사적 사건의 실체는 영원히 시간 속에 묻히게 됐다. 그는 1985년 해금된 후에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발독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묻는 연구자나 언론의 요청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박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과거사위의 발표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의 명예가 실추됐지만 죽기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끝까지 침묵, 역사적
사건 실체 오리무중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이 전 부장의 측근인 양희재 전 비서관은 “고인은 남북 대화와 조국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역사적 평가가 잘못돼 젊은 사람들은 이 전 부장의 부정적인 면만 알고 있다”면서 “지난 30년간 조용히 지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뒤안길로 물러선 분인데 역사적인 평가를 언젠가 해드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로 이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를 언급했다.

이 전 부장의 안장식은 지난 2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서 열렸다. 안장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고인을 모셨던 양 전 비서관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상태에서 40여 분간 진행됐다.

양 전 비서관은 조사에서 “고인은 1972년 5월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 캡슐을 들고 방북, 그해 7월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며 “고인의 사명감과 조국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말로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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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단독] ‘생기업 잡은’ 신정훈 의원실 수상한 보도자료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 업체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에 직격탄을 맞았다. 해당 업체는 보도자료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보도자료를 쓴 의원실 보좌관은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반박했다.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일요시사>가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봤다. 국회의원은 최고 헌법기관인 국회의 구성원인 동시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다. 법률을 만들고 개정하는 입법 기능 외에도 인사청문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투표로 선출된 ‘국민의 종’으로서 국회의원은 기자회견, 보도자료 등을 통해 국민에게 활동 상황을 보고한다. 국회의원 민원 창구? 국회의원 이름으로 하루에도 수건씩 보도자료가 쏟아진다. 법안을 발의하거나 지역구 예산을 수주했다는 내용,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부 기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 등이다. 언론은 국회의원실발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로 작성한다. 언론 보도는 사정기관의 감사나 수사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한 국회의원실에서 나온 보도자료가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자료에 언급된 정부 기관, 그 기관과 일하는 업체 등이 후폭풍에 휘말렸다. 보도자료를 받아 쓴 일부 매체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됐다. 언론사 기자들의 이메일로 배포된 보도자료는 국회의원실 보좌관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5월14일 더불어민주당 신정훈 의원실 오모 보좌관은 ‘경찰청, 순찰차 납품 지연 및 특정 업체 유착 의혹에도 자료 제출 거부!’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작성해 언론사 기자들에게 보냈다. 신정훈 의원은 전남 나주·화순을 지역구로 하는 3선 의원으로,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찰청은 행정안전위원회의 피감기관이다. 순찰차는 일반 차량에 특장 작업을 거쳐 경찰청에 납품된다. 멀리서도 순찰차임을 확인할 수 있는 리프트 경광등을 달고 겉면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데칼’ 작업을 거쳐 수배·체납·도난 차량을 확인할 수 있는 멀티캠을 내부에 다는 등의 작업을 거친다. 순찰차 한 대를 특장하는 데 약 1700만원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년 1000여대의 노후 순찰차가 교체된다. 신정훈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노후 순찰차 959대를 교체하기 위해 총 491억원의 예산이 집행됐다. 하지만 이 중 약 225억원 상당인 343대가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완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또 납품업체의 문제로 순찰차 납품이 늦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발주 기관인 경찰청은 지체상금 부과, 계약 해지 등의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정훈 의원실의 자료 요구에 경찰청이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신정훈 의원실은 ‘공공계약에 정통한 한 법조계 관계자’의 “경찰청이 계약성 권리조차 행사하지 않고 이를 묵인한 데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도 거부한 것은 행정 편의주의를 넘어 법적 의무의 명백한 방기”라며 “이 정도 사안이면 감사원 감사는 물론 직권남용과 배임 혐의까지 적용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코멘트를 인용했다. 순찰차 납품 과정 지적 해당업체 “사실과 달라” 납품업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정훈 의원실은 “동일한 지배 구조를 가진 Y사(보도자료에는 A사)와 N사(B사)가 10여년간 경찰청의 대형 계약을 반복적으로 수주해 왔다”며 “수의계약이나 경쟁입찰의 형식을 빌린 사실상의 내정 또는 담합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공정거래법상 ‘부당 공동행위’ 및 ‘입찰 방해’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N사는 Y사의 임직원이 만든 회사로 두 업체는 모회사-자회사 관계다. 신 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집행되는 치안 장비 도입 사업이 법적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채 일부 업체에 특혜로 왜곡되고 있다”며 “기존 계약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발주가 진행돼서는 안 된다. 철저한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몇몇 언론이 기사를 냈다. 보도 이후 납품업체인 Y사가 보도자료 내용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 법무부 등에 차량을 개조해 납품하는 특장업체다. Y사 관계자는 “보도자료가 배포되기 전, 기사가 나가기 전에 신정훈 의원실이나 언론으로부터 단 한 차례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보도가 나간 이후 오 보좌관을 만나 사실과 다른 부분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달에 관련 보도가 한 차례 더 나갔다”고 주장했다. Y사는 경찰청과 직접 계약을 맺거나 현대자동차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형태로 이번 납품에 참여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현대자동차로부터 616대(소나타), Y사로부터 73대(스타리아 37대, 넥쏘 36대), N사로부터 270대(아이오닉 181대, 그랜저 89대) 등 총 959대를 납품받았다. Y사 관계자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지적한 납품 지연과 검사 불합격에 대해 “제작은 이미 완료됐고 출고를 기다리던 중에 검사 하나가 마무리되면 또 다른 검사를 요청하는 식으로 5개월 동안 시간을 끌었다”며 “2015년부터 경찰청에 순찰차를 납품해 왔지만 이번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납기에 늦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N사의 계약 차량은 납품까지 5개월 넘게 걸렸고 H사의 계약 차량은 검사 하루 만에 출고 처리됐다”며 “그동안 경찰청 검사가 미진했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든 H사든 같은 잣대로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확인 안 했다? H사는 순찰차에 설치하는 리프트 경광등을 제작하는 업체로 현대자동차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Y사와 N사가 담합해 경찰청 계약을 10년 동안 수주해 왔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찰청은 조달사업법에 따른 나라장터 종합쇼핑몰 우선 구매 제도를 통해 (업체들과) 계약했다. 나라장터에 물건을 올리면 경찰청에서 선택하는 방식”이라면서 “우리와 N사는 같은 차종으로 경쟁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반박했다. 반면 오 보좌관은 순찰차 사업과 관련해 드러난 문제를 고치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시정되지 않자 보도자료를 통해 지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비서실에서 <일요시사>와 만나 “공무원이 어떤 업무를 하다가 다소간 실수가 발생할 수 있고 관행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걸 인정하고 시정하면 끝까지는 안 간다”고 말했다. 이어 “순찰차 관련 문제를 (경찰청에) 수도 없이 얘기했는데 고쳐지지 않았다. 1차 차량 검사에서 불합격이 나왔는데 2차 검사를 할 때 보니 1차에서 나온 문제가 하나도 시정되지 않았다. 3차 검사는 나도 모르게 진행됐다. 시험성적서를 달라는 말에도 개인 정보를 이유로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납품한 순찰차에 설치된 경광등이 사양서에 맞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오 보좌관은 “리프트 경광등의 핵심 기능은 주야간 150m 구간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납품된 것은 그게 안 된다. 30m만 떨어져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순찰차에 치명적인 장애”라고 비판했다. Y사 관계자는 “사양서가 존재하는데 30m 밖에서 안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경찰청에서 3회가량 시연회를 진행했고 현장에서도 더 밝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광등이 사양서와 일부 맞지 않는 건 애초에 사양서 자체가 H사의 제품에 맞춰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오히려 H사의 경광등이 경찰청 순찰차 사양서에 적용돼 2015년부터 2024년, 우리와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10여년간 독점적으로 사용됐다”고 반박했다. “현장 직원들 사이에서 고장이 잦아 수리 비용이 많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는 이 관계자는 “이번 일이 일어난 것도 H사가 자사의 경광등을 납품하기 위해 오 보좌관에게 문제 제기를 한 게 시발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정 안 해” “문제 없다” 순찰차를 납품하는 업체들이 자사의 경광등이 아닌 다른 업체의 것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H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Y사 관계자는 “2022~2023년 H사 경광등에 문제가 발생해 현대자동차가 납기를 놓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지난해 5~6월 경광등 납품업체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던 걸로 안다”고 주장했다. Y사 역시 H사와 경광등 발주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Y사 관계자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H사에 경광등 발주 견적서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납기가 (지난해) 12월12일까지라 우리한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해) 11월15일 경찰청과 경광등 업체를 바꾸는 문제로 협의를 진행했고, 11월26일에 바뀐 업체의 경광등으로 우리 공장에서 시연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H사는 순찰차 납품업체들과의 갈등을 ‘민원’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H사 대표가 신정훈 의원실 오 보좌관을 만나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내용이 지난 5월 나온 보도자료의 배경이 됐다는 의혹이다. 실제로 오 보좌관은 처음에는 민원을 받아 보도자료를 작성한 게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H사 대표를 만났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8월경 지역의 향우회장과 함께 H사의 대표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 보좌관이 경찰청의 순찰차 사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오 보좌관은 지난 5월14일에 나온 보도자료에 대해 묻자 “지난해 8월부터 이 문제를 파고 있었다”며 “내부에서 나온 정보도 있고 경찰청에서도 (순찰차 사업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문제로 경찰청 관계자를 30~40번 만났다”고 밝혔다. 눈여겨볼 대목은 H사 대표가 같은 시기 신 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냈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나주시·화순군 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신 의원의 ‘연간 300만원 초과 기부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H사 대표는 지난해 8월22일 500만원을 기부했다. 신 의원은 2014년 7월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고 20대(2020년), 21대(2024년)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다. 2014~2016년, 2020~2024년 등 신 의원이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동안 H사 대표가 후원금을 낸 건 지난해 8월이 유일하다. 경광등 업체 변경 문제 때문? “사기업 갈등에 보좌관이 왜?” 오 보좌관은 H사 대표가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을 알았냐는 질문에 “몰랐다”면서 “회계를 관리하는 직원은 나주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H사 대표에 대해 “이전까지 전혀 몰랐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체 정치후원금 모금 한도) 3억원 중에 500만원을 후원했다고 해서 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에 매달리겠느냐”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업체의 문제 제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했고, 자료를 받아보니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좌관은 “경찰차 특장 시장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아 뛰어드는 업체도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맨날 같이 했던 업체를 빼버리면 가만히 있겠나. 나는 Y사가 욕심을 부리면서 이 상황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해왔던 곳과 똑같이 하면 되지, 더 이익을 취하려 하느냐”고 되물었다. 업체 간 중재의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신 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민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신 의원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후원금을 냈다는 것이다. H사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일을 잘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후원금을 냈다. 지금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며 “사업을 접을까 생각할 정도로 머리 아픈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오 보좌관을 만나 민원을 넣었는지는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Y사는 신정훈 의원실발 보도자료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Y사 관계자는 “정부 기관에 납품하는 제품을 만드는 건 맞지만, 엄연히 사기업 간 일어난 일에 국회 보좌진이 개입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며 “기사가 나간 이후 우리 회사는 경제, 이미지 부분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경찰청과 지체상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업체 문제로 인한 지연이 결정되면 지체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차량 출고가 늦어지면서 보관을 위한 토지 대여료가 1억2000만원 정도 나갔다. 무엇보다 자회사인 N사의 신용등급 하락, 기사로 인한 이미지 훼손 등 무형적인 피해도 만만찮다”고 하소연했다. 받아쓴 언론 “취하해 달라” 한편 Y사는 신정훈 의원실에서 나간 보도자료로 기사를 작성한 매체 3곳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Y사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인해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으며 국민에게 경찰 장비 도입 과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며 “신청인(Y사)의 업무 수행 능력과 투명성에 대한 의구심을 야기해 치안 활동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어 정정보도를 구한다”고 조정을 신청했다. Y사 관계자는 “2곳의 매체에서 ‘기사를 내릴 테니 소를 취하해 달라’는 내용의 답변을 언론중재위원회에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