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남긴 것들

‘현대사 진실’ 역사의 한 장으로 남기고…


박정희 절대적 신임 속 7·4 남북공동성명 이끌어내
유신체제 확립에 앞장, 김대중 납치사건 막후서 주도
정계 은퇴 후 침묵, 역사적 사건 실체 어둠 속에 묻혀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유신의 실세’라 불렸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향년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락 전 부장은 지난 5월 지병으로 입원한 후 치료를 받아왔으나 최근 상태가 악화돼 결국 숨을 거뒀다.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관계자는 “이 전 부장이 뇌종양과 노환 등으로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45분 별세했다”고 밝혔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이자 은밀한 정치공작의 대명사로 불렸던 이 전 부장이지만 권불십년을 빗겨가지 못한 채 쓸쓸히 삶을 정리해야 했다.
이 전 부장은 19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공립농고를 나와 1946년 미군정이 운영한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했다. 군에서 육군 정보국 차장과 주미대사관 무관 등을 거친 그는 국방부 정보부대에서 CIA의 연락책을 맡으며 친미 정보통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육군본부 정보국 과장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5·16 군사정변에서 큰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5·16 이후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게 됐다. 이 전 부장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앉히는 것을 계기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미국통 군인에서
‘박정희의 그림자’로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39세의 나이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6년간 정권의 심장부에서 활약하게 된 것.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소내각’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이 전 부장은 박 전 대통령의 ‘심복’ 혹은 ‘그림자’로 불렸다.

그러나 1969년 10월 3선 개헌 파동이 나자 박 전 대통령은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했다. 그러나 일본대사로 간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그를 불렀다. 김대중 후보와 맞붙은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의 별명은 ‘제갈조조’.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쳐놓은 것 같이 머리가 비상하고 치밀하다는 뜻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대선 승리를 위해 탁월한 ‘책사’인 ‘제갈조조’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


이 전 부장에게 야당인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바람을 잠재우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남산 지휘부를 종합청사로 옮겨 선거공작을 지휘했다. 1971년 대선엔 관권 및 금권 선거가 총동원됐고 김 후보의 매서운 돌풍에도 불구, 박 전 대통령이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이에 김 후보가 선거 후 이 전 부장에게 “나는 박정희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 부장에게 졌소”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이 전 부장은 그렇게 박 전 대통령의 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970년 12월21일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 물러나기까지 3년간 박 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현대사의 중요한 한 장면 한 장면을 그려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1972년 5월 이 전 부장은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주석을 만나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갖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5월2일 그는 3명의 수행원과 함께 판문점을 넘어 비밀 방북을 했다. 3박4일간의 방북기간 중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이들의 회동은 심야에 이뤄졌는데 김 주석은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는 말로 그를 반겼다.

4일 새벽부터 시작된 남북비밀회담에서 남북은 강대국에 대한 공동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다. 이 전 부장은 북측으로부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7·4 공동성명의 기본 원칙’을 받아 돌아왔다.

김 주석으로부터 “훈장을 주고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청와대 습격은)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라는 사과도 받아냈다. 당시 이 전 부장이 김 주석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금강산 선녀도’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국가기록원 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방북 당시 ‘일이 잘못될 경우 자결하겠다’며 자살용 청산가리를 품고 갔던 각오만큼의 성과를 올리고 온 것이다.

이후 북측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해 박성철 제2부총리가 그해 5월29일부터 서울을 답방, 박 전 대통령 및 이 전 부장과 수차례 회담을 가진 끝에 이후락·김영주 명의의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72년 7월4일 이 전 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판문점을 넘을 때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평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아찔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 뒤 이 전 부장은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남북비밀회담 5개월여 뒤인 1972년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됐는데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직전 이 전 부장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북한에 이를 사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엄선포와 국회해산 대통령 간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유신체제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1972년 10월16일 이 부장 명의의 메시지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남한 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많아 질서를 세우기 위한 비상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북한에 통보된 것.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10월 유신은 “통일을 위한 비상조치”로 북한에 알려진 것이다. 
 
비밀스런 방북으로
남북비밀회담 성사

이 전 부장은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에 앞장섰던 것처럼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도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실제 지난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충성심과 권력욕에 발목을 잡히면서다.

그의 충성심은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주일대사 시절 생선 초밥을 좋아했던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오찬에 맞춰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공수했다는 것이다.

정재철 한나라당 상임고문도 회고록 <아름다운 유산>에서 이 전 부장에 대해 ‘만일의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을 정도로 박 전 대통령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분이셨다’고 적었다.

그러나 유신 실세로 입지를 굳히고 있던 1973년 12월1일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 전 부장에게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쿠데타 모의로 비화되면서 그의 권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전 부장의 심복이었던 윤 사령관의 발언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정치권 안팎의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를 정점으로 하던 군내 하나회 인맥이 대거 숙청당했다. 이 전 부장 자신도 ‘윤필용 설화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됐다.

김대중 납치사건도 이 전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분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무십일홍’을 겪은 이 전 부장은 그 해 12월 말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극비의 정보 문서들을 챙겨 영국령 바하마로 출국, 사실상 망명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정가의 추측이다.

그는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친필 편지를 받고서야 1974년 2월 귀국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전 부장이 자신의 치부를 폭로할 것을 우려해 귀국을 종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력에 뒤통수 맞고
몰락의 길로 내쳐져

이후 이 전 부장은 화려한 재기를 꿈꾸기도 한다. 1979년 제10대 총선에서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회’ 회장을 지내다가 공화당에 입당한 것.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1980년 12·12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리면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치 활동을 규제받았다.

당시 신군부가 밝힌 부정 축재 금액은 무려 194억원. 1980년 3월 그는 자신이 축재한 재산과 관련해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말해 한때 ‘떡고물’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쌓은 부에 대해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울산에 조선소를 유치하도록 하면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한 것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조선소 유치에 앞서 엄청난 규모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천정부지로 치솟은 시세차익을 거뒀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다,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결국 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전 부장은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그리고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음에도 광주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30년 가까이 외부와 접촉을 끊고 살아왔다. 1987년 언론에 “될 수 있는 대로 언론을 피하고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한 바 있다.



한때 시대를 호령했던 권력자였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방 밖으로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었다. 5~6년 전부턴 도자기 굽기도 그만뒀다.

이 전 부장 소유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넘어갔다.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1994년 매각됐다.

지난 5월 뇌종양 증세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지난달 31일 별세했다.

유족은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1녀이며 빈소는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빈소 안팎엔 이명박 대통령, 정운찬 총리, 김형오 국회의장, 원세훈 국정원장,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김태영 국방부 장관, 김승연 한화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정·재계 인사가 보내온 조화 160여 개가 자리했다.

특히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화환과 한광옥 민주당 상임고문의 방문이 눈길을 끌었다. 한 고문은 “고인은 비록 유신독재와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가담했지만 돌아가신 만큼 용서와 화해 차원으로 조문을 왔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용서와 화해를 강조한 만큼 그 뜻에 따라 다 용서해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전 부장의 죽음으로 역사적 사건의 실체는 영원히 시간 속에 묻히게 됐다. 그는 1985년 해금된 후에도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발독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묻는 연구자나 언론의 요청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박 전 대통령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는 과거사위의 발표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의 명예가 실추됐지만 죽기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끝까지 침묵, 역사적
사건 실체 오리무중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이 전 부장의 측근인 양희재 전 비서관은 “고인은 남북 대화와 조국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역사적 평가가 잘못돼 젊은 사람들은 이 전 부장의 부정적인 면만 알고 있다”면서 “지난 30년간 조용히 지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뒤안길로 물러선 분인데 역사적인 평가를 언젠가 해드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로 이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를 언급했다.

이 전 부장의 안장식은 지난 2일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서 열렸다. 안장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고인을 모셨던 양 전 비서관 등 100여 명이 참석한 상태에서 40여 분간 진행됐다.

양 전 비서관은 조사에서 “고인은 1972년 5월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 캡슐을 들고 방북, 그해 7월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며 “고인의 사명감과 조국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말로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당정 충돌’ 검찰개혁 엇박자 막전막후

‘당정 충돌’ 검찰개혁 엇박자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추석 연휴 전에 검찰개혁을 진행하려던 더불어민주당이 신중한 입장에 들어갔다. 검찰개혁 초안을 발표하려던 당의 의견에,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수장 정성호 장관이 다른 의견을 내면서다. 정 장관의 의견에 대해 여권 관계자들은 공개적으로 비판까지 했다. 당정 간 불협화음으로 검찰개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왔다. 당 지도부와 정부는 뒷수습에 나섰지만, 완전히 진화될지 관심이 모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계속 강조해 온 ‘검찰개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공언대로 ‘추석 전 검찰개혁 입법 마무리’를 목표로 속도전에 돌입한 가운데 친명(친 이재명)계 좌장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민주당 지도부와 결이 다른 의견을 연일 내놓으며 당정 간 불협화음이 나타났다. 속도전 앞두고… 민주당 국민주권 검찰 정상화 특별위원회는 지난달 26일, 회의를 열고 검찰개혁의 대원칙인 수사권·기소권 분리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확정할 방침이었다. 민주당은 이번 개정안으로 수사권·기소권의 분리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검찰청을 폐지한다. 그리고 기존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이관하기 위해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을 설치할 예정이다. 공소청은 기존 검찰의 기소권을 이관받아 기소와 공소 유지, 영장 발부 등 검찰의 고유 업무를 도맡는다. 중수청의 경우, 검찰의 수사 대상이었던 6대 범죄(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의 수사를 담당한다. 이 외에도 국수위 설치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수위는 국무총리 산하 기관으로 경찰을 비롯해 중수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 국가 수사 기관 전체를 통솔하는 시스템이다. 이번 검찰 조직 재편으로 수사 기능을 갖게 될 중수청을 행정안전부와 법무부 중 어느 소속으로 할지 등의 쟁점 현안들도 정리돼 개정안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검찰을 제외한 수사기관은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있다. 이들은 각각 행안부와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소속돼있다. 이 같은 초안에 대해 당 안팎에선 우려를 제기했다. 특히 국수위의 권한이 자칫 과도해지면, 정부의 수사 통제와 외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앞서 밝힌 것처럼 행안부 산하에 이미 경찰이라는 수사기관이 있는 상황에서 중수청까지 포함될 경우, 행안부의 수사 기능이 자칫 과도하게 커지는 것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공소청의 보완수사권에 대한 당과 정부의 이견도 걸림돌이다. 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 대원칙 측면에서 공소청에 보완수사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법무부는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가진 상황에서 원활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공소청에 보완수사권 부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6일 초안 발표 예정이었지만 구체안 두고 특위·법무부 입장 차 지난달 25일 민주당 검찰정상화특위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었지만 최종안을 내지 않았다. 민형배 특위위원장은 지난 7일 비공개 당정대 협의 후 기자들과 만나 “속도 조절론은 없다”며 이날 회의를 최종안 확정을 위한 데드라인으로 예고했지만, 180도 달라졌다. 대신 이날 회의는 법안의 완결성에 집중했다고 한다. 특위 간사인 이용우 의원은 "초안이 사실상 나왔다고 보면 된다"면서도 "그야말로 특위안이고, 당정대 간의 논의 과정이라든지 국민적 공론화를 해 나가는 과정이라든지 이 과정이 여전히 많이 남아서 최종적으로 가다듬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속도조절 배경에는 개혁의 주체이자 객체인 법무부의 입장이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송기헌 의원은 정 장관에게 ‘검찰개혁의 핵심이 수사와 기소의 분리냐’고 물었다. 이에 정 장관은 “그렇다”면서 “검찰이 수사를 개시하거나 인지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은 분리해낸다는 게 1차적인 목표”라고 답했다. 다만 정 장관은 “현재는 (검찰이) 보완수사 요구 또는 재수사를 할 수 있는데, (사건이) 핑퐁처럼 왔다 갔다 하다가 과거보다 사건 처리 기간이 2배 이상 늘었다”며 “이런 문제가 심화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사건) 전건 송치를 할 것인지, 전건 송치를 하지 않는다면 수사지휘권을 줄 것인지, 송치된 사건에 대한 보완 수사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부연했다. 정 장관은 민주당이 중수청을 행안부 산하에 두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상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경찰·국가수사본부·공수처·중대범죄수사청 4개 수사기관이 모두 행안부 밑에 들어가면 권한이 집중된다”고 우려했다. 또 기존 검찰청을 공소청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검찰은 헌법상 검찰총장 임명 관련 규정들과 검사 관련 규정들도 있기 때문에 위헌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정 장관의 다른 의견 국수위에 대해서는 “지금 나와 있는 안에 의하면 국수위가 경찰의 불송치 사건에 대한 이행을 담당하게 돼있는데 최근 통계에 4만건 이상 된다”며 “독립된 행정위원회가 4만건 이상 사건을 다룬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26일 예결위 전체회의에서도 국민의힘 정점식 의원이 ‘검찰 조직을 폐지하는 것이 적절하냐’고 묻자 정 장관은 “검찰을 해체한다고 표현하지만 저는 검찰이 수행해오던 기능을 재분배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에 대해 “민주당의 당론은 아직 아니”라며 “1차 수사기관, 특히 경찰의 부실·봐주기 수사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의원이 ‘검찰청 폐지로 검찰의 전문 수사 역량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는 취지로 질문하자 정 장관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주가조작 등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금융 범죄 또는 조세 사건은 굉장히 난이도가 높아 고도의 수사 기법이 필요하고 법리적 쟁점들이 많다”며 “이런 전문 수사 역량을 중수청에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은 회의 당일 페이스북을 통해 “검찰의 수사개시권과 인지수사권은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검찰개혁의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견설 진상은? 그러면서 “수사기관과 공소기관 사이의 ‘핑퐁’ 등 책임 떠넘기기, 수사 지연, 부실 수사로 인해 국민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현실적이고 촘촘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며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할 때 비로소 성공한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정 장관의 발언 이후 당 안팎에서는 정 장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 검찰개혁 특위 위원장인 민형배 의원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검찰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정 장관의 입장에 관한 질문에 “당 지도부는 장관께서 좀 너무 나가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민 의원은 “특위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고, 당정에서 합의됐거나 의논해서 한 건 아니”라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 의견을 말씀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이 행안부 산하 중수청 설치 방안에 우려를 밝힌 데 대해서도 “당에서 입장을 내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장관 본분에 충실한 건가, 이런 우려가 좀 있다”면서 “(장관이) 저희 특위 초안을 모르는 상태 같다”고 지적했다. 당 지도부의 의견을 내세워 정 장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이른바 ‘검찰개혁 4법’을 발의하고 관련 논의를 주도해 온 김용민 의원 역시 이날 페이스북에서 “바꾼다고 모든 것이 개혁은 아니다”라며 “개혁을 왜 하려고 하는지 출발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도부·정부 나서 진화 “당 결정대로 따라갈 것” 민주당과 정 장관의 의견이 갈리면서 ‘당정이견’설이 분출한 가운데, 당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28일 오후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에서 열린 국회의원 워크숍 지도부 인사말에서 “개혁의 작업은 한 치의 오차·흔들림·불협화음 없이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며 “이 과정에서 당정대는 원팀 원보이스로 굳게 단결해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김병기 원내대표도 “국민주권정부의 실질적 성과는 당정대 원팀 정신이 그 중심에 있다”며 “다음 주부터 우리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첫 정기국회가 시작된다. 이재명정부 국정 기조와 국정 과제의 실천을 (당이)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당정 일치 기조를 강조했다. 정부와 대통령실에서도 수습·진화에 나섰다. 이날 워크숍 현장에 방문한 정 법무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이견은 없다”며 “어쨌든 입법의 주도권은 정부가 아니라 당이 갖고 있다. 당에서 잘 결정되는 대로 잘 논의해서 따라갈 것”이라고 한발 물러났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도 당과 법무부 사이 이견에 대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만찬에서 전체적인 로드맵을 합의했다. 정부와 당이 각자 검찰개혁안에 대한 여러 가지 각론에 대한 의견들을 제기하기도 하고 수렴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당과 정부의 의견만 다른 게 아니라 당 내부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각각의 의견들이 다 도출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론화 과정에 이제 들어간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 내용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 수석은 “다만 바라건대 내용 자체의 토론에 좀 집중했으면 좋겠다”며 “특정인과 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공격 같은 건 하지 말고 이렇게 내용 토론으로 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법조계 의견은? 한편 법조계에선 정 장관이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평소 소신과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검사장 출신 한 법조인은 “정 장관은 외골수처럼 직진하기보다 남의 편을 설득하고 내 편을 혼내가면서 합의점을 찾는 정치를 해온 사람”이라면서 “강성 개혁에 집착하기보다는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변화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