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이슈&인터뷰>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4.01.27 13: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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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대통령 개인의 나라가 아니다"

[일요시사=정치팀] 민주당은 지난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에 항의하며 가장 뜨거운 여름을 천막당사에서 보냈고, 4월과 10월 재보선에서 참패하며 지지율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어느새 2014년 새해가 밝았지만 아직도 민주당의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민족의 대명절 설날을 맞아 절치부심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를 만나 민주당의 새해 계획을 들어봤다.




"정치가 꼬일 대로 꼬였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 10명 중 9명이 '국회가 잘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치혐오 수준이라는 지적이다. 지난해 국회는 정기국회 3개월간 법안통과 '0건'이라는 전무후무한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여야 모두 새해에는 달라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은 뼈를 깎는 쇄신을 공언하기도 했다. 과연 민주당이 계획하고 있는 새해 계획은 무엇일까? 지난해 원내대표에 취임하자마자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와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등 굵직한 현안을 놓고 정부여당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를 만나 민주당의 새해 계획을 들어봤다. 
다음은 전 원내대표와의 일문일답.

-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아 중점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현안은 무엇인가?
▲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개헌이다.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대통령에게 권력집중현상이 너무 심해 행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입법부, 사법부까지 대통령의 눈치만 보고 있어 정작 국민에게 필요한 일관성 있는 제대로 된 정책을 시행하기가 어렵다. 또한 박근혜정권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 개헌을 논의하기 딱 좋은 시점이다. 더 늦게 되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각자의 이해와 셈법에 따라 개헌논의를 이용하게 되는 측면이 생길 수가 있다.

- 또 다른 현안은?
▲ 지난 연말국회 때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들도 있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민생 회복을 위한 법안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특검이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국정원개혁의 경우 개혁입법을 해내어 국정원개혁의 단초를 마련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 또한 남양유업방지법, 임대차보호법 등 민생입법을 완수하는 데 목표를 둘 것이다.




- 민주당이 지난해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
▲ 오만과 독선, 독주로 일관하는 대통령과 과반이 넘는 거대의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통령바라기’만 하고 있는 새누리당에 맞서 국민을 위하는 국회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지난 정권에서 해왔던 부자감세 철회의 물꼬를 터서 부의 재분배를 하게 되었다는 점, 무상보육, 무상급식 등 복지예산을 확대 편성해 민주당이 주장해왔던 국민복지를 하게 되었다는 점, 쌀 직불금 인상으로 농민지원정책을 펼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학교비정규직 지원의 기반을 마련한 것 등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 박근혜정부의 지난 1년은 어떻게 평가하나?
▲ 거짓말과 약속파기의 1년이었다. 노인연금 공약파기, 무상보육 공약파기에 이어 기초선거 정당공천폐지 공약까지 파기하려고 하고 있다. 국가기관 대선개입의 전모를 밝히자는 야당과 국민의 요구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엇하나 시원한 것이 없다. 대통령은 묵묵부답이고 정부여당은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만 하고 있다. 또 역사 교과서 논란으로 촉발된 역사 우경화 움직임은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 0%로 국민들이 거부의사를 밝혔음에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도 역사왜곡을 하고 있으니 국내외적으로 역사가 몸살이 날 지경이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고하고 싶은 점은?
▲ 대한민국은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나라가 아니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아버지 시대를 꿈꾸는 것 같은데 대한민국은 그리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국민의 주권의식은 크게 신장됐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일궈냈다. 1970년대의 올드한 사고방식으로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새해에는 반드시 개헌, 1순위 목표" 
"발목잡기? 견제는 야당이 원래 할일"

- 대선개입 의혹에서부터 촉발된 국정원 개혁이 우여곡절 끝에 여야의 합의로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이번 개혁 법안 통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 절반의 성공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은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그냥 땅 속에 묻어두려고 했던 아주 악질적인 민주주의 위기 사건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것을 국회가 국정조사를 통해 지표 위로 드러내고, 국정원에 대한 국회통제권을 강화하고 정치개입을 근절시킬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 남은 과제는 수사권 조정, 대통령 직속기구에서 총리실 산하에 두는 등 국정원이 정보수집기관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위상을 조정하는 일이다. 정부여당의 반대가 매우 극렬하지만, 이미 국민들은 국정원의 역할 조정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2014년엔 지방선거와 대규모 재보궐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어떤 선거전략을 구상하고 있나?
▲ 분명한 것은 여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권이 하나가 되어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분열은 어떠한 해결책도 될 수 없다. 새누리당 정권 6년의 교훈을 야권은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새누리당 정권의 실정을 부각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거짓과 약속파기, 국민기만을 밥 먹듯이 하는 새누리당 정권에 대해 국민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박근혜 정권 1년 동안 새누리당이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보셨으면 한다.

- 민주당이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
▲ 입법부는 대통령을 견제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고 역할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대통령 견제의 역할을 한 것이 있는가?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고 방어막 치기에 급급한 1년이었다. 반면 민주당은 입법부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 지난해 국회가 정쟁에 빠져 민생을 챙기지 못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서 갑오년 새해에는 국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 정치혐오의 원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국회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됐다. 여당은 대통령 2중대 역할만 하고 있고, 대통령의 오더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식물정당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1년간 반복했다.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와 수많은 회동도 하고 전화도 하고 했지만, 결국은 대통령에게 막혀 버렸다. 대통령이 OK하지 않는 이상 새누리당도 OK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야가 이견이 있어 정국이 꼬여 있을 때는 대통령이 영수회담 등을 통해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 민주당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 야당이 맨날 발목잡기 한다고 하는데 야당이 정부여당을 견제하는 일은 원래 하는 일이다. 정부여당을 견제하지 않고 같이 웃으면서 사진 찍고 밥 먹고 한다면 그것이 책임과 역할을 방기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설을 맞이해 국민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
▲ 2014년은 청마의 해라고 한다. 푸른 말의 기운처럼 힘차고 박력 넘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정치를 불신의 눈으로만 보기보다는 왜 의견이 부딪히는지, 대립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내용을 봐 주셨으면 한다. 국가기관이 대선개입을 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는데도 국회가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상시처럼 지낼 수는 없다. 야당은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야당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앞으로도 국민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것이다. 끝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란다.


※ 당초 <일요시사>는 여야의 균형 있는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에게도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최 원내대표 측의 거부로 인해 부득이하게 민주당 측의 입장만 전하게 됐음을 알립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전병헌 원내대표 프로필>

▲ 1998 대통령 정무비서관
▲ 2002 국정홍보처 차장
▲ 2005 열린우리당 대변인
▲ 한국정학연구소 이사장
▲ 제5대 한국e스포츠협회 협회장
▲ 17~19대 국회의원
▲ 민주당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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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