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원로 릴레이인터뷰> ①새누리당 박희태 상임고문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4.01.27 14: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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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타협, 수없이 말해도 안 들어"

[일요시사=정치팀] 여야의 정쟁은 그칠 줄을 모르고,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2014년 대한민국 정치권의 현주소다. 이럴 때 정치 원로의 충고 한 마디는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의 빛줄기처럼 반갑다. 길을 잃은 정치권의 탈출구는 어디일까? <일요시사>는 신년을 맞아 정치 원로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준비했다. 민족의 대명절 설을 앞두고 새누리당 박희태 상임고문을 만났다. 




'정치9단 박희태가 돌아왔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지난 6일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으로 위촉되며 당에 복귀했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박 고문은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장관과 한나라당 대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MB정권의 개국공신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 헌정 사상 최장수 대변인으로 재직하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총체적 난국' '정치9단' 등 각종 정치어록을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정치9단 박희태라면 길을 잃은 대한민국 정치권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고 있진 않을까? 그래서 박 고문을 만나 정치권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물어봤다.
다음은 박 고문과의 일문일답.

- 지난 6일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당에 복귀하셨습니다. 당에 복귀한 소감과 앞으로 당에서 어떤 역할을 맡으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 직함 그대로 당에서 고문 역할을 할 것입니다. 다만 특별하게 당에서 자문을 요구할 때 나서는 것이지 스스로 먼저 나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박근혜정부에 대해 평가해주신다면?
▲ 박근혜정부는 이명박정부 초기와는 달리 커다란 문제점이 없기 때문에 잘 순항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정부 때는 임기 초 광우병 사건이 터져 정권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요동을 겪었습니다. 그에 반해 박근혜정부 초기에는 그런 일 없이 순탄하게 잘 넘어가고 있고, 국정도 잘 살필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 올해 최대 정치이슈는 단연 지방선거입니다. 새누리당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어떻게 하면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전략의 포인트입니다. 국민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니까, 그걸 지금부터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이 당의 몫일 것입니다.

- 올해 지방선거나 7월 재보선 출마 등 향후 제도권 복귀 계획은 없으십니까? 인물난을 겪는 새누리당에서 '선당후사'를 앞세워 적극적으로 권유한다면?
▲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출마에 대한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돌아온 정치9단, 정치권에 강한 쓴소리
기초 공천제 폐지와 개헌론엔 반대 입장

-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세지고 있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사실 안철수 의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해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안철수 현상과 관련해 안철수신당은 이제 막 스타트라인 서있는 것이지 아직 출발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안철수신당이 잘 뛴다, 국민들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평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안철수신당은 지금 한 발짝도 떼지 못했습니다.

- 안철수현상에 대해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기성 정치인들이 반성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기존 정치권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겠습니까?(웃음) 그동안 정치권이 나라 발전을 위해서 한 일도 많습니다만 한 가지 비판을 한다면 현 정치권은 타협정치에 대한 노력이 아주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타협입니다. 그런데 현 정치권은 타협을 하지 않고 너무 정쟁에만 치중해왔습니다.

-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논란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공천제 폐지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법으로 공천을 못하게 막는 것은 정당활동을 본질적으로 심대하게 침해하는 조치입니다. 헌법에 위반될 가능성이 큽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공천제를 폐지해봐야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공천제를 폐지해도 각 정당들은 공천 대신 사천을 할 것이 뻔합니다. (공천제가 폐지된 교육감 선거처럼) 우리 당에서는 기초의원 누구를 지지한다며 정치적으로 소문을 내고 후원을 해주는 것은 공천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 원칙적으로 반대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렇습니다. 과거 우리가 기초의원 공천제를 폐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전부 사천을 해서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공천을 폐지한다는 것은 하나마나 혼란만 일으키는 일입니다. 또 공천제가 폐지되면 국민들은 어떤 후보가 좋은지 선택하는 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정당이 공천을 해주면 국민들이 믿고 그 후보자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래서 공천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정치권의 또 다른 핫이슈인 개헌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모든 개헌은 이론적으로 고칠 부분이 있어서 고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잡기 위한 개헌이었습니다. 집권과 관련이 없는 개헌은 동력을 얻기 힘듭니다. 그런데 현행 헌법 하에서는 어떤 정파든 집권도 가능하고 정권을 탈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개헌에 대한 동력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실제로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단임제를 중임제로 고치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원포인트 개헌을 제의했지만 아무도 지지를 하지 않아 실패한 사례도 있습니다.


- 여야관계가 최악의 상황입니다. 정치가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도 많은데 여야관계 개선을 위한 조언을 하신다면?
▲ 한마디로 정리해 정치는 타협입니다. 타협은 정치의 본질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정치는 안 됩니다. 타협은 패배가 아니라 상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목을 베이면 베였지 절대 상대방에게 굴복은 안 당하겠다' 이런 생각이 팽배한 것 같습니다. 타협을 해서 반을 얻으면 대승이고, 3을 얻어도 승리고 이득입니다. 이대로라면 정치권은 공멸하게 될 것입니다. 빨리 여야가 타협을 해서 국민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국회가 되길 바랍니다. 사실 여야가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제가 그동안 수도 없이 주문해온 말인데 여야 모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아쉽습니다. 

- 이처럼 여야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국회선진화법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직권상정을 하신 경험이 있는데 국회선진화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회선진화법은 이상론에 너무 치우친 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현실을 좀 더 직시해야 합니다. 또 민주주의 기본원리인 다수결을 포기하는 법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발도 안한 안철수신당 평가 시기상조"
"국정원 특검, 공소시효 지나 소득 없어"

- 지난해 정치권의 최대이슈였던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 저는 지난 김영삼정부 시절 국회에서 국정원개혁특위를 만들어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국정원법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행법을 강하게 잘 집행하면 되는 것이지 (국정원 대공수사력 약화 우려 때문에) 더 이상은 못할 거라고 봅니다. 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고 있는데 특검은 정치개입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개입에 대해 단죄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가 벌써 1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 와서 특검을 한다고 해도 뾰족한 혐의점이 드러나겠습니까? 드러난다 해도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시끄럽기만 하고 소득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  야권이 요구하고 있는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는 야당 쪽에서 오래 전부터 꾸준히 요구를 해왔던 사안입니다. 과거에는 국정원이 소위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서 광범위한 수사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김영삼정부 시절 국정원 개혁을 통해 국정원의 수사권이 대폭 줄여 그야말로 간첩 사건에 대해서만 수사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전에는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이 '고무찬양죄'(반국가단체로 명명된 특정 집단에 대해 고무하거나 찬양하는 것)입니다. 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이 고무찬양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김영삼정부 이후에는 단순 보안사범에 대한 국정원의 수사권을 폐지해 더 이상 국정원의 수사권을 축소할 필요성은 없다고 봅니다. 국내 간첩 사건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국정원이 수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은 최근 고무찬양죄와 관련해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 이석기 의원의 경우는 단순한 고무찬양이 아니라 내란음모를 꾀했다는 것이 주요 혐의입니다. 단순 고무찬양은 아닙니다. 단순 고무찬양죄는 과거에 야당 의원들을 옭아매기 위해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는데, 제 기억에는 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한 번도 고무찬양죄가 문제가 됐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석기 의원의 경우 과거의 사례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박근혜정부의 성공을 위해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십니까?
▲ 박근혜정부는 지금도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정부의 성공이라는 것은 결국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첫째도 경제고, 둘째도 경제입니다. 경제에 올인하고 박근혜정부가 신년을 맞아 새롭게 발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 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박희태는 누구?

굴곡의 26년 정치인생

새누리당 박희태 상임고문은 무척 굴곡진 정치인생을 보냈다. 부산고검 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박 고문은 지난 1988년 민주정의당(민정당)에 입당해 13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박 고문은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당 대변인을 맡아 촌철살인 논평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 고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든 공신이기도 하다. 이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6인회의 멤버였고 대선 당시 이명박캠프 선대위 공동위원장이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후 18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토사구팽 당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요시사>와의 인터뷰 도중 '대표적인 친이계'라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박 고문은 "내가 친이계라면 공천에서 탈락했겠느냐"며 아직도 당시의 앙금을 털어내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 고문은 공천탈락에도 불구하고 그해 한나라당 당대표에 선출됐고 이듬해 경남 양산 재보선에서 승리하면서 국회에 복귀했다. 이후에는 입법부 최고의 자리인 국회의장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후에도 박 고문의 정치 굴곡은 계속됐다. 지난 2012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불거지며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이다. 박 고문은 1ㆍ2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으나 지난해 1월 이 전 대통령이 임기 말 단행한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돼 특별사면을 받았다.

특별사면을 받은 후 지난 해 2월부터는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지난 6일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당에 복귀했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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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