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말한 대구 여대생 의문사 전말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4.01.14 10: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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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놓친 DNA는 범인을 기억했다

[일요시사=사회팀]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15년 전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인 ‘정은희 사건’을 언급했다. 이번 기자회견으로 인해 의문사로 오랫동안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던 이 사건이 뒤늦게 주목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민원을 보낸 유족의 한을 풀어줬다고 강조했다. 15년 동안 풀지 못했던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일 오전 춘추관에서 신년 기자회견 중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을 언급해 세간에 화제가 됐다. 박 대통령은 “전국 각지에서 청와대에 민원이 많이 오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그중 기억나는 얘기를 하나 해 드리면 15년 전 사망한 여대생의 아버지가 죽은 딸이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됐는데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를 해결한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역대 정권 때마다 이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그냥 형식적인 답변만 오고 해결이 되지 않았다”면서 “아버지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겠나. 다시 조사를 했더니 15년 만에 범인이 잡혀서 유가족이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대통령 지시로
재수사한 사건

청와대에 답지하는 민원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언급한 박 대통령. 15년 전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로 묻힐 뻔했다. 하지만 최근에 성폭행범이 붙잡히면서 15년 동안 마음 고생한 유족의 한이 풀렸다.

박 대통령은 대구 여대생 사망사건을 국민과의 소통 사례로 언급하면서 이 사건을 재부각시켰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민원을 통해 국민의 고충이 해결된 사건을 ‘소통의 사례’로 꼽으면서 15년 전 발생했던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을 언급했다.


이 사건은 1990년대의 대표적 의문사 중 하나로 오랫동안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1998년 10월16일 대학교 축제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충격으로 구마고속도로를 헤매던 도중 23톤 덤프트럭에 치여 숨진 정은희(당시 18세)양의 이야기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대구 달서경찰서는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현장 인근에서 발견된 정양의 속옷에서 남성의 정액이 검출됐음에도 성범죄 가능성을 조사하지 않은 것이다.

신년 기자회견서 정은희 사망사건 언급
15년 전 경·검 단순 교통사고로 마무리

미심쩍은 마음에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68)씨는 생계 수단이던 채소 장사를 접고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지난해까지 무려 15년 동안 수차례 수사 경찰관을 고소하거나 재수사를 요구하는 민원을 냈다. 정씨는 사고 현장에서 30m 떨어진 풀숲에서 딸의 속옷을 찾아 증거자료로 제출했지만, 경찰은 “지나가던 아줌마들이 벗은 것을 가져다 자기 딸 것처럼 주장한다”고 말하며 증거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 정씨는 지난해 4, 5월 청와대에 세 차례 민원을 제기했다. 또한 정씨는 죽은 딸을 위해 법학을 독학한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는 정씨의 민원 내용을 대구지검에 내려보냈고 대구지검 형사1부(부장 이형택)가 재수사를 벌였다. 검찰은 3개월여간 수사 끝에 정양의 속옷에서 발견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던 정액 DNA와 2011년 다른 성범죄에 연루돼 채취한 스리랑카 국적의 산업연수생 K(47)씨의 DNA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K씨를 체포했다.

대구 여대생 사건
진실 알고 보니…

성폭행(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 기소된 스리랑카인 K씨는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피고인은 DNA 재감정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 지난 10월11일 대구지법 제12형사부(최월영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이날 첫 공판에서 피고인 K씨는 “15년 전 피해자 정양을 만난 적도 없고 당연히 성폭행을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K씨는 “구미고속도로 근처 성폭행 현장에 가지도 않았으며 검찰이 공범으로 지목한 다른 스리랑카인 2명이 실제 그런 일을 벌였는지도 나로서는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K씨는 또 서울대 법의학 교실을 비롯한 복수의 전문기관을 통해 유전자 재감정을 실시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변호인은 “STR 기법으로 유전자 일치 여부를 검사하려면 최소 16∼17개의 시료가 필요한데 검찰이 과연 이런 요건을 충족시켰는지 의문스럽다”며 “무엇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유전자 검사를 했는지 검찰이 관련 자료를 전혀 제출하지 않고 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수사 결과 산업연수생이던 K씨는 사건 당일 같은 국적의 공범 2명과 정양을 구마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로 끌고 간 뒤 차례로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친 날마다 재수사 민원
얼렁뚱땅 묻힐 뻔한 참사
범인 붙잡히면서 한 풀어

당시 유족들은 청와대와 법무부, 인권위 등 무려 60여차례에 걸쳐 탄원서와 진정서를 냈지만 경찰의 재수사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족들이 인터넷에 정양의 추모홈페이지를 개설해 이 사건이 주목받았고 지난해 5월 대구지검이 수사에 나서 성폭행범을 검거했다.

정씨는 지난 6일 한 언론과의 통화에서 “청와대가 (민원을) 받아줘서 사건이 해결된 건 맞다”면서도 “경찰이 성폭행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피해자 가족의 알 권리를 위한 법이 제정돼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대표적인
민원 해결 사례

결과적으로 범인은 잡았지만, 경찰은 사건 당시 성폭행 정황을 확인했으면서도 수사를 덮어버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박 대통령 기자회견 직후 이성한 경찰청장은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이 언급할 정도로 억울한 일이 다시는 발생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라며 “경찰이 더욱 철저하게 수사에 임해 잘못된 부분을 밝혀내도록 마음가짐을 다져야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대구 여대생 사건으로 대구 검·경찰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민원에 따른 수사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진행할 증거가 부족해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구지검 관계자는 “2010년 7월 말부터 흉악범에 대해 DNA를 채취하는 법안이 시행됐고 스리랑카인 K씨의 DNA는 2011년 11월에 K씨가 미성년자를 성매매 하려다 검찰에 적발돼 채취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법 시행 직후에는 사실 검찰과 경찰의 DNA 정보 공유가 거의 되지 않았고, 추후에 이 부분이 지적됨에 따라 2012년쯤부터 정보 공유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당시 여대생의 속옷에 묻어 있던 정액 DNA가 K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나왔다”며 “지난해 5월쯤 여대생의 아버지가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청와대에도 청원을 했고 대검을 거쳐 다시 지법으로 해당 사항이 내려와 재수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수사를 진행할 여건이 마련돼 시작한 것이었지 민원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대학축제 마치고 귀가 중 트럭에 치여
외국노동자 집단 성폭행이 부른 사고

대구 여대생 사망사건은 지난 10월28일 열린 대구지방경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질타를 받았다.


대구지방경찰청 대강당에서 열린 국감에서 국회 안정행정위원회 소속 민주당 박남춘(인천 남동갑) 의원은 “15년 전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던 여대생 정양의 의문사 사건이 검찰의 재수사로 외국인 집단 성폭행이 가져온 참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경찰의 수사를 지적했다.

박 의원은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은 유족이 현장 주변에서 발견한 속옷 등 증거를 토대로 성폭행 의혹을 제기했지만 오히려 핀잔을 주며 묵살했다”며 “국가기관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질타했다.

경찰 수사 태도
도마에 올라…

민주당 유대운(서울 강북을) 의원은 “지난 5월 대구에서 발생한 여대생 살인 사건 당시 경찰의 초동수사가 미흡했다”며 “15년 전 정양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꼬집었다.

유 의원은 “당시 경찰이 숨진 여대생의 친구들에게 술집에서 접근한 남성이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음에도 수사에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며 “피해자의 휴대폰이 범인의 주거지 인근에서 마지막으로 꺼졌고 범인이 성범죄자로 등록이 돼 있었음에도 용의선상에 전혀 올려놓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누리당 이재오(서울 은평을) 의원은 “지난해 경찰 조직문화수준 진단조사 결과 대구 경찰이 10개 분야에서 모두 꼴찌였다”며 “대구 경찰의 비창의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가 조직발전에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2013년판 대구 여대생 살인사건

택시기사 잡고 보니…부킹남 공익요원이 범인

지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다. 지난 5월25일 오전 5시10분께 대구시 북구 산격동에서 여대생에게 성폭행을 시도한 뒤 마구 폭행해 살해하고 이튿날인 16일 오전 2시30분께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의 한 저수기에 시신을 유기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여대생이 귀가하기 위해 택시를 타자, 다른 택시를 잡아 뒤따라간 범인은 신호 대기 중이던 택시를 발견하고 자신이 남자친구라며 합승한 뒤 산격동으로 방향을 돌려 자신의 원룸으로 끌고 가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100여명의 형사가 밤잠을 설쳐가며 일주일 동안 수사한 끝에 범인을 검거했지만 초동수사에 미진한 부분이 있어 많은 질타를 받았다. 

이 사건을 일으킨 조모(27)씨는 성범죄 전과(2011년)자로 성범죄자 알림e사이트에 신상이 공개됐던 인물이었다. 조씨는 대구 지하철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중이었으며 거주하던 대학가 원룸 근처의 술집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했다. 범인은 지난 5월25일 피해자와 대구 중구 소재의 한 클럽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이?날 새벽 4시께 피해자는 범인과 헤어져 대구 중부소방서 앞에서 택시를 잡았고 이때 외국인 한 명이 택시비 2만원을 내줬다는 진술이 있었다. 만취 상태였던 피해자를 태운 택시가 신호 대기 상태일 때, 범인은 자신을 피해자의 남자친구라고 둘러대며 택시에 합승해 목적지를 북구로 변경했다.

범인은 클럽에서부터 피해자를 계속 뒤쫓아가며 기회를 노린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범인은 정신을 잃은 피해자를 데리고 모텔로 향했으나 빈 방이 없어 결국 자신의 원룸으로 이동해 성폭행 후 살해했다. 그리고 시신을 경북 경주의 한 저수지에 유기했다.

피해자의 가족은 사건 당일 오후 5시께 딸이 ‘아는 언니와 술을 마시고 들어가겠다’는 문자를 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며 실종신고를 했다. 다음 날, 경주의 저수지에서 여성의 변사체를 발견했다는 낚시꾼의 신고로 살인 사건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사건을 접수 받은 경찰은 당일 피해자를 태웠던 택시기사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고 택시기사 A씨를 긴급체포했다. 택시기사 A씨는 혐의를 부인했고, 이후 A씨가 범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택시에 동승했던 조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 체포했다. 경찰은 피의자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그리고 지난 10월25일 대구지검 형사3부는 조씨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했다. 실제로 피의자 조씨는 범행 직후 자신의 여자친구와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피해자와 처음으로 만났던 클럽에도 태연하게 드나들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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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