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현정은 ‘사생결단 승부수’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4.01.02 11: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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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서 꺼낸 히든카드…묘수냐 악수냐

[일요시사=경제1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재계를 대표하는 여성 오너다.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세자녀를 둔 가정주부에서 그룹 총수로 변신, 지난 10년간 그룹을 이끌어왔다.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크고 작은 풍파가 끊이질 않더니 해운업 불황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시월드’와의 갈등도 새나왔다. 현 회장은 결국 회사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또 한 번 눈물의 결단을 내렸다. 최근 시장에서 제기된 현대그룹의 유동성 문제에 미온적 태도로만 일관해오다 자구책을 내놓은 것이다. 핵심은 그룹의 돈줄 역할을 해오던 금융업 철수. 고심하던 현 회장은 현대증권을 포함한 금융계열 3개사를 파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지난 2003년 남편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타계 후 그룹 총수 직에 오른지 딱 10년째에 맞는 일이다. 

“돈 되는 건…”
현대증권 포기

현대증권은 현 회장에게 의미가 남다른 회사다. 1962년 설립된 국일증권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77년 인수하면서 그룹 내 금융사업의 주춧돌 역할을 해왔다. 남편인  정 전 회장이 2000년 ‘왕자의 난’에서 승리했을 당시 현대건설과 현대증권을 ‘그룹 적통’의 양대 기반으로 삼기도 했다.

현대증권이 현 회장에게 단순히 핵심 금융계열사로서의 역할을 넘어 ‘옛 현대그룹의 계승자’인 셈이다. 2010년 시아주버니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의 대결에서 현대건설을 넘겨주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현 회장에겐 그룹 정통을 이어갈 마지막 기반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운경기 악화로 현대상선의 유동성 압박이 거세지자, 채권단은 현대증권 매각을 포함한 고강도 자구계획을 요구해왔다. 현 회장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진그룹, 동부그룹 등이 3조원 이상의 ‘통큰’ 구조조정안을 내놓으면서 현대그룹에 가해지는 압박도 더욱 거세졌다.


장고 끝 결단…돈줄 팔고 4개 사업부문 재편
‘손실만 6000억’낸 대북사업은 그대로 유지

매각 카드 외엔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현 회장은 결국 정통을 포기하는 통탄의 결단을 내렸다. 현대그룹은 이 자구안을 바탕으로 최소 3조 3400억원의 자금 조달하고 1조 3000억원가량의 부채를 탕감, 2조원의 유동성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세부적으로는 현대증권, 현대자산운용, 현대저축은행 등 매각을 통해 7000억∼1조원 이상을 마련할 계획이다. 현대상선이 보유한 항만터미널사업의 일부 지분을 매각과 벌크 전용선 부문 사업구조 조정을 통해서는 약 1조5000억원을 확보할 방침이다.

현대상선이 보유한 국내외 부동산과 유가증권, 선박 등도 4800억원에 매각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유가증권, 부산 용당 컨테이너 야적장, 미국·중국·싱가폴 소재 부동산 등이 포함된다.

자산 매각 외에도 현대상선의 외자유치 추진,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 현대로지스틱스 기업공개 등으로 3200억원 이상을 마련할 예정이다. 또 내부 구조조정, 반얀트리호텔 매각 등을 추진해 총 3400억원 이상을 조달키로 했다.

이를 통해 현대그룹은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로지스틱스 등 주요 3개사의 부채비율을 지난 3분기 말 493%에서 200% 후반대로 대폭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 웨이’
남편 뜻 유지


뼈를 깎는 그룹 구조 개편에도 적자를 면치 못하는 현대아산은 사업을 유지키로 했다. 대북사업을 담당하는 현대아산은 국내여행 사업 등 일부 사업은 경영개선 조치에 나설 방침이지만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등의 대북 사업 조직은 그대로 놔둔다는 방침이다.

이는 남편 정 전 회장이 살아생전 아버지인 정 전 명예회장의 뜻을 받아 공을 들였던 회사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의 유지를 이어가겠다는 현 회장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 회장은 지난 8월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정 전 회장의 선영을 찾은 자리에서 “한길을 개척해 나간 정 회장의 꿈과 도전정신을 잘 이뤄나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시아주버니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 등에 의지하지 않고 자구책을 마련한 것도 남편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생전 남편이 형들과 형제의 난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 전 회장 사망 이후 현 회장 역시 범 현대가와의 경영권 분쟁을 수차례 반복해왔다. 일부에서는 현 회장을 두고 ‘시련의 여인’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정 전 회장이 사망한 2003년,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현 회장과 정상영 KCC 명예회장 사이에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시숙의 난’이 벌어졌다. 당시 현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국민기업화’라는 빅 카드를 내밀었다. 즉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현대엘리베이터가 ‘국민주’를 발행하는 것이다.

국민이 주주가 되는 주인 없는 회사가 되고 현 회장마저도 소유권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될지언정 현대그룹을 KCC그룹으로 계열화시킬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내린 결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주주총회에서 최종 승자를 가리기로 했고, 주주들이 현 회장의 손을 들어주면서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시숙의 난부터
시동생의 난까지

2006년엔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사전 협의 없이 매입하며 현대그룹과 맞섰다. 이른바 ‘시동생의 난’. 현대그룹은 당시에도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파생상품 회사와 계약을 맺고 우호지분을 확보해 가까스로 경영권을 지켰다.

2007년에도 ‘사단’이 벌어졌다. 현대그룹은 경영권 보호를 위해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주주 이외의 제3자에게 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정관변경을 시도했으나 범 현대가의 강한 반발로 관철되지 못했다.

2010년엔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정면충돌이 있었다. 현대건설 인수전과 관련해서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현대차그룹이 이의를 제기했고 우선협상자가 현대차그룹으로 바뀌는 곡절을 겪었다.

결국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함으로써 현대차그룹은 현대건설을 통해 현대상선 지분 7.7%를 보유하며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

고 정몽헌 사망후 시댁가와 갈등·반목 반복
경영권 방어만 집착하다 주력사업 손실 누적


2011년 현대상선의 주총에서도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 등 범 현대가의 표 대결이 전개됐다. 현대그룹이 올린 우선주 발행 한도 확대 안건은 범 현대가의 반대로 부결됐다. 당시 현대중공업과 KCC, 현대산업개발 등이 주총에 참석해 반대표를 던졌다. 찬성 64.95%, 기권·무효·반대가 35.50%로 안건이 가결되지 못 했다.

재계에선 현 회장이 잇따라 경영권 분쟁을 빚으면서, 경영권 방어에만 집착한 것이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고 분석한다.

실제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우 그룹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재무적 투자자와 체결한 파생상품 계약에서 큰 손실을 부담해 영업흑자가 났음에도 2011년, 2012년 연속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현대상선 주가 하락으로 입은 손실만 7000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에 “이 파생 계약으로 현대엘리베이터에 신용 위험을 전가시켰다”며 현 회장을 상법 신용공여 금지 규정 위반 혐의로 지난 11월 말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금강산 관광 등 대북 사업 중단과 주력 사업인 해운업이 불황 사이클을 타고 있다는 점도 현대그룹의 발목을 잡았다. 1998년 11월18일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2008년 7월11일 발생한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으로 5년 넘게 중단돼 있다.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지금까지 입은 매출 손실만 6000억원에 육박한다. 현대상선은 해운업 침체로 2011년부터 현재까지 1조 4000억원이 넘는 누적 순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허리띠 조르고
몸집 줄이고


과정이 어찌됐건 전환점을 맞은 현대그룹의 앞날은 ‘해운’과 ‘대북사업’으로 점철될 예정이다. 해운(현대상선), 물류(현대로지스틱스), 산업기계(현대엘리베이터), 대북사업(현대아산) 등 4대 사업을 새롭게 그룹의 축으로 조정한다. 해운과 대북사업이 전면에 서고 산업기계와 물류 산업이 그룹의 수익 창구로 발돋움하도록 사업 구조를 재편한다는 게 현대그룹의 방침이다.

물론 우려도 나오고 있다. 현대증권 매각 등 자구책 세부 계획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없을 뿐 아니라 해운업계 시황 회복이 더뎌 자금 확보에 악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현대그룹에 입성한 후 오너의 자리에서 가시밭길을 걸어온 지 어언 10년. 그룹의 회생을 위해 내린 현 회장의 결단이 과연 현대그룹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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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