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다시 등장한 김종필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2.16 14: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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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시대’ JP가 움직인다

[일요시사=사회팀] 한국 정치사는 김종필 전 총리의 정치 인생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최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 전 국무총리는 살아 있는 한국 정계의 거목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 이후 잠잠했던 그가 5년10개월 만에 국회에 나타났다. 존재감은 여전했다. 현 정국에 그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을 무엇일까.




지난 10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국회를 찾았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운정회’ 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운정회는 그가 한국 산업화 시대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자는 취지로 결성됐다. JP의 국회 방문은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던 2008년 2월 이후 처음이다. 무려 5년10개월 만이다. 그는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칩거해왔다.

운정회 창립총회
참석차 국회방문

JP는 이날 흰색 밴을 타고 국회에 도착해 휠체어에 앉았다. 이완구 새누리당 의원과 정진석 국회사무총장이 행사장까지 JP의 휠체어를 밀어 눈길을 끌었다. JP는 국회 헌정기념관 1층에 도착해 전시돼 있는 자신의 두상을 둘러봤다. 행사장 안에는 참석자 30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김종필’을 연호하며 칭송했다.

이들은 발기문을 통해 “우리는 지난날 운정 김종필 전 총리를 모시고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데 참여하고 헌신해 왔다”며 운정 선생은 고 박정희 대통령을 지도자로 추대, 국구 충정으로 5·16혁명을 주도해 최빈국 대한민국을 세계 속의 선진대국으로 도약시키는 데 초석을 놓으셨다“고 평가했다.

이어 “두 차례의 총리와 9선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등 4개 정당의 총재와 대표를 역임해 오신 우리 현대사의 주역이며 산 증인”이라며 “우리는 한평생 국태민안을 위해 헌신해 오신 운정 선생의 공업을 기리며 뜻을 같이해 온 동지 상호 간의 친목을 증진시키고자 김 전 총리의 아호를 빌려 운정회 발기인총회를 개회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대회사와 축사에 나선 주요 인사들은 김 전 총리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삼김 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며 풍운아와 같은 삶을 살아온 점을 환기시키며 조국근대화에 대한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정운찬 전 총리는 “운정 선생님의 명성을 처음 대한 것은 20세가 채 안 된, 대학에 입학하고 난 직후였다. 선배들이 거사의 정당성을 설파하실 때 보여주신 선생님의 논리적인 언변을 전설처럼 들려줬다”며 “선생님은 대한민국 현대사 자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마이크를 잡은 JP는 40여분간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원고 없이 자신의 정치 역정을 연설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특히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할 수 없다)’을 인용했다. 그는 “배가 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느냐”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성과를 언급했다. 8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했지만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저는 나라는 팔아먹지 않았다. ‘제2의 이완용’도 아니다”라며 “그 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했고, 거기에서 생산된 철로 현대자동차와 조선업도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JP는 “이제 갈 곳은 죽는 곳밖에 없는데 국립묘지(현충원)에 가지 않고 우리 조상이 묻히고 형제들 누워 있는 고향(부여 선산)에 가서 눕겠다. 누구나 늙으면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기면 죽는 경로를 밟는데 저도 ‘생로병’까지 왔다”며 남은 인생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한 국회 사랑재에서 강창희 국회의장, 김수한·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한동·이홍구 전 총리 등과 환담하는 중에 강 의장이 “정치가 시끄러워 죄송하다”면서 조언을 구하자 “야당은 실권을 쥔 사람들을 때려 얻어내려고 하지 말고 져주면서 얻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야당은 집권당을 상대로 머리를 쓰고, 지면서 이기는 방법을 모색해야지 물리력을 쓰면 결국은 손해”라고 했다.

5년10개월 만에 외출…존재감 드러내
나타난 속내는? 돌아온 속사정 주목

또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일으켜서 비가 많이 오고 홍수가 날 지경인데도 홍수가 안났다고 하지만 그 효과 때문이 아니다”면서 “박 전 대통령 시절 산에 못 들어가게 하고 벌거벗었던 산이 파랗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한 가지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것을 이롭게 해주셨나 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모르면 공부를 해서라도 어제를 잘 알아야 한다”면서 “그래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충청권 인사가 대거 결집했다. 회장을 맡은 이한동 전 총리와 전혁직 국회의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부회장을 맡은 새누리당 이완구, 정우택, 성완종 의원을 비롯해 이인제 의원,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정진석 국회 사무총장 등 충청권을 기반으로 내년 지방선거나 당권 등을 노리는 인사들 등 400여명이 대거 참석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운정회 발족을 계기로 충청권이 세 결집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행사에 참석한 새누리당 충남도당 관계자는 “운정회 창립총회를 계기로 충청권이 다시 뭉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 아니겠느냐”면서도 “JP는 현실 정치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시 돌아온
‘영원한 2인자’

JP의 외부활동이 그나마 가능한 현 시점에서 이러한 결집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권 내부가 본격적인 세 결집으로 분주한 모습을 보이면서 계파 또는 지역 등을 기반으로 한 각종 모임으로 세 확장에 나설 모양새다. 근대 당내 모임이 잇달아 출범하더니 충청권 기반 모임까지 결성된 것. 이들은 나름의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내년 지방선거 등을 겨냥한 행보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새누리당 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임을 보면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을 꼽을 수 있다. 친박계 의원이 주축인 이 모임은 빠르게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출범 당시 33명에 불과하던 회원 수는 현재 70여 명에 이른다. 이 포럼 관계자는 “하루에도 몇 명씩 회원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유기준 최고위원이 총괄간사인 이 모임엔 홍문종 사무총장과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등 친박 핵심인사가 대거 포진했다.

당대 최고 공부 모임인 ‘근현대사역사교실’도 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차기 당권주자로 거론되는 김무성 의원이 주도하는 이 모임의 회원(의원) 수는 109명에 이른다. 왼외 회원은 23명이다. 이 모임 관계자에 따르면 매주 수요일 열리는 모임엔 50∼60명의 회원이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최근 불거지는 역사논쟁에서 보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근현대사역사교실은 보수층 결집 의도를 담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새누리당 중진인 남경필 의원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도 눈여겨볼 만하다. 회원 수 62명 가운데 20명 안팎이 매주 목요일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여권은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총궐기하고 있다. 더군다나 5년 만에 나타난 충청권 보스인 JP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의도 정가에선 보수대연합이 촉발될 수 있다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의 행보가 앞으로 정치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봐야할 일이다. 반면 범야권은 연일 전략부재를 노출한 데 이어 안철수 무소속 의원의 신당 추진 등으로 분열 조짐이 일고 있다. 박근혜 정부 1년 차 말기에 나타나고 있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지방선거 노린
여권의 결집?

김종필 전 총리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는 유복한 소년기를 보내며 공주중과 공주고를 졸업했다. 졸업 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예과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곧 중퇴, 귀국후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났다. 그러나 그는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에 그만두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리고 1960년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그는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자신의 처삼촌인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61년 5·16 군사정변을 준비한다.

5·16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대령으로 진급했고 준장까지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고 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면서 중앙정보부가 신설됐다. 그는 제1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군사 정변 직후 그는 장인 박상희의 경력과 관련해 사상 공세에 시달렸고, 황태성이 남하한 후에는 한일회담 직전까지 야당인사들로부터 수시로 의혹을 받았다.

62년에는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들은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렇게 재건당을 조직해 민정에 군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기 위한 창당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63년 그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했고 중앙정보부장직도 사퇴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했다.

한편 꾸준히 육사 5, 6기생들의 견제를 받던 그는 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사퇴하고 순회대사의 자격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여러 곳을 역방하고자 출국했다가 귀국하여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다. 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그해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됐다.


65년에는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논란이 일었다. 식민지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 이후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 협상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그는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공적 기리는 ‘운정회’
보수결집 신호탄 되나

64년부터 한국에서는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시위가 일어난 것.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해 반대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했다.

67년에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지만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후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면서 JP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차기 유력주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민주공화당 내에는 그를 지지하는 파벌이 나타났다. 이것이 박 전 대통령이 그를 경계하는 원인이 되어, JP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JP는 당원직을 사퇴하고 일시적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 전 대통령과 갈등했고 75년 12월 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된다. 77년에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남미를 순방한 바 있고, 79년 제10대 국회의원에 재선했다.

현충원 아닌…
고향에 누울 것


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그해 11월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됐다. 이후 JP는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각했다.

80년 5월에는 보안사에 체포돼 감금당했다. 신군부는 관제보도를 통해 JP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이때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전두환을 증오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다.

이후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87년까지 야인생활을 했지만, 그해 다시 정계에 복귀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돼 민주공화당과 국민당을 흡수했다. 그리고 87년 8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 결과는 4위였다. 이후 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삼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했다. 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JP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YS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92년에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 재선임되고, 95년 민자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해 독자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후 일부 영남권 인사들을 포섭하고 군부 출신 인사들과 지지층의 표심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96년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97년,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DJ와 손을 잡고 DJ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일명 DJP연합), 그해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자민련을 이끈 JP는 2000년 실시된 제16대 총선에서 원하는 의석을 얻지 못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된 것이다.

2004년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자,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JP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종결됐고, 대통령에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JP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갑자기 뇌놀중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재활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다. ‘JP’라는 약칭은 정치가로 활동할 당시 JFK(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본따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알파벳 이니셜’의 원조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김종필은?]

▲충남 부여 출생
▲공주고 졸업
▲서울대 교육학 학사, 육군사관학교 학사
  페어리디킨슨대 등 명예박사학위 9개
▲제 1대 중앙정보부 부장
▲제 6대 공화당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당의장
▲제 7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부총재
▲제 8대 국회의원
▲제 11대 국무총리
▲제 9대 국회의원
▲제 10대 국회의원
▲제 13대 국회의원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제 15대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
▲제 31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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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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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후폭풍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과 검찰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면서 서로를 향해 날을 겨누는 형국이다. 검찰청은 내년 9월 폐지될 시한부 운명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필두로 이참에 검찰의 뿌리를 뽑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을 등에 업고 버티기에 나선 검찰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아 당분간 양측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검이 대장동 사건에 대한 항소 시한을 넘기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중앙지검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을 비롯해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등 대장동 일당에 대한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은 것이다. 꺾이거나 되치거나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게 됐다. 대장동 개발 비리로 발생한 범죄수익의 국고 환수 규모가 축소될 것이란 해석에도 힘이 실린다. 화살은 곧바로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사건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 등을 받는데, 이미 대장동 민간업자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 만큼 항소 포기로 인해 추가로 다툴 여지를 차단했다는 게 국민의힘의 설명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이 항소 포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재명 면죄부’라고도 주장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대변인은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비서관 4명 중 3명, 법무부 장관 정책보좌관, 법제처장, 국정원 기조실장까지 모두 이 대통령의 변호인 출신”이라며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사건 주요 피고인 정진상, 김용, 이화영 등을 특별 면회하면서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발언으로 회유를 시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역시 “국가의 유례없는 사법 정의 포기 사태는 이재명정부의 책임”이라며 “공소 사실의 핵심에 무죄 선고가 난 사건에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통령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부 출범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한 노만석 검찰총장을 겨냥해서는 책임론이 불거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항소 시한을 앞두고 서울중앙지검은 대장동 일동에 대해 일부 무죄가 선고되는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1심 판결에 대해 “관행대로 항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를 전해 들은 대검 수뇌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노 대행은 지난 9일 “대장동 사건은 일선 검찰청의 보고를 받고 통상의 중요 사건의 경우처럼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후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대행인 저의 책임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의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 역시 대장동 일동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이 선고된 만큼 항소 포기가 ‘적절한 판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항소 포기 지시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화약고에 불붙인 ‘항소 포기’ 후폭풍 이재명·노만석·정성호 몽땅 도마 위로 정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이진수) 법무부 차관에게 대장동 사건 관련으로 어떤 지시를 했느냐’는 국민의힘 배준영 의원의 질문에 “노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 항소를 알아서 포기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정 장관은 총 3번 정도 대장동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언급하며 “(두 번째인) 11월6일 목요일에는 국회에서 예결위 종합질의가 있어 국회에 왔는데, 예결위 끝나고 대검에서 항소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 의견을 들었다”며 “당시 ‘중형이 선고됐는데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란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인 11월7일에도 마찬가지”라며 “저녁에 예결위가 잠시 휴정돼 검찰에서 항소할 것 같다는 구두 보고를 식사 중에 받았고, 그날 저녁 예결위가 끝난 후 최종적으로 항고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부연했다.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대목을 놓고 국민의힘은 “신중한 검토(판단)가 곧 항소 포기인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법무부가 사실상 외압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이 8글자에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다”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며 검찰에 지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일선 검사를 중심으로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영석 대검찰청 감찰1과 검사는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를 통해 “검찰 역사상 일부 무죄가 선고되고 엄청난 금액의 추징이 선고되지 않은 사건에서 항소 포기를 한 전례가 있었나”라며 이번 결정으로 대장동 일당 등 민간업자에게 수천억원 상당의 범죄수익이 돌아간 점을 꼬집었다. 대장동 사건의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도 “항소 포기로 남욱·정영학을 상대로는 범죄수익을 단 한 푼도 환수할 수 없게 됐고, 김만배를 상대로는 당초 예상 금액의 1/10에 불과한 금액만 추징 선고가 이뤄졌음에도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막힌 타이밍 검찰 안팎에서 책임론이 확산하자 결국 노 대행은 항소 포기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일선 검사들은 ‘검찰총장 권한대행께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항소 포기 과정에 대한 상세 설명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해당 입장문은 박재억 수원지검장을 비롯해 ▲박현준 서울북부지검장 ▲박영빈 인천지검장 ▲박현철 광주지검장▲임승철 서울서부지검장 ▲김창진 부산지검장 등 검사장 18명 명의로 작성됐다. 이들은 “서울중앙지검장은 명백히 항소 의견이었지만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항소 포기 지시를 존중해 최종적으로 공판팀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을 상대로 항소 의견을 관철하지 못하고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면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어제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의 항소 의견을 보고받고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뒤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책임 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하담미 수원지검 안양지청장 ▲최행관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신동원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등 8개 대형 지청을 이끄는 지청장들도 집단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번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지시는 그 결정에 이른 경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검찰이 지켜야 할 가치, 검찰의 존재 이유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라며 “그간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입장문, 법무부 장관의 설명만으로는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법적·행정적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정치 검사들의 반란을 분쇄하겠다”며 검찰의 집단 반발을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징계를 예고했다. 현재 일반 공무원은 6단계 징계 처분(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이 가능하지만, 검사는 파면에 해당하는 징계 규정이 없다. 검사에 대한 징계는 검사징계법에 따라 이뤄지는데, 이를 ‘검사 특혜법’이라고 지적하며 폐지하겠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정치 검사들의 반란에 철저하게 책임을 묻겠다”며 사실상 검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김 원내대표는 “정 법무부 장관께 강력히 요청한다. 항명 검사장 전원을 즉시 보직 해임하고 이들이 의원면직하지 못하게 징계 절차를 바로 개시하라”며 “항명에 가담한 지청장과 일반 검사들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후 김 원내대표가 검사징계법 폐지 법률안·검찰청법 개정안을 각각 국회에 제출하면서 사실상 검찰 징계는 당론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항소 포기 논란 이후 박재억 수원지검장에 이어 송강 광주고검장이 연달아 사의를 표명했지만 민주당은 “사표를 수리하지 말고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퇴로를 막았다. 항명? 투쟁? 법무부 내부에서 집단행동에 나선 일부 검사장을 대상으로 평검사 보직이동을 하거나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으로 형사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검찰 측에서는 “보복용 강등”이라는 거센 반발이 나오지만 법무부는 “검사장은 직급이 아닌 보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강등·징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검사장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며 징계의 타당성을 주장했지만, 일선 검사들은 항소 포기 판단 경위에 대해 추가 설명을 요청한 것이 어떻게 항명이냐며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이 앞다퉈 일선 검사장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르던 것과 달리 최근 지도부는 숨 고르기에 돌입한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계속해서 이정부와 대장동을 엮어 공격하는가 하면, 이 대통령의 UAE(아랍에미리트) 순방 성과가 묻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톤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 대통령이 순방을 떠난 17일부터 이틀간 공개 석상에서 검사 항명, 징계 등 관련 현안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 등 일부 최고위원이 내란전담재판부 도입을 주장했으나 당은 “지도부 차원의 의견은 아니”라며 거리를 뒀다. 정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18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검사장 징계 검토 관련 질문에 “어떤 것이 좋은 방법인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을 위해 법무부나 검찰이 안정되는 것”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택했다. 낮은 볼륨을 유지하는 지도부와 달리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한 라디오를 통해 정 법무부 장관의 ‘검찰조직 안정’ 발언에 대한 질문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가는 것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어 “정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와 검찰 전체를 총괄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면서도 “다만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현재 민주당이 내세우는 원칙은 항명 검사에 대한 징계로,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국민 여론이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몰아붙이던 지도부 잠시 숨 고르기 이제는 각개전투…검사들도 ‘부글’ 민주당이 다수 석을 차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는 ‘집단 항명 검사장 18인’ 전원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항소 포기 결정에 반발하는 검사장 18명을 겨냥해 “헌정 질서의 근본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조직의 지휘 감독체계를 정면으로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비판하며 법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일 법사위 여당 간사인 김용민 의원은 조국혁신당·무소속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검찰의 집단 항명은 정치적 집단행동으로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었으며 법이 명백히 금지한 공무의 집단행위, 즉 집단적 항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피고발인 18명은 모두 각 검찰청을 대표하는 검사장급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이 누구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위치에 있다”며 “그런데 이들은 서로 합의해 공동성명을 작성하고 이를 동시에 내부망과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다수가 결집해 실력으로 주장을 관철하려는 집단적 압력 행위”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검사들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권력이 교체됨에 따라 검사의 태도 역시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만일 보수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경우 검사의 날이 다시 이 대통령을 향할 것이란 점에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내년 10월 해체 예정인 검찰청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니던 시절의 관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 검찰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집단이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검사 인사권은 법무부에 있다”며 이번 사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통령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대통령실 외압’은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의 프레임”이라며 “만약 5년 뒤에 검찰이 반기를 들면 그때는 (이 대통령의 거취를) 국민 여론에 맡기면 된다. 지난 몇 년간 수십번의 압수수색과 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를 전부 국민이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피바람 과도기 이 모든 과정을 놓고 최요한 정치 평론가는 “과도기”라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일요시사>를 통해 “검찰이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그 대상을 개혁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이정부는 그걸 시스템으로 헤쳐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혁명은 싹을 자르면 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검사 징계, 검찰개혁을 놓고 같은 진보라 하더라도 결이 다르지 않나. 다양한 논의와 의견을 두들겨 맞춰서 하나의 안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개혁안은 보수도 일정 정도 동의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스템 개혁이라는 건 단칼에 두부처럼 잘리는 게 아닐뿐더러 이정부가 끝날 때까지 (개혁을) 시도하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