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군산 살인 미스터리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8.12 13: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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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었는데…때아닌 꽃뱀 공방

[일요시사=사회팀] 군산에서 실종된 이모씨가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숨진 이씨와 내연 관계였던 정모씨로 밝혀졌다. 정씨는 경찰출신답게 수사에 혼선을 줬지만 끝내 붙잡혔다.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몇 가지 불편한 부분이 남아 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지난달 24일 오후, 평소 알고 지내는 정씨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가 실종된 이씨는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관인 정씨가 이씨를 살해하고 유기한 것이다. 정씨는 지난 2일 신출귀몰 도피행각 끝에 논산에서 붙잡혔다. 정씨는 경찰에 “이씨가 임신했다며 돈을 요구했고, 액수가 적다며 부인에게 불륜 사실을 알리겠다고 해 우발적으로 목을 졸랐다”고 진술했다.

경찰과 이혼녀…
불륜이 빚은 참극

정씨는 해군에서 전역한 뒤 1999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정씨는 주로 지구대와 파출소에서 근무했고 교통계와 생활질서계에서도 근무했다. 이번 범행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최근까지 경찰청장 표창 1개와 지방청장 2개, 시도지사 1개, 서장상 16개 등 모두 20개의 표창을 받았을 정도로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다. 다만 사회생활에는 미숙한 면을 보였다. 그는 동료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으며 낚시를 주로 즐기는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14년 경찰 경력을 바탕으로 지능적이고 치밀하며 특히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대담한 행동까지 벌이는 등 경찰을 당혹시켰다.

정씨는 지난달 25일 이씨 실종과 관련해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지만, 연관성을 거부하고 나아가 강압 수사라고 반발하며 버틴 끝에 6시간 만에 풀려났다. 이에 앞서 휴대전화의 통화기록과 메시지를 지우기도 했다.


경찰 조사 후 그는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집 반대방향으로 승용차를 몰아 강원도 영월로 이동해 옷가지를 구입해 변장을 하기로 했다. 특히 경찰의 추적을 의식해 지난달 26일 영월에 승용차를 버리고 곧장 대중교통편으로 대전, 전주, 군산을 거쳐 고향 인근의 대야터미널로 오는 대담함을 보였다.

특히 이런 행적의 단서가 될 승용차 안 블랙박스 영상을 모두 지워 경찰을 당혹스럽게 했다. 정씨의 치밀함과 수사 시선을 돌리기 위한 고의 행동을 엿볼 대목도 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26일 대야터미널에서 택시로 회현면 시골마을까지 이동했다. 이후 약 3시간30분 동안 이씨의 옷을 숨기거나 시신유기 또는 증거인멸 등의 중요 행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주민과 경찰 수사망을 피하려고 일부러 인적이 드물고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시골마을에서 내려 어두운 밤에 논길로 이동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정씨는 군산에서 오래 근무해 주변 지리와 주민 이동 특성에 밝은 점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여기에 다음 날 발견된 이씨의 옷가지는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당일 밤 일부러 주민 왕래가 잦은 농로 옆 밭에 놓았다는 게 경찰의 추정이다.

임신 여부 확인할 수 없어…시신 부패 심해
일방적인 피의자의 진술…팔은 안으로 굽나


정씨가 지난 2일 충남 논산시 취암동에서 검거될 당시 그는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이런 정황으로 봤을 때 정씨는 경찰 추적을 피하고자 동선 파악이 어려운 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씨를 검거한 충남 부여경찰서 이희경 경위는 지난 5일 SBS 라디오 한수진의 <SBS 전망대>에 출연해 “(정 경사)본인이 순순히 응하고 저항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경위는 검거 당시에 대해 “앞서서 걸어가고 있던 젊은 남자(정씨)가 배낭을 메고 양 옆으로 물병을 두 개를 끼고 있었고, 뒤에서 보니까 자전거 뒷바퀴에 흙도 묻어 있었다”며 “순간 젊은 남자가 혹시 군산 실종사건 용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걸어오는 모습이 군산 사건 용의자와 얼굴형도 비슷하고 연령대도 비슷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썼는데 턱선 쪽으로 들어간 부분도 비슷해서 지켜봤는데 그가 PC방 쪽으로 걸어갔다”며 “논산 시민이라면 샤워를 하고 PC방을 갈 텐데 바로 PC방을 가서 용의점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 경위는 “군산과 부여나 논산은 가까운 인적이기 때문에 언젠가 한 번 지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며 “평소 검문검색도 하고 있었고 스마트폰 메일에도 용의자 얼굴을 알 수 있도록 저장해놓고 근무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어느 정도 확신을 한 이 경위는 논산 지구대 경찰관 두 명과 함께 2층 PC방으로 올라갔다. 경찰관 2명이 다가가 신분을 확인하자 정씨는 처음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을 대자 “본인이 맞다”며 고개를 숙여 현장에서 바로 체포됐다.

이씨가 실종된 직후 참고인으로 소환됐던 정씨는 “이씨와는 알고 지내는 친구 사이일 뿐 내연 관계는 아니다”라며 “최근 만난 적이 없고 성관계를 가진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두 사람의 불륜이 드러났다.

이씨 가족들은 “두 사람은 내연 관계였다”며 “최근 이씨가 정씨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았고, 지난달 24일 병원비 등을 받고 그동안의 관계를 마무리짓기 위해 정씨를 만나러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혼한 상태고, 정씨는 유부남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내연 관계라면 보통 행적을 알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본인이 누구를 만나는지 알리고 나간 것으로 봐서 관계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이씨가 감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등에 따르면 실종된 이씨와 군산경찰서 소속이었던 정씨는 1년 전쯤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두 사람을 소개한 친구 역시 동료 경찰관이며 이씨와 내연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의 전 애인인 동료 경찰관이 정씨에게 자신의 애인을 ‘사귀어 보라’고 소개해 줬다”며 “정씨는 ‘임신한 아이가 동료 경찰관의 아이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던 상태였다”고 말했다.

동료가 이씨 소개
“내 애인 만나봐라”

정씨는 이씨와 7월 초 성관계를 한 차례 가졌으며, 이씨는 같은 달 17일 정씨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이씨의 임신 소식을 들은 정씨는 이씨의 연락처를 스팸 처리하는 등 그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이씨는 정씨에게 “전처럼 약속을 취소해서 일 못 보게 하지 말아라” “너와 나 사이를 다른 사람이 알면 좋겠냐” “만나 달라” “집에 찾아가겠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 이씨가 임신했다고 하자 정씨는 지난달 22일 적금 500만원을 찾았다. 정씨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지난달 24일 이씨를 만나 “300만원을 줄 테니 그만 만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씨는 금액이 너무 적다며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정씨를 협박했다. 이씨가 부인에게 불륜 사실을 알리겠다며 정씨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가려 하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씨가 정씨의 얼굴을 할퀴었다. 정씨는 자신의 차 안에서 이씨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시신을 군산시 회현면 월연리 폐양어장에 유기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씨 시신에 대한 부검을 마쳤지만 임신 여부를 밝혀내지 못했다. 국과수는 시신 부패 상태가 심해 여러 차례 검사해야만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씨의 휴대전화 기록을 분석한 결과 이씨가 실종되기 전 ‘7월11일에 생리를 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나 이씨가 임신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씨-유가족 간 입장 엇갈린 채 ‘미궁’
진실 아는 건 범인 정씨와 숨진 이씨뿐

하지만 너무 압축적으로 마무리된 탓에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살해된 실종 여성의 가족들은 “살해된 것도 억울한데 꽃뱀으로까지 몰리고 있다”고 절규하고 있다.

이처럼 이씨의 유족들은 반발하고 있다. 이씨의 여동생은 “정씨의 범행은 계획적인 것”이라며 “경찰 수사에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고 덧붙였다. 임신 여부에 대해서는 “언니로부터 정씨에게 빨간 줄이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를 보여줬더니 정씨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숨진 이씨의 임신을 확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들은 피해자는 돈을 목적으로 정씨를 만난 것이 아니며 임신 역시 사실이라는 입장이다. 또 우발적으로 그녀를 살해했다는 정씨 진술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임신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번 사건으로 전북지방경찰청은 군산경찰서장을 직위 해제한다고 밝혔다. 지난 3일 오후 전북지방경찰청은 브리핑을 갖고, “이 사건이 비록 경찰관 개인의 도덕성 결여에서 비롯된 범행이지만 경찰관 신분으로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점에 대해 국민여러분께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그 책임을 물어 군산경찰서장을 직위해제키로 했다”고 전했다.

향후 정확한 사인규명을 위해 부검, 도주 행적 등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우발적 살해?…
주도면밀한 범행

군산 실종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시끄럽다. 특히 꽃뱀 비하로 번진 임신 논란이 그렇다. 피의자 정씨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이번 사건의 발단은 불륜, 전개는 임신, 절정은 낙태와 합의금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임신 여부가 확인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이씨가 임신을 하지 않았음에도 정씨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했고, 정씨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돈 문제로 다투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됐다.

그러나 경찰관이 시민을 살해한 사건이라는 본질은 뒤로 간 채 살해당한 이씨를 ‘꽃뱀’으로 몰아가는 듯한 사건 구조에 유족들은 크게 반발했다. 실제로 몇몇 누리꾼들은 오히려 피의자인 정씨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씨는 열흘 동안 경찰의 수사망을 피했고 체포 당시에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대다수의 언론은 ‘범행 전체 자백’으로 기사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정씨의 자백이 진짜인지는 보장할 수 없다. 정씨의 자백이 공개되면서 이씨는 돈밝히는 ‘꽃뱀’으로 몰리게 됐다.

경찰이 정씨를 그냥 풀어준 것도 문제다. 이씨의 동생은 지닌달 25일 오후 2시30분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신고당시 “정씨를 만나러 간 뒤 안들어 온다”고 전했다. 실종 용의자로 정씨를 지목한 것이다. 경찰은 실종신고 당일 오후 7시 정씨를 임의동행해 조사했다. 정씨의 얼굴에는 할퀸 상처가 나 있었다. 수사관이 상처에 대해 묻자 “낚시할 자리를 고르다 나뭇가지에 긁혀 생긴 상처”라고 답했다. 경찰은 낚시터 인근 CCTV에서 정씨 차량이 7시18분쯤 찍힌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정씨의 휴대폰과 손상된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확보한 후 귀가조치했다. 신고가족들이 용의자를 지목했고, 얼굴에 상처가 있으며, 블랙박스가 훼손돼 증거인멸이 우려된 상황에서 정씨는 풀려났다. 경찰은 긴급체포를 할 수 있는 법리적 요건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인데다 정씨 본인도 불법구금이라고 반발해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용의자를 놓아준 셈이 됐다.

‘꽃뱀’ 몰아가기
사건 본질 흐린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의 맹점은 경찰의 수사발표가 증거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찰수사는 증거주의를 채택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유족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에 경찰은 경찰관인 살해용의자의 진술에 더 의존해서 발표를 서둘렀다. 진실은 죽은자와 죽인자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유족들이 겪을 고통을 고민하지 않았다. 즉 경찰은 애초부터 ‘꽃뱀과 모범경찰관’이라는 프레임으로 이 사건에 접근한 것이다. 최소한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닐까’는 오해는 나오지 않았어야 한다.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피의자·피해자 자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

어른들의 불륜과 살인사건은 아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자녀는 모두 두 명이다. 피의자 정씨의 자녀는 정씨 검거 전에 ‘아버지의 얼굴이 실린 수배 전단’을 보고 “엄마, 아빠가 무슨 잘못했어?”라고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숨진 이씨의 자녀들은 나이가 더 많아 직접적인 상처가 더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씨의 자녀들은 현재 전 남편과 함께 있다. 전 남편에 따르면 두 자녀는 아무 말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하루 종일 ‘엄마의 기사’와 ‘거친 댓글’을 읽고 있다.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살인자 아버지’를 둔 자녀와 ‘인터넷 상의 숨진 꽃뱀’을 어머니로 둔 아이들의 아픔은 누구도 씻어 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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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자승자박’ 정청래 리더십 위기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리더십이 위기다. 1인1표제가 통과된 이후 힘을 받나 싶더니,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문제와 2차 종합특검 후보 논란 등 악재가 겹치면서 연임에 적신호가 켜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시시각각 리더십 시험대에 올랐지만 결국 대권가도의 길을 걸었다. 정 대표도 무사히 ‘이재명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를 ‘일시 중지’하기로 결론지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의원총회서 민주당 의원들은 대체로 지방선거 전 합당 추진을 중단하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진다. 충분한 논의 없이 합당을 띄워 당을 혼란스럽게 하고, 당·청 관계까지 어색해진 만큼 ‘정청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리더십은 타격을 입게 됐다. 더 좁아진 운신의 폭 이날 정 대표는 국회에서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연 뒤 브리핑에서 “오늘 민주당 긴급 최고위와 함께 지방선거 전에 합당 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대신 지방선거 후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연대와 통합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이하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을 결정하고, 혁신당에도 준비위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로서 혁신당과 통합을 제안한 것은 오직 지방선거 승리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한 충정이었다”며 “그러나 통합 제안이 당 안팎에서 많은 우려와 걱정을 가져왔고, 통합을 통한 상승 작용 또한 어려움에 처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자리에서 의원들의 말씀을 경청했고 민주당 지지층 여론조사 지표도 꼼꼼히 살피는 과정에서 더 이상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당 안팎의 여론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을 혼란케 한 점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정 대표는 “그동안 통합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은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국민 여러분과 민주당 당원들, 혁신당 당원들께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당초 이달 13일 입장을 밝히겠다던 혁신당은 날짜를 앞당겨 지난 11일 긴급 최고위원회를 열고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혁신당 조국 대표는 통합추진준비위 구성에 동의하며 6월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다. 민주당을 향한 뼈있는 말도 이어졌다. 조 대표가 “선거 후에는 통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내용과 방식에 대한 논의를 책임감 있게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혁신당은 민주당에 흡수되는 방법을 피하고자 했던 만큼 합치는 방식에 대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합당의 최대 과제로 남아있다. 조 대표는 “양당 간 회동이 이뤄지면 먼저 민주당이 제안한 연대가 지방선거에서의 연대인지 아니면 추상적 구호로서의 연대인지 확인해야 한다”며 “지방선거 연대가 맞다면 추진준비위에서 그 원칙과 방법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든 과정에서 양당은 상호 신뢰와 존중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특정 정치인 개인과 계파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국민과 양당 당원께 또다시 실망을 드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동 걸린 민주당-혁신당 합당…다음 복안은? ‘쌍방울 변호인’까지…제대로 꽂힌 ‘2연타’ 조 대표는 정 대표의 사과를 수용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 대표는 “정 대표께서 혁신당 당원에게 표명한 사과를 받아들인다”며 “혁신당 당원은 당으로 향해지는 비방과 모욕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혁신당 박병언 선임대변인도 회견 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이) 단순히 연대라고만 표현했는데 우당 간 레토릭적 연대를 의미하는지, 실질적으로 두 당이 지선을 치러낸다는 선거 연대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민주당의 답변을 요구했다. 앞서 민주당은 합당이 아닌 ‘지선 이후 통합’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민주당의 답변에 따라 향후 당의 대응이 달라질 것으로 풀이된다. 합당 논의가 중지되면서 당이 숨 고르기에 들어가나 싶더니 2차 종합특검으로 추천된 전준철 변호사가 새로운 불씨가 됐다. 민주당이 추천한 전 변호사는 2023년 ‘불법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등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1심 이후 사임했지만, 친명(친 이재명)계에서는 “이재명 죽이기” “제2의 체포동의안 사태” 등 격하게 반발했다. 친청(친 정청래)계로 분류되는 이성윤 최고위원이 전 변호사를 추천하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 변호사는 검사 시절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 한동훈 채널A 사건 등을 담당했다. 이 최고위원은 “(전 변호사가) 윤석열·김건희 수사를 할 때 서슬 퍼런 윤 총장하에서도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게 수사했다”며 “이번 2차 종합특검의 중요성에 비춰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확한 팩트 확인 없이 전 변호사가 김성태 대북 송금 조작 의혹 사건을 변호했고, 그런 변호사를 추천함으로써 마치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처럼 의혹이 확산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정·이 차이는? ‘윤정부에서 탄압을 받은 변호사’를 강조했지만, 민주당을 설득시킬 명분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이번 2차 종합특검 추천 과정에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사과했다. 정 대표도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정 대표는 해당 사태를 인사 검증 실패에 따른 ‘사고’로 규정하고 “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책임은 당 대표인 저에게 있다. 대단히 죄송하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도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사태는 이 최고위원을 향한 사퇴 압박으로 이어졌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인사 사고가 아닌 정청래 체제를 향한 불만이 표면화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무산과 후보자 논란으로 정 대표의 리더십이 2연타를 맞으며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연임 가능성도 불투명해졌다. 정 대표는 직접 연임 여부를 밝히지 않았지만 1인1표제 등 당원의 힘을 강화하는 작업에 공을 들이며 대권주자로 나서기 위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혁신당과의 합당 이후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끈다면 공은 정 대표에게 돌아간다. 그 성과를 토대로 대표 연임에 성공한 뒤 차기 대권까지 밟는 이른바 ‘이재명의 길’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여의도가 바라본 이재명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친문(친 문재인)계가 민주당을 꽉 쥐던, 시절 그는 한 줌의 계파도 없이 고군분투하며 기득권에 맞섰다. 온건파 사이에서 파격적인 개혁을 앞세워 당원들의 갈증을 해소했고, 이들을 ‘개딸(개혁의 딸)’로 묶어 본격적인 팬덤 정치에 나섰다. 당 대표 시절에는 대선에 출마하려는 대표의 사퇴 시한인 ‘대선 1년 전’에 예외를 두는 내용의 당헌을 바꾸면서 극심한 내홍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당시 이재명 대표는 자신 있게 뜻을 밀어붙였고 전당대회서 최종 득표율 85.4%로 연임에 성공했다. 리더십 심폐소생 권력의 정점에 선 이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비주류에서 주류로 거듭나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정 대표는 그런 거친 이재명의 길 초입에 들어섰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사이다 화법’으로 지지 세력을 키우는 시도는 이 대통령과 매우 유사하다. 이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했던 1인1표제를 정 대표는 해냈다”면서도 “서둘렀던 게 문제다. 합당도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당 대표이던 시절부터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때는 민주당이 야당이었고 윤석열·김건희라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 친명과 비명(비 이재명)이 매일같이 싸워도 봉합할 명분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차이는 측근의 유무다. 이 대통령은 성남시장일 때부터 함께해 온 이른바 ‘성남 라인’이 존재했고, 김현지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실장 등 측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며 “친청을 자처하는 의원들이 있지만 이들을 측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김어준·유승민 두 사람이 정 대표에게 영향을 주는 인물로 꼽히지만, 그들조차도 자기 정치에 당 대표를 쓰는 느낌이 든다. 누가 중심이고, 누가 휘둘리는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승부수를 던지지 않는 한 지방선거가 정 대표의 마지막 리더십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지방선거에 사활을 걸어 ‘압승’을 끌어낸다면 무너진 리더십을 다지는 건 물론 8월 전당대회 출마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당장은 정 대표가 타격을 받았지만 선거 국면을 통과하면서 과오가 희석되는 흐름에 기대를 건 셈이다. 민주당은 오는 4월 중순까지 모든 지방선거 공천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다만 경선 규칙과 공천 룰 등을 두고 계파 간 갈등이 재점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모든 권력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한 정치권 관계자의 말처럼 반대 여론을 찬성 여론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리더십이 판가름 난다. 시계를 돌려 2024년 4월, 이 대통령 역시 당 대표이던 시절 공천 시즌을 앞두고 ‘비명횡사’ 논란에 휩싸였다. 현역 의원 의정평가 하위 20% 통보를 박은 이는 6명으로 모두 비명계였던 만큼 의원들 대다수가 ‘친명’을 내세워 마케팅을 이어갔다. 이, 비주류서 180석 야당 대표로 지선 앞둔 대표님의 큰 그림은? 공천 갈등은 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고 민주당이 패배했던 2012년 총선이 되풀이될 것이란 당내 우려가 커졌다. 하루가 멀다고 나오는 사퇴 요구에 이 대표는 “툭 하면 사퇴 요구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사퇴하면 1년 내내 대표를 바꿔야 한다”며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친명과 비명 간의 갈등은 “환골탈태 과정에서 생기는 약간의 진통”으로 진단했다. 이 대표의 리더십이 총선의 최대 걸림돌로 여겨졌지만, 180석 공룡 야당을 탄생시키면서 여론을 뒤집었다. 정 대표 역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합당 논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지방선거 승리에 올인하겠다”며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습 행동으로 당을 흔들지 종잡을 수 없어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는 것이 지방선거를 앞둔 첫 번째 과제로 여겨진다. 정 대표는 ‘억울한 컷오프를 최소화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11일에는 “공천 과정 전반의 불공정·불합리한 사례를 사전에 점검해 신뢰받는 공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노력하겠다”며 공천신문고 구성 안건을 의결했다. 이날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이 합당 과정에 여러 가지 내홍을 겪고 걱정을 끼쳐드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 일은 빈틈없이 해왔다”며 “민주당은 공정한 경선을 통한 공천, 투명한 공천이 지방선거 승리의 요체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당 대표의 이 같은 의지가 (공천신문고) 제도를 통해서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이재명 모델’로 노선을 잡았지만 ‘제2의 ○○○’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선을 앞두고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은 이 대통령의 ‘중도 보수’ 전략까지 정 대표가 따라 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권교체에 손을 들어줬다. 이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 즈음이면 정권 유지든 교체든 국민의 마음속에 새로운 잣대가 세워질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좌우 통합을 이뤄낼 지도자를 원할지, 지금보다 조금 더 강경한 지도자를 원할지는 현 정부에 달려 있다. 그 시대에 맞는, 또 국민이 원하는 사람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될 것”이라고 봤다. 신선한 뉴페이스? 이어 “이 대통령은 후임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의 민주당은 당 대표도, 차기 대권주자도 ‘포스트 이재명’이 아닌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며 “이 대통령의 행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재명 그림자에만 메어서는 민주당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여야 갈등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설을 앞두고 민생 회복과 국정 안정을 위한 초당적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대표를 오찬에 초대했지만,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불참을 통보했다. 장 대표는 “(이번 회동이) 부부 싸움하고 둘이 화해하겠다고 옆집 아저씨 불러놓는 꼴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어 “오늘 회동에 가면 여야 합치를 위해 무슨 반찬을 내놨고, 쌀에 무슨 잡곡을 섞었고 그런 것들로 오늘 뉴스를 다 덮으려 할 것”이라며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무너지는 소리를 덮기 위해 여야 대표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으로 모든 걸 다 덮으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밤 민주당이 추진하는 이른바 ‘재판소원법’과 ‘대법관증원법’이 국민의힘 반발 속에 여당의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정청래 대표는 SNS를 통해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힘의 작태에 경악한다”며 “본인이 요청할 때는 언제고 약속 시간 직전에 이 무슨 결례인가. 국민의힘, 정말 ‘노답(답이 없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청와대도 “이번 회동은 국정 현안에 대한 소통과 협치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데 깊은 아쉬움을 전했다”고 밝혔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