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돌아온 킹메이커' 김한길 민주당 대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5.06 15: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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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 쥔 구원투수 '위기의 민주당 살릴까'

[일요시사=사회팀] 김한길 민주당 대표에게는 '원죄'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기획 탈당'이란 초강수를 택했던 그는 대선 패배의 여파로 정가를 떠났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정치 인생은 민주당의 위기와 함께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이젠 권력의 정점에서 '정계개편'의 칼자루까지 거머쥐었다.



대세를 뒤집기에는 구도가 너무 뚜렷했다. 친노 대 비노의 혈투로 불렸던 민주당 지도부 경선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웃었다. 대선 이후 달라진 당내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비노 맑음
친노 흐림

이번 지도부 경선에서 일찍이 대세론을 굳힌 김 대표는 당내 비주류의 좌장으로 불린다. 본인은 누구보다 '비주류'로 불리는 걸 싫어하지만 그의 과거 행보는 '비주류'를 넘어 '반노'로 불릴만한 구실을 여럿 제공했다. 김 대표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반역자'라는 오명. 참여정부 말기, 김 대표가 탈당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정치 행로를 걸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지난 2007년 2월, 김 대표는 22명의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명분은 '신당 창당을 통한 대선 승리'였다. 김 대표는 후발 주자로 합류한 염동연 의원 등 23명의 의원과 함께 '통합신당의원모임'을 발족했다. 정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은 결론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등에 비수를 꽂은 일로 비견됐다.

같은 달 10일, 김 대표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위치한 중소기업인력개발원에서 1박2일간의 일정으로 '통합신당의원모임' 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국정 운영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중도 노선의 신당 창당을 공식화했다.


이날 김 대표는 "슬프지만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탈당의 변을 밝혔다. 또 "국민들은 진작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는 모른 척 했었다"며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서 이대로 변하지 말고 주저앉아 (대선) 패배를 기다려야 한다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당의 대선 패배를 막기 위해 자신이 탈당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2007년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패배했다. 이명박 당시 후보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김 대표의 결정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대선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당을 지켜야 할 중진의원이 대규모 탈당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결과 여하를 떠나 당시 지도부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옹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2006년 당내 원내대표로 있을 당시 참여정부와 마찰을 빚어왔다는 사실은 그의 탈당 명분을 희석시켰다.

대세론 속 일찌감치 승기 "비주류가 웃었다"
경선서 과열된 갈등봉합 숙제…안철수 문제는?

탈당 이후 김 대표는 "중도를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며 구 민주당과 합당했다. 중도통합민주당의 출범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대통합 정당'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김 대표는 대선을 눈앞에 둔 8월, 중도통합민주당에서 탈당했다.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못마땅하게 여긴 까닭이다. 당시 김 대표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 프레임을 깨버리겠다"고 말하는 등 대선 기간 내내 참여정부와 선을 그었다.

김 대표가 떠난 중도통합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됐다.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이 내세운 정동영 후보는 17대 대선에서 참패했다. 대선 후 불거진 '책임론'에서 김 대표는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1월, 김 대표는 "대선 대패에 책임을 지겠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계에 입문한 지 12년 만에 야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두 번의 탈당
반역자 꼬리표

김 대표는 정치인이기 이전 언론인으로 더 유명했다. 미국 생활 당시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중앙일보> 미주지사 지사장 등을 역임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을 통해 존경 받는 언론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김 대표가 처음부터 언론인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 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 대표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석좌교수를 비롯해 명지대학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김 대표의 장점은 '글'에 있다. 1981년 소설 <바람과 박제>를 통해 등단한 그는 <미국일기>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의 소설집을 간행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가수 조영남의 히트곡 '화개장터'의 숨겨진 원작자가 김 대표라는 사실은 2010년 알려져 큰 화제를 낳았다.

김 대표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를 승낙하면서부터다. 비례대표로 15대 국회에 입성한 그는 16대와 17대를 거치며 정치 거물로 자리매김했다. DJ 정부 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으로 주변의 시샘 섞인 눈총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는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대선후보 선대위에서 선거기획을 총괄한 자타공인 '전략통'이다. 스스로도 '킹메이커'란 별칭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탁월한 협상력은 지난 두 번의 대선을 통해 검증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김 대표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2008년부터 긴 칩거에 들어갔다. 그래서 혹자는 김 대표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가능한 말을 아꼈던 탓에 언론 노출도 없었다. 이 시기 김 대표는 외부 접촉을 최대한 자제한 채 집필 활동에 전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가 정계 복귀 신호탄을 쏘아올린 건 칩거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이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후보군 중 김 대표가 거론된 것. 김 대표도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를 통해 "출마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며 정계 복귀 속내를 드러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고심 끝에 불출마를 선택했다. '안철수'라는 흥행티켓 앞에서 김 대표의 선택지는 넓지 않았다. 당시 김 대표는 민주당 당원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나가기보다 정권교체를 위해 필요한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을 실현하는 일에 성심껏 기여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어진 글에서 김 대표는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당의 최고 지도부"라며 "지도부의 무능과 계파 싸움 추태에 민주당이 상처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주류' 좌장 이미지가 김 대표에게 덧칠해진 순간이었다.

4년만의 귀환
비주류의 역습

서울시장 선거 후 새누리당이 각종 악재로 골머리를 앓을 무렵, 민주당(당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김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김 대표를 전략 공천한 것이다.

김 대표는 "중앙당으로부터 서울 광진갑 지역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며 "반드시 승리해 정권 교체에 앞장서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정송학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던 김 대표는 52.1%의 득표로 당선됐다. 국회 재입성에 성공한 것. 김 대표는 당선 직후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을 내비치며 '당권'을 향한 의욕을 내보였다.

당시 김 대표는 "4년 전 정권을 뺏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며 "그러면 정권을 찾아올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김 대표가 첫 당권 사냥에 나선 2012년 4월. 이해찬 당시 상임고문과 박지원 최고위원의 이른바 당·원내대표 담함 의혹이 불거졌다. 김 대표는 크게 반발하며 "소위 계파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들이 밀실합의로 당직을 나눠 갖겠다는 것은 참으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은 압도적인 득표로 원내대표에 안착했다. 남은 건 이 고문의 당 대표 선출 여부. 이에 대항마로 떠올랐던 게 바로 '탈계파'를 주장한 김 대표다.

김 대표는 "패권적 계파정치에 민주당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자신을 당 대표로 뽑아줄 것을 읍소했다. 또 "친노니 친호남이니 하는 명찰을 모두 떼어버리고 우리당 모두가 오직 '대선승리'라는 하나의 명찰을 달고 한마음으로 나아갈 때"라고 강조했다. 올해 지도부 경선에서 들고 나왔던 구호를 당시부터 주창한 셈이다.

김 대표는 울산에서 열린 지역 대의원 첫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소위 말하는 '흥행 대박'을 터트린 것. 이후 김 대표는 지역 순회 과정에서 이 고문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시소게임을 거듭하며 선전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결국 이 고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최종 득표 6만6187표. 이 고문과는 1471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첫 도전에서 쓴맛을 삼켜야 했던 김 대표다.

최고위원에 선출된 김 대표는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김 대표는 지도부 선출 후 열린 첫 번째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 대의원과 당원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고도 당 대표가 되지 못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일반 국민이 참여한 모바일 투표에서 패배했다는 데 아쉬움을 드러낸 것.

김 대표는 18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기 전 안철수 캠프의 박선숙 총괄본부장과 회동하는 등 안 후보 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김한길의 의중이 안철수에 쏠려 있다"는 의혹이 나온 것도 이 시점이다.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난해 11월 김 대표는 최고위원직을 전격 사퇴했다. "정치쇄신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용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문 후보가 민주당의 쇄신을 이끌 수 있도록 남은 지도부도 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과 이 고문은 이를 일축했다. "지도부 사퇴로 민주당에 내분이 있는 것처럼 비춰서는 안 되고, 힘든 때일수록 당 지도부가 남아 문 후보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를 두고 김 대표가 '후보 흔들기'를 했다는 소문이 난립했다. 만약 문 후보가 당선된다면 '친노'의 약진으로 김 대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 자명해보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또다시 대선에서 패배했다. 문 후보가 분전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대선 패배 직후 '친노 책임론'이 급부상했고, 가장 큰 수혜자는 김 대표였다. 지도부는 총사퇴했고, 비상대책위원회 선출 과정에서 '원내대표 추대론' '비상대책위원장 추대론' 등이 고개를 들었다. 당은 대선에서 졌지만 덕분에 김 대표의 역할이 조명받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지난 3월 김 대표는 '계파정치 청산'과 안 후보를 껴안는 '더 큰 민주당론'을 내세워 또 다시 당권 도전에 나섰다. 오는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두 번의 대선을 거치며 비주류 좌장으로 우뚝 선 김 대표는 "계파의 이익을 당의 이익보다 앞세우고 계파의 이해를 국민의 이해보다 앞세우는 정치는 이제 끝장내야 한다"면서 '안철수 지지세력'을 껴안는 변화를 촉구했다.

DJ 권유 정계입문…대통령 만든 공신
4·11 총선 전후 비주류 좌장 급부상
"친노? 비노? 계파부터 청산"

5·4 전당대회를 앞두고 후보들 간 경쟁이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자연스레 '김한길 대 반(反)김한길' 구도가 짜여졌다. 강기정, 이용섭 의원을 비롯한 범주류계는 비주류인 김 대표를 압박하면서 단일화 논의를 이어갔다. 특히 강 의원은 "김한길 당선이 혁신이라는 것은 또 다른 패권적 발상"이라며 김 대표를 겨냥한 강도 높은 공격을 이어갔다.

당 외곽에서도 '김한길 대세론'에 찬물을 끼얹는 성토가 이어졌다. 직계 친노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 강연에서 "국민연금법 등 참여정부 주요 정책을 통과시키려할 때 대통합민주신당 만든다고 선도 탈당해서 본회의장 복도에서 커피 마시면서 기권표 던진 분들이 민주당 당 대표가 되겠다고 한다"며 쓴소리를 날렸다. 김 대표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이었다.

이 가운데 당권을 차기하기 위한 주류와 비주류간의 자존심 싸움은 날로 격화됐다. 지난 28일 강 의원과 이 의원은 '김한길 대세론'을 저지하기 위해 단일화를 선언하는 등 최후까지 계파대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치고받기식 폭로가 연일 이어지며 양측은 큰 내상을 입었다.

갈등봉합 관건
정계개편 촉각

김 대표는 최근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친노니 비노니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말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목표는 '이기는 민주당'이라는 뜻도 분명히 했다.

남은 건 김 대표가 자신이 주장한 '계파청산'을 완수하고 국민을 위한 민주당으로 거듭날 것인지 여부.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계개편'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 그 출발은 '안철수 신당'이란 설명.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안철수 신당을 반길 세력은 분명 새누리당밖에 없을 것"이라며 "야권의 재구성이 있다면 그 중심에 민주당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안철수 줄대기'가 사실이 아니란 것. 그러면서 김 대표는 "자신이 거름이 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김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과열된 갈등을 봉합하고 제1야당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김한길 대표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중앙일보> 미주지사 편집국장·지사장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명지대 초빙교수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원회 위원·대변인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기획특보
▲제16·17대 총선 기획단장·본부장
▲제17대 건설교통위원장, 국회운영위원장
▲37대 문화관광부 장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국회 문화방송체육통신위원회 위원
▲15·16·17·19대(4선·광진갑) 국회의원
▲현 민주당 당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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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