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버린 탈북 브로커 '국가기밀' 폭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5.06 15: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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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집단송환 돕다 피박만 썼다"

[일요시사=사회팀] 베트남에서 탈북자 송환을 돕다가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류모(73)씨와 이모(63·여)씨 부부는 노무현정부와 이명박정부에 보상을 요구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올해, 이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대한민국 전역이 '붉은 악마'의 함성으로 뒤덮였던 2002년. 류씨 부부는 베트남 호치민에서 미니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반도로부터 3500여km나 떨어진 이역만리. 그곳에서 류씨 부부는 '국가'란 이름으로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렸다.
 
정부·교회 권유로
'보호시설3' 운영

사건으로부터 10여년이 흐른 2013년. 경기도 화성의 한 횟집에서 만난 류씨 부부는 한 통의 진정서를 내밀었다. 진정서 첫 머리에는 류씨의 부인인 이씨의 이름과 함께 "저는 보호시설3 관리인 류00의 처 되는 사람입니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 '보호시설3'은 류씨 부부가 북한을 탈출해 온 난민들을 수용했던 미니호텔의 비공식 명칭이었다. 류씨 부부는 10여년 전 탈북자를 베트남 국경 밖으로 이송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른바 '운반책'이었다.

류씨는 "(탈북자 보호 및 이송과 관련한) 자세한 얘기는 (국정원 직원이) 밖으로 말하지 못하게 했었다"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류씨는 지난 2004년 7월, 베트남에서 체류 중이던 탈북자 468명을 국내로 송환할 당시 베트남 내 '5인의 활동가'로 소개된 인물이다.

노무현정부가 주도한 이 '송환 작전'에서 류씨는 베트남으로 급파된 국정원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연루, 베트남에서 추방됐다.

그간 외부로 알려진 것과 달리 류씨는 이른바 '활동가의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저 베트남에 남아 평범한 교민으로 살고자 했던 류씨. 그런 그가 처음 탈북자 보호를 맡게 된 건 교회와 정부의 권유 때문이었다.


2004년 베트남서 468명 극비리 송환작전 참여
출국 돕다 체포후 강제추방…가족들과 생이별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베트남으로 이민을 떠났던 류씨 부부는 현지에서 생업을 이어가던 중 호치민의 한 한인교회 목사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이 목사는 "탈북자를 다 감당할 수 없으니 (국내 입국 전까지)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류씨 부부에게 했다. 이는 류씨 부부가 탈북자 보호에 용이한 미니호텔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씨 부부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뿐더러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무렵 류씨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한 목사는 베트남 주재 총영사관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류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일단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에 도착하면 남한에 갈 수 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몰려드는 탈북자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자 영사관 측도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고 류씨는 전했다.

당시 영사관 측은 북한 및 베트남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결국 교회의 요청을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베트남 내 탈북자 송환 작업을 총영사관이 직접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소식은 즉각 중국 내로 퍼졌고, 소문을 듣고 국경으로 밀려드는 탈북자 수는 나날이 증가했다.

생업인 호텔에
난민들 보호

탈북자들은 중국 내 브로커들과 접선, 제3국을 경유해 남한으로의 망명을 시도했다. 제1경유지는 베트남. 중국 내 브로커들은 통상 100만∼30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고 이들을 베트남 호치민역으로 이송했다. 베트남으로 입국한 브로커들은 "탈북자를 데려왔다"며 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럼 영사관은 다시 류씨 등에게 전화를 걸어 탈북자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류씨는 "(호치민역 광장에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탈북자를 미니호텔로 데려오는 게 일이었다"며 "베트남 공안 당국에 적발되면 현장에서 체포되기 때문에 이송 과정에서 신중을 기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류씨와 같이 탈북자를 관리한 인물은 모두 4명. Y씨와 S씨, L씨, 그리고 또 다른 Y씨였다. 이들은 각각 100여명의 탈북자를 보호하며 매주 20여명을 제2경유지인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넘겼다.

류씨의 증언에 따르면 '보호시설3'에는 늘 80∼100여명의 탈북자가 상주했다. 준비된 방은 모두 10개. 각 방마다 8∼10여명의 탈북자가 있었던 셈이다. 이들이 머무르는 방에는 TV와 컴퓨터가 놓였다. 탈북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시청각 시설이었다. 탈북자들은 그곳에서 <대장금>, <허준> 등과 같은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도착한 순서에 맞춰 제2경유지로 이동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인원이 함께 생활하다보니 그 안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씨는 "탈북자 중 임산부가 있었을 때 굉장히 난처했다"며 "한 번은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가 있어 몰래 출산할 수 있는 병원을 수소문 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또 류씨는 "남자들 간에 칼부림이 일어날 뻔해 '이렇게 가다간 우리 다 죽는다'고 큰 소동이 났던 적이 있다"고 거들었다.

이 같은 문제는 보호시설이 수용해야 할 인원이 많아질수록 격화됐다. 한 여성 탈북자는 보호시설에서 임신을 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탈북자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5개의 보호시설에서 매일같이 사건이 터져 나왔다. 류씨는 "하루 10여명의 탈북자가 미니호텔로 왔는데 라오스나 캄보디아로 넘길 수 있는 탈북자는 1주일에 많아야 30명이었다"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순번이 밀려 베트남에 장기 체류하는 탈북자가 많아졌고, 어느 틈엔가부터는 도저히 탈북자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자 류씨 등은 영사관 측과 협의, 되도록 많은 탈북자를 단기간에 이송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법무성으로 로비가 들어갔다. 탈북자 468명을 한꺼번에 출국시키는 조건으로 류씨 등이 로비활동을 벌인 것이다. 로비에 사용된 돈은 류씨 등이 영사관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던 금액의 일부로 충당했다. 류씨에 따르면 당시 로비 명목으로 명품시계가 오고 갔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베트남 출입국관리소가 탈북자들의 출국을 조건부로 허용한 것이다.

당시 베트남이 내건 조건은 "탈북자들의 집단 송환을 비밀리에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의 요구를 수용하고, 전세기 2대를 준비하는 한편 국정원 직원들을 현지로 파견해 탈북자들의 신원 파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류씨 등은 간첩으로 의심 되는 인물들을 국정원 직원에게 넘겼다. 송환과 관련한 모든 작업은 계획대로 준비되고 있었고, 총영사는 류씨 등 5명과 만나 "이번 일이 끝나면 모두 생업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추진되던 이 프로젝트는 작전을 불과 하루 앞두고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정부 주도의 탈북자 송환 사실이 국내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이다. 류씨 부부는 "그때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다는) 약속만 지켰어도 베트남에서 추방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80∼100명 상주
한주 30명 출국

베트남에 체류 중이던 468명의 탈북자는 2004년 7월27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전세기편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고 탈북자들이 떠나자 그 후폭풍은 류씨 부부에게 닥쳤다. 불법체류자(탈북자)를 비호·은닉해 온 혐의로 류씨 등 5명이 전원 체포된 것이다.

류씨는 "전세기가 이륙한 후 베트남 공안 수십 명이 들이닥쳐 우리 부부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압수했다"며 "영사관의 면회 신청마저 거부할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했다"고 증언했다.

3주간의 수감 생활 동안 류씨는 외부로 연락을 취하기 위해 부인 이씨에게 부탁, 핸드폰을 사식에 몰래 숨겨 넣는 등의 공작을 시도했지만 모두 무위에 그쳤다. 뒤늦게 만난 총영사는 류씨 등 5명에게 "사건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며 "일단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호소 내부 직원을 통해 건네 들은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류씨 등 5명 모두 베트남에서 강제 추방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송환 작전을 앞두고 총영사에게 신변 안전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출소 후 이들에게 기다린 현실은 가혹했다. 강제출국 조치된 류씨 등은 베트남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류씨가 한국으로 추방되던 그날. 마중 나온 총영사는 류씨에게 "미안하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류씨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국 공항에 입국한 류씨 등은 가장 먼저 외교부로 달려가 담당자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탈북자 송환 작전을 담당한 직원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직원 2명은 이들에게 "수고했다"며 "언론과 접촉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얘기했다. 류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 같은 패턴은 3개월 내내 반복됐다. 류씨 등이 외교부를 찾으면 통일부로 소관을 넘기고, 통일부는 다시 국정원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식이었다.

보상 약속 정부 안면 바꿔 모르쇠
외교부-통일부-국정원 책임 넘기기
훈포장 수여도 말 바꿔 없던 일로

이 과정에서 한 외교부 관계자는 류씨 등 5인에게 '훈장 수여'를 약속했다. 또 국정원 관계자는 보상금을 빌미로 이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훈장은 커녕 보상금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고 류씨 부부는 주장했다. 보상금의 경우 1인당 1만6000달러라는 다소 적은 액수가 지급됐다는 것.

류씨는 "베트남에서 추방될 때 입은 재산 손실만 3만달러가 넘는데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진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씨 역시 "남편이 추방된 후 혼자서 사업을 꾸리다보니 힘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특히 베트남 경찰은 늘 우리 미니호텔을 감시하는 등 (사건 이후)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억울함으로 호소했다. 이씨는 베트남 당국의 감찰이 심해지자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현재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류씨와 S씨, L씨다. 지난해 베트남 당국에 체포된 Y씨는 입국 금지가 해제된 후 리오스로 들어가 '탈북자 브로커'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다른 Y씨는 베트남 현지인과 결혼해 베트남에 재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제 사정은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류씨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탈북자를 관리했던 5명 모두가 생활고를 겪고 있다"며 "정부를 믿고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한 건데 이렇게 다들 어렵게 사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다들 승진했는데…"

이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탄원서를 전달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인수위 시절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도 우리 얘기를 듣지 않았다"며 "구출 작업 당시 함께 일했던 국정원 직원 A씨는 간첩을 잡아 승진도 하고 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만 힘들 게 사는 게 조금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수소문 끝에 만난 S씨는 "당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해결이 안 됐고, 지금에 와서 언론 인터뷰에 응할 마음이 전혀 없다"며 "북한 측에서 입국시킨 탈북자들을 다시 북으로 송환하라는 말에 한국 정부는 (알면서도) 뒷짐을 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일요시사>는 리오스 현지에서 브로커로 활동 중인 Y씨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Y씨는 최근 지인에게 '200달러를 빌려달라'고 호소하는 등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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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