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고백'으로 본 국정원사건 실체 '재구성'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5.01 15: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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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사건, 윗선의 은폐지시 있었다"

[일요시사=정치팀] 지난해 대선기간 여야는 국정원이 야권 대통령후보에게 불리한 댓글을 작성하며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었다. 이른바 '국정원녀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했던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최근 수사과정에서 수사를 축소?은폐하라는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고 폭로해 또 한 번 파문이 일고 있다. 국정원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경찰내부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일요시사>가 권 과장의 폭로를 토대로 국정원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 지난 19일 국정원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사를 축소·은폐하라는 경찰 수뇌부의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수서경찰서가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이 정치개입을 금지한 국정원법을 위반한 것이라면서도 대선개입은 아니라는 다소 황당한 수사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이었다.

정치개입?
대선개입?

권 과장은 당초 이 사건을 맡아 수사해왔으나 지난 2월4일 알 수 없는 이유로 송파경찰서로 전보처리 됐다. 권 과장은 수사 도중 과로로 병원에 몇 차례 드나들면서도 수사 의지를 불태워 왔기 때문에 그의 전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찰 주변에서는 권 과장이 수사방향을 놓고 경찰 지도부와 갈등을 겪다 전보조치 된 것이라는 뒷말이 무성했지만 경찰 측은 규정에 따른 인사였을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권 과장은 이날 작심한 듯 언론들과 연이어 인터뷰를 갖고 "서울지방경찰청뿐 아니라 경찰청으로부터도 (압력)전화를 받았다"며 "경찰 고위관계자가 수차례 전화를 걸어와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불법 선거운동 혐의를 떠올리게 하는 용어를 언론에 흘리지 말라'는 취지로 지침을 줬다"고 말했다.

'국정원사건' 수사 발표 때 무슨 일 있었나?
"수사개입" VS "사실무근"…양보 없는 진실공방


권 과장은 "김씨와 함께 댓글을 단 '참고인 이모씨'의 존재가 처음으로 드러났을 때도 경찰 상부로부터 주의를 받았다"며 "민주통합당이 국정원 여직원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한 지난해 12월12일부터 송파경찰서로 전보된 2월4일까지 경찰 윗선에서 지속적으로 부당하게 수사에 개입해 우리 실무진들이 수사에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권 과장의 폭로를 토대로 지난해 대선정국을 집어삼킨 국정원사건을 복기해보면 그동안 미스터리로 남았던 의문점들이 하나 둘씩 풀리는 듯하다.

지난해 12월16일은 대선후보들의 마지막 3차 TV토론이 열린 날이었다. 대선을 불과 3일 앞두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던 민감한 시기였다. 이날 토론의 최대 화제는 바로 국정원 여직원의 대선개입 논란. 양 후보는 이를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오차범위 내 경합
한순간에 뒤집혀

그런데 토론회가 끝난 직후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이른바 국정원녀 사건을 수사 중이던  수서경찰서가 오후 11시경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기자들에게 알려온 것이다. 당초 다음 날인 17일 공식브리핑을 하겠다고 이미 공지한 상태에서 돌연 오후 11시라는 늦은 시간에 브리핑을 앞당겨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서경찰서는 이날 오후 11시20분경 보도자료를 통해 "국정원 직원이 댓글을 단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국정원녀 사건을 두고 박근혜 후보와 치열한 설전을 벌였던 문재인 후보 측으로서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히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시 수서경찰서 관계자들은 "갑자기 서울경찰청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고, 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언론에 최대한 빨리 알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며 당당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날 발표는 경찰이 수사를 시작한 후 불과 3일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경찰은 12월13일 김모씨 컴퓨터 2대를 제출받아 분석을 시작했다.


하지만 댓글은 집에서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김씨가 경찰에 제출하기 전 하드디스크의 저장내용을 이미 삭제했거나 아예 하드디스크를 교체했을 가능성까지 있었지만 경찰은 이러한 조사는 전혀 진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발표를 강행한 것이었다.



또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날 보도자료를 직접 만들어 발표 30분 전에야 수서경찰서 수사팀에 보냈는데 보도자료가 지방청에서 만들어져 수사팀으로 하달되는 것은 무척 드문 경우다. 정작 수사의 주체인 수서경찰서 수사팀은 서울청의 발표가 있은 후 이틀 후에야 컴퓨터 분석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대선기간 보여준 경찰의 이 같은 행태는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 과장의 폭로대로라면 이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 권 과장의 폭로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하지만 권 과장이 언급한 ‘윗선’으로 지목되고 있는 서울경찰청은 권 과장의 폭로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적극 반박하고 있다.

서울청 측은 "대선 이후까지 수사를 미적댄다는 비판이 있는 상황에서 신속히 수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 발표를 서두르게 됐다"며 "권 과장이 수사 초기 단계에서 '국정원에 혐의가 있다'는 식의 얘기를 언론에 흘려 수사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어 지휘부에서 자제를 요구한 것을 축소·은폐라고 주장하니 어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공정성 당부한 것"
"은폐 지시한 것"

특히 양측이 반박과 재반박을 이어가며 진실공방이 치열해지면서 전혀 새로운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오히려 권 과장이 수사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쪽으로 유리한 수사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편파적인 수사를 진행했다는 주장이다.

권 과장은 수사 당시 국정원 직원 김모씨의 컴퓨터 2대를 서울청에 맡기면서 혐의 관련 키워드 100여개를 분석 의뢰했다. 하지만 서울청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키워드를 박근혜, 문재인,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등 4개로 대폭 축소해 감식한 뒤 댓글이 없다는 발표를 했다. 권 과장은 이를 두고 윗선의 수사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청은 이에 대해 대선과 직접 관련성이 없는 단어가 대다수여서 핵심 키워드만 검색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당장 보수진영에서는 대선관련성을 수사하는 것 치고는 너무 많은 키워드를 제시했다며 권 과장이 수사지연을 노리고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수서경찰서는 당시 '가식' '호구' '네이버' 등 대선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도 검색 키워드로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당초 수서경찰서의 요청대로 100여개의 키워드를 일일이 분석했다면 수사는 크게 지연됐을 것이고 자칫 수사결과가 대선 이후에나 발표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수사결과가 대선 이후에나 발표됐다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선거판세는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무척 불리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권 과장의 정치편향성을 의심하며 양측 모두 수사의'결과'보다는 수사의 '속도'가 중요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폭로 배경은? "진실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
정치편향성 논란 제2라운드 '엉뚱한 불똥'

그러나 권 과장은 "당시는 증거 수집 단계였는데, 혐의와의 연관성을 운운하며 키워드를 빼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며 정당한 요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일선 경찰들에 따르면 "지방청에 증거물 분석을 의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방청이 상위기관이라도 일선 서의 요구대로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권 과장은 수사과정에서 국정원 측으로부터 정치편향성을 의심받은 것은 사실이다. 국정원 측은 권 과장에 대해 "본질에서 벗어난 사소한 부분까지 뒤지면서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며 "(권 과장이) 언론에 수사내용을 흘리는 것 같다. 우리 측이 고발한 주거침입, 감금,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등의 항의를 수차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 과장은 광주 출신으로 제43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지난 2005년 여성 최초로 경정으로 경찰에 특채됐다.

이외에도 권 과장은 "서울경찰청이 중간수사 경과를 발표한 뒤 국정원 직원 김씨의 컴퓨터 하드디스크 최종 분석자료를 우리에게 안 주려고 했다"며 "우리(수서경찰서 수사팀)가 '당신들, 법 위반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격렬히 항의하고 나서야 뒤늦게 컴퓨터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청은 컴퓨터 반환이 늦어진 건 방대한 검색자료 정리 때문이었다며 수사 축소나 은폐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엉뚱한 진실게임
'정치입문 한다?'

한편 일각에선 권 과장의 폭로가 정치권 입문을 위한 포석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보수논객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지난번 검찰의 백혜련도 그러던데 권은희도 양심선언 비슷(하게) 한 뒤 민주당에 입당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면서 "공직자 양심선언 뒤 정계진출 포기 선언도 함께 하도록 여론을 조성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사건을 둘러싼 한 치 양보도 없는 진실게임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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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