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만파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 진실 대추적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3.26 16: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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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고 운전은 했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라고?"

[일요시사=정치팀] 지난 18대 대선을 뜨겁게 달궜지만 대선이 끝난 후 잊혀지는 듯 했던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정원 여직원이 야당에 불리한 댓글을 단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 된데다 최근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치개입 지시를 내린 내부자료까지 공개됐기 때문이다. 과연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은 정치권을 집어삼킬 태풍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의혹뿐인 미풍에 그치게 될까? <일요시사>가 일파만파 커지고 있는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의 막전막후를 살펴봤다.



제18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8일 앞둔 지난해 12월11일.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야당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댓글을 달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통합당 관계자와 함께 서울 역삼동에 있는 한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이른바 '국정원녀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해당 오피스텔에 거주하고 있던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44시간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고 버텼다.

대선 삼킨
'국정원녀'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증거도 없이 국정원 여직원을 몰래 미행하고 사실상 감금까지 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게다가 김씨의 하드디스크 2대를 분석한 경찰은 수사를 시작한 지 나흘 만에 '김씨가 댓글을 단 흔적이 없다'고 발표하면서 민주당은 오히려 수세에 몰리게 된다.

당시 경찰이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한 지난해 12월16일은 대선 후보들의 마지막 TV토론이 진행됐던 날이었다. 그런데 TV토론이 끝난 직후인 오후 11시경 경찰은 느닷없이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가 대선과 관련해 어떠한 댓글도 단 흔적도 없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날 경찰의 수사결과는 국정원 직원에게 직접 제출받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2개에서 정치 관련 댓글이나 글을 쓴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언론 보도 따라 마지못해 하는 수사
국정원 오락가락 해명 '커지는 의혹'


하지만 댓글은 집에서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김씨가 하드디스크 내 저장내용을 이미 삭제했거나 아예 하드디스크를 교체했을 가능성까지 있었지만 경찰은 이러한 조사는 전혀 진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발표를 강행했다.

때문에 경찰이 대선에 개입하기 위해 수사결과를 서둘러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지만 의혹은 풀리지 않았고 대선은 그대로 끝이 났다. 어찌됐건 지난 해 대선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승리였다.

대선이 끝난 후 국정원 사건은 빠르게 잊혀져갔다. 민주당 내에서는 국정원 사건을 대선 패배의 한 원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당시 대선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했던 박지원 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조차 "국정원 여직원 사건에 증거가 없었다"며 자신은 민주당의 의혹제기를 말렸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의혹 투성이

그런데 지난 1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상황이 급변했다. 김씨가 활동한 사이트 운영자의 폭로와 함께 김씨가 정치적 내용의 게시글을 남겼던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해당 게시글은 문재인, 안철수 전 대선 후보의 이름 등 대선 관련 키워드가 적시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지난 발표를 할 때도 김씨가 이런 글을 게시한 사실은 알고 있었다"며 "6개의 대선 키워드로 구글링(인터넷 검색)한 결과 이러한 키워드가 들어있지 않아 대선관련 글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앞서 김씨가 대선이나 '정치'와 관련한 글을 게시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발표했었다. 이로 인해 경찰의 말 바꾸기와 사건 축소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후 김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3차례나 소환조사했지만 그때마다 김씨에게 실정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수사에 착수한 후 벌써 3개월가량이 지났지만 아무런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경찰에 대해 수사 의지가 없거나 정권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잇따르고 있다. 실제로 경찰이 수사착수 후 불과 4일 만에 중간 결과를 발표했었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경찰의 수사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이 와중에 경찰은 갑자기 수사책임자를 교체하며 스스로 의혹을 키웠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 수서경찰서 권은희 수사과장은 지난 2월4일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담당자는 임병숙 서초경찰서 수사과장으로 교체됐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권 수사과장과 윗선과의 갈등 때문이 아니겠냐는 뒷말이 나왔다.



대선 이후 국정원 직원을 도와 댓글을 작성한 '제3의 인물'도 등장했다. 40대 초반의 남성인 이모씨는 지난 1년간 서울 강남의 모 고시원에 살면서 국정원 여직원 김씨에게서 특정사이트 아이디 5개를 건네받고, 별도로 30여 개의 아이디를 만들어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글 160여 건을 작성하는 등 대선 여론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2000여 차례가 넘는 게시글 추천·반대 활동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리한 여론 조성에 가담한 사실도 밝혀졌다.

직업도 없는데
월세 꼬박꼬박

국정원은 이씨에 대해 김씨의 지인으로 개인적으로 아이디를 나눠 쓴 것뿐이라고 설명했지만 40대 남성인 이씨와 20대 여성인 김씨가 인터넷 아이디를 나눠 쓸 만큼 친밀한 지인사이였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이씨는 경찰의 소환통보에 2차례 불응한 뒤 잠적해버렸다. 수사 확대를 염려한 김씨와 국정원 쪽이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이씨를 빼돌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만 경찰은 이씨가 참고인 신분이라 강제소환을 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경찰은 현재까지도 이씨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정한 직업도 없는 이씨가 고시원에서 1년 넘게 지내면서 매달 45만원의 월세를 꼬박꼬박 낸 점은 무척 의심스럽다. 이씨가 대선 여론조작 등의 대가로 국정원으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 같은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국정원은 그동안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해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은 경찰의 수사에 대해 "언론의 보도에 따라 경찰이 마지못해 따라가고 있는 행태"라며 일갈하기도 했다.

상황 변화에 따라 국정원의 해명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예 댓글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가, 댓글활동이 드러나자 개인적인 의견표명이었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다 최근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자 북의 선동 및 종북세력의 추종 실태에 대응해 올린 글이라고 주장했다.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번지나?
국정원 국내정치개입 정황 갈수록 '뚜렷'

지난 18일에는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직원들에게 국내정치 개입을 지시했다'는 국정원 내부문건을 공개하면서 국정원 관련 의혹은 극에 달했다. 진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국가정보원 인트라넷(내부통신망)에 게시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란 문건을 공개하며 국정원의 정치개입 증거라고 주장했다.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에는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국정원이 앞장서 대통령과 정부 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할 것' '세종시와 4대강 등 주요 현안에 (국정)원이 중심을 잡고 대처할 것' 등 국정원법이 금지하는 정치관여로 의심할 만한 부분이 많다. 이러한 내용은 국정원이 통상적 활동을 벗어나 국내 정치현안 개입, 선거 여론조작, 국정홍보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 종북세력의 활동에 맞서려고 정당한 지시를 내린 것을 정치개입으로 왜곡하는 것은 유감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해명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정부 현안에 대해 비판하면 모두 종북세력인 것이냐는 비판이다. 민주당은 이를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과 비교하며 '원세훈게이트'라고 명명하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원세훈게이트'
정치권 삼킬까?

워터게이트사건은 1972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닉슨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사건이 불거진 후 닉슨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은 행정부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집요하게 행정부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닉슨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 정치전문가는 "얼핏 생각하기엔 그깟 댓글을 좀 단 것이 무슨 문제냐 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정보원법 9조에는 원장과 차장 및 기타 직원은 정당 기타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며 "아직 사실 여부를 단정 짓기는 이르지만 만약 의혹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굉장히 심각한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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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