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권교체기 잔혹사' 총정리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2.01 17:04:20
  • 댓글 0개

달콤한 권력? 그러나 뒷맛은 쓰다!

[일요시사=정치팀]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불행히도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 국민들에게 쫓겨나 해외로 망명한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쿠데타가 일어나 내쫓기기도 하고 측근에게 피살당한 대통령도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권교체기에는 이런저런 굴곡들이 많았다. 이제 우리는 불과 20여 일 후면 또 한 번의 정권교체기를 맞이해야 한다. 따라서 <일요시사>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정권교체기 잔혹사'를 되짚어 봤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조용한 인수위가 화제다. 박 당선인 측은 "오는 2월25일 취임 이전까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이명박"이라며 연일 몸을 낮추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불행히도 모두 끝이 좋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역대 최초로 뒤끝(?) 없이 퇴임할 수 있을까?

초대 이승만
시작부터 망명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다. 이 대통령은 1948년 7월20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1952년 재선됐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3선까지 욕심을 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3선 금지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해 결국 3선에까지 성공한다.

이 대통령의 독재는 길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1960년 정부통령선거과정에서 사건이 터졌다. 개표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통령후보자의 표를 개표 조작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해 4월19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인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 대통령은 4월26일 자진 퇴임을 선언하고 도망치듯 하와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건국 65주년, 대통령 9명 배출
퇴임 때는 모두 체면 구겨, 부끄러운 역사 
 


이 대통령은 망명생활 중 향수병에 걸려 고생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사과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심은 이 대통령의 귀국을 끝내 반대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실어증에 걸려서 고생하다 1965년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이 대통령의 나이는 향년 91세였다.

이 대통령 이후 정권을 잡은 것은 윤보선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해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고작 2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는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자 1962년 사임하고 다음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박정희 대통령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열린다. 박 대통령은 박근혜 당선인의 아버지다. 그는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7년 장기집권 기간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주도의 경제개발로 구해냈다는 긍정적 평가와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인권탄압, 노동운동 및 야당탄압, 군사유혈독재와 부정축재 등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한다.

17년 대통령 박정희
9개월 대통령 최규하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지만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연회를 하던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저격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나이는 만 61세였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임기 중 사망한 대통령이다. 그것도 측근에 의한 암살이었다.

박 대통령의 뒤를 이은 것은 최규하 대통령이다. 그는 국무총리 재임 중 박 대통령이 사망하는 10·26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6일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6일 후 신군부 세력이 이른바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면서 최 대통령은 임기 중 제대로 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결국 다음해 8월16일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집권기간은 고작 9개월 남짓이었고 그마저도 명분뿐인 대통령이었다.

최 대통령이 사임을 선언하자 그해 8월27일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한다. 전두환은 8월2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틀 후인 9월1일 취임하는 등 속전속결로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후 전 대통령은 81년 3월3일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7년 임기에 단임인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한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그러자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저항은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과 맞물려 1987년 6·10항쟁으로 연결됐고 전 대통령은 시국 수습을 위해 6월29일 6·29 선언을 발표하고 직선제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후계자로 지목된 노태우 대통령은 전국 득표율 36%로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는 듯 했다. 그런데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전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려놨으나 노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을 5공 청산의 타깃으로 삼아 신군부 인사들을 정리, 용퇴시켰다. 노 대통령은 또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유폐시키고 청문회장에 세우기도 했다.

배신 릴레이
전 정권 보복

역대 정권의 '배신 릴레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뒤를 이은 김영삼 대통령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정의당,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과의 통합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다. 이로써 32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종식됐음을 선언하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노 전 대통령과 힘을 합쳐 당선된 김 대통령은 1995년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바로세우기'를 선언한다. 1996년 3월부터 시작된 공판에서 대법원은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죄, 내란죄, 수뢰죄를 적용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12년을 각각 선고했다.

두 사람은 제15대 대통령선거 직후인 1997년 12월22일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들을 모두 특별사면할 때까지 약 2년간이나 수감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사례는 두 사람이 처음이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퇴임 과정이 매끄럽진 못했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미스러운 퇴진으로 국민들은 그가 무사히 퇴임하는 대통령의 선례를 남기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퇴임 직후 불거져 나온 아들 김현철의 비리, 측근이자 인척인 홍인길 등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김 대통령 역시 체면을 구겨야 했다.

망명부터 자살까지, 굴곡진 정권교체 역사
이명박, 역대 최초 뒤끝 없이 퇴임할까?

아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것은 김대중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을 앞두고 아들들의 비리연루 의혹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김 대통령은 이 일로 대국민 사과 성명까지 발표했다. 또 퇴임 직후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불거지면서 김 대통령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했다.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0년 6월12일 5억 달러를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으로 2003년 특검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인 박지원 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말엔 약 25%의 지지율을 보이며 초라한 퇴장을 했으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로 귀향하면서 인기가 오르는 기현상을 보였다.

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퇴임 후 귀향한 첫 사례였다. 노 전 대통령은 고향에서 친환경 농업과 농촌 환경 개선 등에 힘썼고, 시민들과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나누는 등 친서민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때문에 봉하마을은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났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도 역대 대통령 잔혹사를 비껴가진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친인척 비리를 막기 위해 '인명부'까지 작성해 관리했으나 2009년 부인과 자녀 등이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그해 5월23일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역대 대통령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부끄러운 역사
마침표 찍을까?

2013년은 대한민국 건국65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9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명예로운 퇴임을 한 대통령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박 당선인의 취임까지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과연 무사히 퇴임하는 대통령의 첫 선례를 남길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