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국회 주역 릴레이 인터뷰>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2.11.27 11: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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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 새누리당도 민주정당이다"

[일요시사=정치팀]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운 소위 주사파 골수 운동권 출신이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하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의 실상을 접한 후엔 오히려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했다. 또 지난 4·11 총선에서는 보수진영인 새누리당의 후보로 부산 해운대구 기장을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은 그런 그를 '변절자'라며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하 의원의 변신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이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올랐다. 민주통합당은 거듭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와 함께 덩달아 주목을 받게 된 인물이 있다. 바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다. 그는 민주당과 차별화 되는 새누리당의 안보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 의원은 무척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수재지만 정작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두 번이나 구속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소위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였던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 모습과 매 맞고 고문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북한인권가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2005년부터는 열린북한방송을 운영하며 북한주민들에게 외부의 소식을 전하고 북한 내부에 민주화의 씨앗을 싹 틔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엔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요시사>는 북한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그를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하 의원과의 일문일답.

 
-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이유는 무엇인가?
▲ 평소 북한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인권문제가 매우 심각하지만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그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었다. 민간인의 신분으로도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정치권의 영입제의를 받았고 평소 느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입문하게 됐다.


- 학창시절에는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전력도 있다. 새누리당과는 이념적 차이가 있을 듯한데 새누리당을 택한 이유는?
▲ 현재 정치권은 민주화세력과 독재세력의 대결구도가 아니다. 새누리당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민주정당이다. 지금 시대의 주요과제는 일자리, 복지, 세계화 등이다. 이러한 여러 이슈 등에서 오히려 나는 새누리당과 이념적 동질성을 느꼈다.

- 오래된 일이지만 민주통합당의 임수경 의원이 하 의원을 '변절자'라며 비판했다. 이에 대한 생각은?

▲ 임 의원의 논리는 '운동권은 다 민주당이어야 하는데 왜 새누리당 갔느냐'는 것이다. 이는 냉전논리다. 이미 민주화 된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각자 소신에 따라 어느 당이든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만 정당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초선의원이다. 국회의원이 된 후 일상생활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 고민해야 되는 문제들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관심있는 문제만 고민하면 됐다. 하지만 이젠 지역구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상임위 활동과 관련된 여러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 고민해야 된다. 또 예전에는 한두 가지 이슈만 전문적으로 탐구하면 됐지만 지금은 좀 더 시야를 넓혀 광범위하게 보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된다. 두 번째는 사적인 시간이 많이 줄었다. 주말에도 지역구를 방문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족들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해져 미안하다.

- 정치 입문 후 가장 보람을 느낀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 현재 농림수산식품위원회에 몸담고 있다. 위원회에서는 아무래도 수산업인들보다 농업인들의 수가 훨씬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농업인 위주의 활동만 펼치게 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상임위 활동 중 수산발전기금이 내년에 대폭 삭감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지적했고 내년에는 오히려 기금의 총액이 늘어나게 됐다.

이외에도 올 여름 해수욕장 해파리 사고가 많았다. 인천에서는 한 여아가 해파리에 쏘여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근본원인을 살펴보니 각 부처 간 협력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대응이 늦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부분을 짚어내서 내년부터는 각 부처가 해파리 사고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올 봄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씨 고문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촉구 결의안을 여야의 합의로 통과시킨 것도 큰 보람을 느꼈다.

"무조건적인 대중 추종 정치는 안해, 현실 직시하고 대안 마련해야"
"북한인권법, 당장 큰 변화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변화 가져올 것"


- 과거 "독도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분쟁지역"이란 주장을 해 논란을 겪었다. 이에 대해 해명을 한다면?
▲ 독도는 명백한 우리나라의 영토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분쟁지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우리나라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독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 야권에서 북한인권법 반대입장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북한인권법이 실효성 없이 남북관계만 경색시킨다는 비판도 있는데.
▲ 북한인권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가 북한의 인권문제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대북관련 민간단체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인권법이 실효성이 없다고 하는데 북한은 그동안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왔다. 실제로 북한인권문제가 한창 국제적 이슈로 떠올랐을 때는 탈북자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기도 했다. 북한인권법이 통과된다면 분명히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이다.

또 대북관련 민간단체들은 지금도 많은 성과들을 얻어내고 있는데 이를 국가가 장려하고 더욱 활성화 시킨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물론 북한인권법이 당장 큰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정치권의 관심이 모두 대선에 쏠려 있다.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현재 선대위에서 대통합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데 이는 낡은 정치다. 이 부분을 해소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지역구인 부산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고향이라 표심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지역구 표심잡기에 열중하고 있다.

- 대선 승리를 위해 박근혜 후보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 어떤 후보든 장점과 단점이 있다. 대선이 불과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단점을 고치는 것은 쉽지 않고 이제는 박 후보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 시키는 전략이 중요한 것 같다. 박 후보의 장점은 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하지 않고 꼭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한다는 점이다. 때론 너무 고집스런 태도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책임감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 정치활동을 함에 있어 기본 원칙이 있다면? 앞으로 어떠한 정치인이 되고 싶은가?
▲ 인기 얻기에만 급급해 무조건적인 대중 추종의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 원칙이다.
앞서 언급된 독도 문제가 가장 좋은 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면 인기를 얻고 별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독도가 분쟁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면 언젠가 큰 위기가 닥친다.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내놓아야만 한다.

-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다가오는 대선에서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따라서 나는 국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해주길 바란다. 특히 최근 고조 되고 있는 경제위기와 안보위기, 외교위기 등을 누가 가장 잘 극복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투표에 임해주시길 바란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하태경 의원 프로필>

▲ 통일맞이 연구원
▲ 미시간주립대학교 객원연구원
▲ 중소기업신문 기자
▲ SK텔레콤 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열린북한 대표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제19대 국회의원 (부산 해운대구기장군을/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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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