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몽키하우스’ 미군 위안부 수용소 (21)기이한 별세계 ‘블루문’

  • 김영권 작가 nammunsan@naver.com
  • 등록 2026.04.13 04:05:34
  • 호수 15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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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하지만 크리스마스엔 꼭 그렇지 않았다. 특히 블루문처럼 큰 곳의 홀엔 흑백인이 섞여 들어와, 이국에서의 삶을 서로 위로하는 듯 빙긋 미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곳에도 망나니 같은 놈은 있는 법인지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기이한 별세계였다.

모종의 화인

클럽 여인들은 한 대목 잡기 위해 제 나름대로 최고의 화장술을 발휘해 단장하곤 미군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외부의 한국 사람들이 양색시, 양공주, 양갈보 따위로 부르는 그녀들도 무슨 요괴나 마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환경에 처했을 뿐인 한국 여인이었다. 모종의 화인(火印)이 찍힌…그 검붉은 도장이 자의에 의한 건지 타의에 의해 찍혔는지 청운은 아직 판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들의 가슴에 찍혔을 붉은 낙인은 반투명의 간유리에 의해 불그무레하게 번져 무슨 뜻을 지닌 글자인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충 짐작만 될 뿐.

청운은 어딘지도 모를 천왕산 기슭의 고향 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양공주라고 욕을 먹던 어떤 누나를 본 적이 있었다. 여름날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는데, 허물어져 가는 산기슭 오두막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여자가 살며시 이름을 불렀다.

민들레 홀씨를 불어 날리며 청운을 향해 살풋 미소 지었다. 청운은 주춤주춤 다가갔다. 뱀영감집 딸 선애 누나였다. 두어 해 전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그 누나…서글서글한 눈과 앵두 같은 입술로 방긋 웃곤 하던 그녀는 청운을 친동생인 양 귀여워해 주었다. 땡깔(꽈리)을 입속에 숨긴 채 개구리 소릴 내어 어린 청운을 놀리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집이 가난한데다 엄마인 뱀영감댁 아지매마저 병으로 앓아누워 골골거리는 형편이라 선애 누나의 해쓱한 얼굴엔 문득문득 수심의 그늘이 어리곤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청운은 그런 애슬픈 모습이 왠지 더 정겹고 고와 멍하니 쳐다보았었다. 스스로 내심 외로웠기 때문일까.

어느 날 저녁, 서녘하늘에 진 노을을 홀로 바라보던 청운은 탱자나무 무성한 골목을 지나다가 누나네 집으로 들어섰다. 흐릿한 등불이 비친 낮은 마루에서는 세 식구가 웅크려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낡아빠진 상 위엔 꽁보리 밥과 된장찌개만 놓여 있었다.

선애 누나가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청운은 누나의 숟가락을 들고 밥을 살짝 떴다. 쌀알 하나 없는 완전한 보리밥은 푹 불려서 그런지 문들문들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가난을 모르던 청운은 쌀밥보다 훨씬 별미라고 생각하며 된장으로 비벼 맛나게 먹었다.

뱀영감은 원래부터 땅꾼은 아니었다. 꽤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는데, 아지매의 병에 뱀이 특효약이란 소릴 듣고선 매일 뱀을 잡으러 다녔다. 하지만 아지매가 차라리 죽는 게 뱀탕을 먹느니보다 낫다며 상을 잔뜩 찡그린 채 거부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뱀영감이 대신 먹곤 그 기운을 전해 주기 위해 아지매를 껴안는다는 것이었다.

대목 잡기 나선 클럽 여인들
최고의 화장술로 미군들 맞아

하지만 병이 낫긴커녕 더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만 나돌았다. 영감님은 성이 백씨였는데, 뱀탕 때문인지 어쩐지 평소에도 늘 불그레한 얼굴로 혀를 날름날름했기에 동네 사람들은 뱀영감이라고 불렀다. 영감이 술을 한잔 들이켠 불콰한 얼굴로 능글맞게 웃으며 부르면 청운은 슬슬 도망치곤 했었다.

선애 누나가 고향 마을을 떠난 건 뱀영감이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후였다. 그래도 대여섯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부모님 병수발을 한 덕에 뱀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약값은 물론이고 조석 끼니마저 제대로 댈 수가 없는 형편인 모양이었다. 병석에 누운 엄마와 반신불수인 아버지를 두고 선애 누나는 어느 날 홀연 떠나 버렸다. 무정하게.

그 누나가 왜 저기 저런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걸까? 과연 선애 누나가 맞는 걸까? 청운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점점 더 다가섰다. 길고 앙상한 팔이 뻗어 오더니 청운을 끌어 꽉 껴안았다. 전에 품에 안길 때와는 달리 허전하고 구슬픈 느낌이었다. 그 향긋하던 몸내음도 이젠 없었다.

더구나 누나는 어린 청운이 의지할 기둥이라도 되듯 얼굴을 숙인 채 어깨에 기대며 뜻 모를 소릴 중얼대는 것이었다. 몸을 파르르 떨면서 울먹거리다가 갑자기 미친 여자처럼 깔깔 웃기도 했다. 청운은 힘에 겨웠지만, 옛 누나와 지금 누나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대로 꼭 안아 주려고 애를 썼다.

지나가던 국민학생 형들이 양갈보니 뭐니 하며 저들끼리 히히득거렸다. 그건 아마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일 터였다. 동네 어른들도 ‘미친년. 양색시 짓 하다가 양놈한테 맞고 쫓겨나 저 꼴이 됐다나 어쨌다나’ 하고 쑥덕거렸다.

그 당시엔 문둥이(한센인)들이 간혹 나타나 구걸을 하곤 했는데, 천형 받은 죄인이라며 천대하던 그들보다 오히려 양갈보를 더 사갈시했다.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선애 누나의 빛 잃은 큰 눈을 청운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음악 소리가 경쾌하게 바뀌고 미군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휘파람으로 인해 청운은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과연 어느 쪽이 추억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미군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홀의 여자들이 잃어버린 먼 고향의 선애 누나와 겹치곤 했다. 양갈보라는 생소한 이름 앞에서…그녀들은 모두 부모가 지어 준 본명을 지우고 익명의 요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미란, 애희, 정아, 메리 킴, 신시아 같은 가명은 그녀들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여자가 장막을 젖히며 무대 위로 물 흐르듯 걸어나왔다. 진홍색 춤옷 차림의 댄서였다. 흑백 미군의 환호성에 대해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던지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전처럼 붉게 물들이지 않은 검은 생머리채가 율동적으로 나부꼈다. 그녀는 재즈 곡조에 맞춰 진홍 요정인 양 춤을 추었다.

천정에서 오색 미러볼이 빙빙 돌며 그녀의 드러난 흰 살갗에 몽환적인 빛무늬를 그렸다. 어찌 보면 한 마리 화사花蛇처럼 매혹적인 몸놀림의 춤사위였다.

은근히 기다림직한 스트립쇼는 없었다. 겉옷을 벗어 던지자 알몸 대신 하얀 모시적삼이 나타났다. 춤은 관중의 눈길을 현혹시키려는 듯 다채롭게 변화했다. 디스코에 캉캉춤이 뒤섞이더니 무당의 살품이춤에서 우아한 궁중무로 나아갔다. 하얀 반투명 치마의 레이스가 허벅지 위로 펄럭 올라가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진한 화장 때문인지 희디희었고 입술은 피를 머금은 장미꽃잎처럼 붉었다. 그런데 춤추며 얼굴을 살짝 돌리는 순간 다른 한쪽 뺨은 검은 색이었다. 검은 반쪽 얼굴의 붉은 입술을 아프리카의 처녀인 양 비밀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춤이 격렬해질수록 하얀 얼굴과 검은 얼굴이 빠르게 교차하더니 이윽고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그래도 붉은 입술은 뭔가 비밀을 말하려는 듯 살짝 열리곤 했다. 서서히 춤 동작을 갈무리하면서 그녀는 무대 구석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마이크를 들고 메아리처럼 속삭이며 나타났다.

“대니…대니….”

그건 연인을 부르는 요정 에코Echo의 목소리에 못지않았다. 홀 안의 미군들은 그 부름에 화답하듯 환성을 질러댔다. 무희는 인사도 하지 않고 애닯은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흑백 환호성

Oh Danny boy, the pipes are calling(오 대니 보이, 저 피리들이 부르고 있어)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골짜기에서 골짜기로 그리고 산 아래로)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dying(여름은 떠났고 모든 장미들은 죽어가고 있어)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ye(넌 가야 하고 난 작별을 해야 해)
But come y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그러나 여름이 초원에 머물 때나)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골짜기가 눈에 덮여 하얗고 잠잠할 때는 돌아와)
Oh Danny boy, I love you so(오 대니 보이, 난 너를 너무나도 사랑해)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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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이후 꺼낼 국민의힘 개헌 꽃놀이패

지방선거 이후 꺼낼 국민의힘 개헌 꽃놀이패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여야 6당이 참여한 개헌 시도는 국민의힘의 투표 불참으로 인해 결국 무산됐다. 입법적 전격전을 선호하는 민주당은 지방선거 이후 내년 재보궐선거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공백기를 노릴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힘의 청야전술은 이를 막아낼 수 있을까? 국민의힘을 제외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여야 6당이 발의한 헌법 개정안이 지난 7일 의결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 처리됐다. 국민의힘은 이날 표결 불참을 당론으로 정한 후 의원 전원이 불참했다. 이튿날인 8일,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예고하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개헌안 처리를 중단했다. 정족수 미달 투표 불성립 현행 헌법에 따르면, 개헌안은 국회 재적 의원 과반이나 대통령이 발의할 수 있다. 대통령은 이를 20일 이상 공고해야 하고, 국회는 공고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해야 한다. 이어 30일 이내에 국민투표를 거쳐 유권자 과반이 투표하고, 투표자 과반이 찬성해야 확정된다. 지난 7~8일 기준, 국회 재적 의원은 286명이라서 개헌안 가결에는 191명의 찬성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의원은 모두 106명이다. 여야 6당 의원 전원이 개헌안 투표에 참여해 찬성한다면, 국민의힘에서 최소 11명 이상의 이탈자가 나와야 한다. 개헌안에는 ▲헌법 전문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부마 민주항쟁 명시 ▲계엄 선포 시 48시간 이내 국회 승인을 받아야 유효하도록 변경 ▲국회가 계엄 해제를 능동적으로 주도할 수 있도록 대통령 권한 축소 등의 내용이 담겼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7일 청와대 앞에서 진행된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재명은 연임 불가 선언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며 “개헌을 하겠다면, 먼저 이재명이 연임 불가를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지난 8일 기자들을 만나 “부마 민주항쟁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을 헌법 전문에 담는 데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며 “헌법 전문은 특정 사건에 대한 게 아니라, 통합적 역사 인식 아래 균형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건국·새마을운동·근대화도 다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87년 개헌은 오로지 제왕적 대통령 견제에만 집중해서, 국회에 예산·입법 등 막강한 권한을 몰아주는 기형적 구조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회가 권력남용을 이유로 언제든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탄핵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다면,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폭주하는 국회도 해산의 심판대에 설 수 있어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완성된다”며 “의회해산권 도입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의원은 지난해에도 민주당을 비판할 때마다 의회해산권 도입을 주장했다. 국민의힘 주요 관계자들의 발언에 대해서는 “개헌안 속 숨겨진 덫을 잘 파악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개헌은 통치 구조 개헌의 전초전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헌법적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헌법 제128조 제2항은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과거 대통령들이 개헌을 통해 정권을 연장했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성적 고려 차원에서 삽입된 조항이다. 대통령이 해당 조항의 효력을 무시하면서 임기 연장·중임 변경을 추진하려면 하야한 후 재선을 노려야 한다. 건국·새마을운동·의회 해산 쏟아내…과연? 이재명 독재 연장? 헌법 구조상 불가능한데…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 매우 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상식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송 원내대표가 헌법 전문에 추가할 것을 요구한 건국·새마을운동·근대화도 실제로 시도할 경우, 엄청난 논쟁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헌법 전문은 실제 헌법재판에서 보충적 규범으로 활용되는 등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법 규범으로서의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의 정체성과 헌법의 취지를 선언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는 가치를 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역사적 평가가 끝난 불가역적 가치를 담는 게 원칙이다. 그래서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4·19 민주 이념 등이 담겨있다. 여야 6당이 전문 추가를 시도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마 민주항쟁 등도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 특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재평가를 주도했던 정권은 국민의힘의 전신 신한국당 소속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였다. 송 원내대표가 주장한 건국 이념 반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곧바로 충돌한다. 임시정부 법통 논란은 해방 직후에도 치열하게 진행됐던 논쟁이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했던 진영은 이승만 전 대통령·한국민주당 등 우익 진영이었다. 제헌의회도 임시정부 시절 임시의정원의 정통성을 승계하는 방향으로 정통성을 확보했다. 이는 김 전 대통령·김대중 전 대통령도 인정한 후 역사적 상식으로 굳어졌다가 뉴라이트 진영이 건국절 논란을 일으키면서 송 원내대표의 주장으로까지 흘러간 것이다. 건국 이념 반영은 임시정부 법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나 의원이 주장한 의회해산권에 대해서는 “대통령제와 맞지 않는다”는 반박이 나온다. 의회해산권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총리가 보유하는 권한이다. 의회가 갖는 내각불신임권과 함께 상호 견제를 위한 짝패를 이룬다. 국무총리가 있고, 현역 의원이 내각에 참여하는 우리 통치 체제는 일정 부분 의원내각제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된다. 대통령은 의회가 아닌 국민을 향한 정치적 책임을 진다. 아울러 국회는 대통령에 대해 탄핵소추권을 가질 뿐 대통령과 내각을 불신임할 수 없다. 대통령은 구조적으로 의회해산권을 가질 수 없다. 대통령이 의회해산권을 가졌던 것은 유신 헌법과 제5공화국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던 프랑스 드골 헌법을 참고했다. 역사적 평가 불가역 가치 국민의힘이 개헌안 표결에 불참하거나 필리버스터를 시도하는 것에 대해선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06석을 보유한 국민의힘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아울러 개헌안의 주요 내용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마 민주항쟁 등은 모두 전신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을 포함한 국민의힘의 약점이다. 국민의힘으로서는 4·19 혁명에 이어 역사적 약점이 헌법 전문에 추가되는 굴욕을 감당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은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는 부분까지 감수하면서 개헌안 표결에 불참했다. 부마 민주항쟁의 무대 부산·마산은 오랫동안 국민의힘을 탄탄하게 받쳐주던 주된 지지 기반이었다. 부산·경남은 노무현 전 대통령 등장 이후 경합 지역이 됐다. 국민의힘은 개헌 투표에 불참하면서 부산·마산의 위업을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을 걷어차는 외통수에 갇혔다. 비상계엄 관련 개헌안은 근본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면서 국회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국민의힘으로서는 개헌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서는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내부에서조차 평가가 일단락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민의힘이 배출한 전직 대통령의 업보가 헌법에 명백하게 못 박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위헌 정당”이라는 암시가 새 개헌안에 담기는 것을 배제하기 어렵다. 여야 6당 중 민주당에 대해선 “국민의힘의 구조적 약점을 날카롭게 찌르면서 기습적인 총력전을 시도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각 정당은 이미 6·3 지방선거라는 총력전을 앞두고 있다. 국민의힘이 개헌안 표결에 불참한 이유에 대해선 “개헌 시도가 지방선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을 한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민주당이 ‘총력전 속 총력전’을 시도한 것과 비슷하다. 개헌 시도와 6·3 지방선거를 묶는 연환계를 구사하면서 전쟁을 양면 전쟁으로 바꾸는 것이다. 당세가 줄어들어 물량 동원에 한계를 보이는 국민의힘을 상대로 심리적·물리적 과부하를 유도한 것이다. 이는 장 대표의 지도력 논란까지 파고들어 결정적 지점에 화력을 집중하고, 국민의힘의 정치적 명분까지 꺾으려 했던 난도 높은 승부수였다. 개헌안 표결은 진행하지 못했지만, 국민의힘의 궁색한 현실을 전방위적으로 폭로했기 때문에 “졌지만 지지 않은 승부”라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국민의힘은 그 궁색한 현실 때문에 투표 불참·필리버스터라는 고전적인 청야전술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총력 공격 총력 방어 이는 명장들이나 강대국이 자주 구사하던 전법이었던 사실을 전쟁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 태종은 제1차 고당(고구려-당나라)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전략을 바꿔 수시로 소규모 부대로 고구려를 침공해 변방을 교란하는 등 소모전을 병행했다. 태종의 뒤를 이은 당 고종은 2회에 걸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제2차 고당 전쟁 당시 사수에서 당나라 대군을 격파했지만, 방어선이 한반도 내부로 점점 밀리고 있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제3차 고당 전쟁에서는 내부 배반까지 겹쳐 고구려가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도 독일군이 서부전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는 기습을 당해 방어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을 때, 바그라티온 작전이라는 총력전을 진행해 동부전선 내 독일군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민주당이 노린 전세는 이 같은 구도였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표로 재임할 당시부터 윤석열정부를 상대로 30건이 넘는 탄핵소추를 발의하거나 법안 물량 공세를 펼치는 등 총력전 양상의 입법전을 주도했다. 170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수를 확보한 데서 비롯됐다. 원래 민주당은 압도적 지방선거 승리를 기대했다. 그러다가 이 대통령 공소 취소를 강하게 추진하는 상황에 대한 일부 유권자의 반감을 사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보수층이 결집하는 등 선거 구도가 백중세로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이 대통령 공소 취소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고, 개헌까지 시도했다. 지방선거 종료 이후엔 내년 4월 재보궐선거 전까지는 선거가 없는 만큼, 오는 6월부터 내년 4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여야가 전면전을 치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는 실제 정치학·정책학 이론으로도 입증된다. 존 W. 킹던 미국 미시간대 명예교수는 ‘정책의 창’ 이론을 주장했다.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준비된 해결책이 있으며 ▲정치권이 움직일 수 있는 분위기 등 3박자가 맞물리면 ‘정책의 창’이 열린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선거 종료 이후 유권자로부터 직접 심판받지 않는 그 10개월이 정책의 창이 열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개헌 및 이 대통령 공소 취소 등 물량 공세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전략적 시간대라고도 볼 수 있다. 업보·약점 헌법 전문 실리면 위헌 정당? 투표 불참·필리버스터…청야전술 한계 전술적으로 보더라도, 국민의힘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투표 불참·필리버스터라는 청야전술격 수동적 방어밖에 없다. 법안을 반복적으로 밀어붙이면, 국민의힘은 투표 불참·필리버스터로 대응하게 된다. 그럴수록 국민 피로도가 높아지고, 중도층의 의심을 받게 된다. 진영이 확고하게 나뉜 상황에서는 중도층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다. 필리버스터는 말 그대로 마지막 방법이어야 하지만, 국민의힘이 거듭 사용하면서 식상해져 그만큼 비장함의 강도도 낮아졌다. 민주당의 입법적 전격전과 국민의힘의 투표 불참·필리버스터는 일종의 경로가 됐다. 양당 모두 경로 의존성이 생긴 것이다. 물론 국민의힘은 송 원내대표와 나 의원을 통해 ▲건국 담론 ▲새마을운동 ▲근대화 ▲대통령의 의회해산권 등 반격 카드를 제시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려운 담론이기 때문에 기존 경로를 고칠 만큼 파급력이 강한 승부수가 되긴 어렵다. 아울러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가진 집권여당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선거 기간이 아닌 10개월 동안에도 지지층을 결집하면서 중도층의 설득을 얻을 영구적 선거운동을 할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대통령 공소 취소에 대해선 중도층의 의견이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민주당으로서도 도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헌안의 경우는 다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마 민주항쟁 ▲비상계엄 선포 및 해제 요건 변화 등은 국민 대다수가 이미 평가를 마친 사안이다. 이 대통령 공소 취소에 대한 중도층·보수층의 비판을 상쇄할 수도 있다. 민주당은 이 같은 영구적 선거운동을 통해 내년 재보궐선거에까지 대비하는 입법적 공세를 치르려고 한다. 청야전술은 자신의 경제 기반을 모두 허물면서 진행하는 극단적 처방이다. 국민의힘이 투표와 토론을 포기하거나 체력을 소비하는 등 극단적 처방을 할수록 대중·언론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어 지지 기반인 부산·경남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헌법 전문에 담는 것까지 포기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접어들었다. 22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동로마 제국이 몰락을 이기지 못했던 사례가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운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은 오스만 술탄국이 준비한 대형 ‘우르반 대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또 예니체리 등 최정예 병력을 앞세운 오스만 술탄국의 물량 공세도 이겨내지 못했다. 여기에 방어전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용병 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가 부상 때문에 전장을 이탈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궁색한 현실 자충수 되나 물론 청야전술에도 한계는 있다. 국민의힘에는 연개소문이나 조반니 주스티니아니조차도 없다. 지방선거가 끝나면 민주당에는 정책의 창이 열릴 것이다. 지도력 공백을 회복하지 못한 국민의힘은 이제 청야전술을 넘어선 새 전술을 고안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과연 정책의 창을 막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