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하지만 크리스마스엔 꼭 그렇지 않았다. 특히 블루문처럼 큰 곳의 홀엔 흑백인이 섞여 들어와, 이국에서의 삶을 서로 위로하는 듯 빙긋 미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곳에도 망나니 같은 놈은 있는 법인지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기이한 별세계였다.
모종의 화인
클럽 여인들은 한 대목 잡기 위해 제 나름대로 최고의 화장술을 발휘해 단장하곤 미군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외부의 한국 사람들이 양색시, 양공주, 양갈보 따위로 부르는 그녀들도 무슨 요괴나 마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환경에 처했을 뿐인 한국 여인이었다. 모종의 화인(火印)이 찍힌…그 검붉은 도장이 자의에 의한 건지 타의에 의해 찍혔는지 청운은 아직 판별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들의 가슴에 찍혔을 붉은 낙인은 반투명의 간유리에 의해 불그무레하게 번져 무슨 뜻을 지닌 글자인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충 짐작만 될 뿐.
청운은 어딘지도 모를 천왕산 기슭의 고향 마을에 살던 어린 시절, 양공주라고 욕을 먹던 어떤 누나를 본 적이 있었다. 여름날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는데, 허물어져 가는 산기슭 오두막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여자가 살며시 이름을 불렀다.
민들레 홀씨를 불어 날리며 청운을 향해 살풋 미소 지었다. 청운은 주춤주춤 다가갔다. 뱀영감집 딸 선애 누나였다. 두어 해 전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그 누나…서글서글한 눈과 앵두 같은 입술로 방긋 웃곤 하던 그녀는 청운을 친동생인 양 귀여워해 주었다. 땡깔(꽈리)을 입속에 숨긴 채 개구리 소릴 내어 어린 청운을 놀리며 까르르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집이 가난한데다 엄마인 뱀영감댁 아지매마저 병으로 앓아누워 골골거리는 형편이라 선애 누나의 해쓱한 얼굴엔 문득문득 수심의 그늘이 어리곤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청운은 그런 애슬픈 모습이 왠지 더 정겹고 고와 멍하니 쳐다보았었다. 스스로 내심 외로웠기 때문일까.
어느 날 저녁, 서녘하늘에 진 노을을 홀로 바라보던 청운은 탱자나무 무성한 골목을 지나다가 누나네 집으로 들어섰다. 흐릿한 등불이 비친 낮은 마루에서는 세 식구가 웅크려 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낡아빠진 상 위엔 꽁보리 밥과 된장찌개만 놓여 있었다.
선애 누나가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 청운은 누나의 숟가락을 들고 밥을 살짝 떴다. 쌀알 하나 없는 완전한 보리밥은 푹 불려서 그런지 문들문들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가난을 모르던 청운은 쌀밥보다 훨씬 별미라고 생각하며 된장으로 비벼 맛나게 먹었다.
뱀영감은 원래부터 땅꾼은 아니었다. 꽤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는데, 아지매의 병에 뱀이 특효약이란 소릴 듣고선 매일 뱀을 잡으러 다녔다. 하지만 아지매가 차라리 죽는 게 뱀탕을 먹느니보다 낫다며 상을 잔뜩 찡그린 채 거부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뱀영감이 대신 먹곤 그 기운을 전해 주기 위해 아지매를 껴안는다는 것이었다.
대목 잡기 나선 클럽 여인들
최고의 화장술로 미군들 맞아
하지만 병이 낫긴커녕 더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만 나돌았다. 영감님은 성이 백씨였는데, 뱀탕 때문인지 어쩐지 평소에도 늘 불그레한 얼굴로 혀를 날름날름했기에 동네 사람들은 뱀영감이라고 불렀다. 영감이 술을 한잔 들이켠 불콰한 얼굴로 능글맞게 웃으며 부르면 청운은 슬슬 도망치곤 했었다.
선애 누나가 고향 마을을 떠난 건 뱀영감이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후였다. 그래도 대여섯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부모님 병수발을 한 덕에 뱀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약값은 물론이고 조석 끼니마저 제대로 댈 수가 없는 형편인 모양이었다. 병석에 누운 엄마와 반신불수인 아버지를 두고 선애 누나는 어느 날 홀연 떠나 버렸다. 무정하게.
그 누나가 왜 저기 저런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걸까? 과연 선애 누나가 맞는 걸까? 청운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점점 더 다가섰다. 길고 앙상한 팔이 뻗어 오더니 청운을 끌어 꽉 껴안았다. 전에 품에 안길 때와는 달리 허전하고 구슬픈 느낌이었다. 그 향긋하던 몸내음도 이젠 없었다.
더구나 누나는 어린 청운이 의지할 기둥이라도 되듯 얼굴을 숙인 채 어깨에 기대며 뜻 모를 소릴 중얼대는 것이었다. 몸을 파르르 떨면서 울먹거리다가 갑자기 미친 여자처럼 깔깔 웃기도 했다. 청운은 힘에 겨웠지만, 옛 누나와 지금 누나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대로 꼭 안아 주려고 애를 썼다.
지나가던 국민학생 형들이 양갈보니 뭐니 하며 저들끼리 히히득거렸다. 그건 아마 부모로부터 들은 얘기일 터였다. 동네 어른들도 ‘미친년. 양색시 짓 하다가 양놈한테 맞고 쫓겨나 저 꼴이 됐다나 어쨌다나’ 하고 쑥덕거렸다.
그 당시엔 문둥이들이 간혹 나타나 구걸을 하곤 했는데, 천형 받은 죄인이라며 천대하던 그들보다 오히려 양갈보를 더 사갈시했다.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선애 누나의 빛 잃은 큰 눈을 청운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음악 소리가 경쾌하게 바뀌고 미군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휘파람으로 인해 청운은 추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과연 어느 쪽이 추억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미군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홀의 여자들이 잃어버린 먼 고향의 선애 누나와 겹치곤 했다. 양갈보라는 생소한 이름 앞에서…그녀들은 모두 부모가 지어 준 본명을 지우고 익명의 요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미란, 애희, 정아, 메리 킴, 신시아 같은 가명은 그녀들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여자가 장막을 젖히며 무대 위로 물 흐르듯 걸어나왔다. 진홍색 춤옷 차림의 댄서였다. 흑백 미군의 환호성에 대해 그녀는 요염한 미소를 던지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전처럼 붉게 물들이지 않은 검은 생머리채가 율동적으로 나부꼈다. 그녀는 재즈 곡조에 맞춰 진홍 요정인 양 춤을 추었다.
천정에서 오색 미러볼이 빙빙 돌며 그녀의 드러난 흰 살갗에 몽환적인 빛무늬를 그렸다. 어찌 보면 한 마리 화사花蛇처럼 매혹적인 몸놀림의 춤사위였다.
은근히 기다림직한 스트립쇼는 없었다. 겉옷을 벗어 던지자 알몸 대신 하얀 모시적삼이 나타났다. 춤은 관중의 눈길을 현혹시키려는 듯 다채롭게 변화했다. 디스코에 캉캉춤이 뒤섞이더니 무당의 살품이춤에서 우아한 궁중무로 나아갔다. 하얀 반투명 치마의 레이스가 허벅지 위로 펄럭 올라가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진한 화장 때문인지 희디희었고 입술은 피를 머금은 장미꽃잎처럼 붉었다. 그런데 춤추며 얼굴을 살짝 돌리는 순간 다른 한쪽 뺨은 검은 색이었다. 검은 반쪽 얼굴의 붉은 입술을 아프리카의 처녀인 양 비밀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춤이 격렬해질수록 하얀 얼굴과 검은 얼굴이 빠르게 교차하더니 이윽고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그래도 붉은 입술은 뭔가 비밀을 말하려는 듯 살짝 열리곤 했다. 서서히 춤 동작을 갈무리하면서 그녀는 무대 구석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마이크를 들고 메아리처럼 속삭이며 나타났다.
“대니…대니….”
그건 연인을 부르는 요정 에코Echo의 목소리에 못지않았다. 홀 안의 미군들은 그 부름에 화답하듯 환성을 질러댔다. 무희는 인사도 하지 않고 애닯은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흑백 환호성
Oh Danny boy, the pipes are calling(오 대니 보이, 저 피리들이 부르고 있어)
From glen to glen and down the mountain side(골짜기에서 골짜기로 그리고 산 아래로)
The summer's gone and all the roses dying(여름은 떠났고 모든 장미들은 죽어가고 있어)
'Tis you, 'tis you must go and I must bye(넌 가야 하고 난 작별을 해야 해)
But come ye back when summer's in the meadow(그러나 여름이 초원에 머물 때나)
Or when the valley's hushed and white with snow(골짜기가 눈에 덮여 하얗고 잠잠할 때는 돌아와)
Oh Danny boy, I love you so(오 대니 보이, 난 너를 너무나도 사랑해)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