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우리의 대배우 이순재

  • 서진 기자 jen9@ilyosisa.co.kr
  • 등록 2025.12.01 11:22:17
  • 호수 15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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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남을 ‘국민 아버지’

[일요시사 취재1팀] 서진 기자 = “이 아침이 드라마 한 장면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선생님이 ‘오케이, 컷’ 소리에 툭툭 털고 일어나시고 ‘다들 수고했다. 오늘 좋았어’라고 해주실 것 같습니다.” 지난달 27일 오전 5시30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국민 배우’ 고 이순재 영결식에서 배우 김영철이 목멘 소리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배우 이순재. 그의 생은 단지 배우로서의 삶만은 아니었다. 후학을 가르치는 스승으로도, 정치인으로도 존재했다. 수십년간 문화 예술계에 그가 쌓은 헌신과 노고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됐다. 이순재, 그 이름은 오랫동안 한국 연극과 방송,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빛나는 별이다.

대한민국
연기 역사

지난달 25일 새벽, 91세의 나이로 별세한 이순재는 70년 가까이 연기 인생을 이어오며 현역 최고령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건강 악화로 출연 중이던 연극을 취소한 뒤 조용히 휴식을 취하다가 작고했다.

고인의 영결식에서는 배우 정보석이 사회를 맡고, 김영철과 하지원이 추모사를 낭독했다. 이 외에도 많은 배우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발인은 같은 날 오전 6시20분에 치러졌으며, 장지는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에덴낙원이었다.

영결식에서 사회자 정보석은 “선생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 후배들이 따라갈 수 있는 큰 역사였고, 선생님은 항상 제일 앞에서 큰 우상으로서 후배들이 마음 놓고 연기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셨다”며 그는 이순재를 ‘연기의 역사’라고 칭했다.


‘평생 연기했는데 팬클럽이 없다’는 말에 팬클럽 회장을 자처했던 배우 하지원은 추도사에서 생전 고인과 연기에 관해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당시 “연기는 왜 할수록 어려운가요? 라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잠시 저를 바라보더니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나도 지금까지 어렵다’고 하셨다”며 “그 한마디는 저의 큰 위로이자 오랜 시간 마음 깊이 새긴 가르침이었다”고 말했다. 하지원은 “저는 선생님의 영원한 팬클럽 회장”이라며 추도사를 마쳤다.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며 가수 겸 배우 이승기, 배우 최수종·하희라 부부, 송승헌, 김성환, 이한위, 손숙, 박상원, 김희애, 장용, 최지우, 가수 이용, 바다, MC 유재석, 박경림 등이 조문했다.

tvN 여행 예능 <꽃보다 할배>를 같이 했던 원로배우 백일섭, 박근형, 신구, 김용건도 빈소를 찾았다. 백일섭은 “먹먹해서 하루 종일 소화가 안 된다”며 “(이순재와) 거의 50년을 가깝게 지냈다. 가끔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았다”고 전하면서 “형이 95살까지 하면 나도 95살까지 연기할 거라고 했었는데, 약속 못 지키고 가시나”라고 애도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유족에게 대한민국 정부 포상의 최고 훈격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훈장은 영전에 함께 놓였다. 최 장관은 “연극, 영화, 방송을 아우르며 칠십년의 세월 동안 늘 우리 국민과 함께하며 울고 웃으셨다”며 “선생님이 남기신 발자취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선생님, 우리 모두 신세 많이 졌습니다”라고 고인을 기렸다.

91세 나이로 별세…후배들 배웅 속 영면
<햄릿> 보고 배우의 길…70년 연기 인생

고인은 지난 1월 <개소리>로 KBS에서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역대 최고령 수상자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이순재는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여러분, 정말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수상 소감으로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남겼다.


이순재는 1934년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태어나 4세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이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해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로 데뷔해 연극 <지평선 너머>를 시작으로, 총 70년 가까이 연기 인생을 이어왔다.

무대뿐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활약하며 ‘국민 아버지’로 대중들에게 친숙히 다가왔다. 그는 KBS와 MBC 등을 넘나들며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했다.

대표작으로는 1991년 방영된 MBC 주말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 고집스러우면서 가부장적인 아버지 ‘이병호’ 역을 맡았다. 그는 1990년대 당시 전형적인 아버지 상을 연기하며 엄격하고 목소리가 큰 성격의 가장을 보여줬다.

특히 아들인 이대발 역의 최민수를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대발아”라고 부르는 대사가 전국적으로 유행어가 될 만큼 큰 인기를 얻으면서 ‘대발이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작품은 역대 한국 드라마에서 손꼽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1999년 드라마 <허준>에서 이순재는 주인공 허준의 스승인 명의 ‘유의태’ 역을 맡았다. 유의태는 뛰어난 의술과 강한 성격을 지닌 조선 최고의 한의사로, 젊은 허준에게 의술과 인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든든한 멘토이자 조력자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순재는 <허준>에서 탁월한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주인공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지혜와 용기로 돕는 장면들이 크게 사랑받았다.

특히 임진왜란 중 허준을 위험에서 구해내고, 의서 편찬을 지원하며 허준이 궁궐 내에서 인정받게 만드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돋보였다. 유의태의 엄격하지만 인간적인 모습과 불같은 성격, 그리고 허준에 대한 깊은 애정이 어우러진 장면들이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았다.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64.8%를 기록하며 국민 드라마로 자리 잡았고, 이순재의 일품 연기는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평가받았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사극 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높은 완성도로 아직까지 사극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고인이 “단순한 국민 배우를 넘어 한의철학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국민에게 온전히 전달해 준 귀중한 분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의학 발전과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한 고인의 공로를 길이 기억하겠다”고 전하며 추모했다.

이 작품을 통해 이순재는 한의학의 뿌리와 철학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전달하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대한한의사협회는 그를 ‘명예 한의사’로 위촉했고,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도 ‘한의학 명예 학사’ 학위를 수여한 바 있다.

전설의
발자취

2006년 방영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가족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는 본명 그대로 ‘순재’라는 인물로 등장해 한방병원 원장으로서 까칠하고 권위적인 가부장 역할을 했다. 아내 ‘문희’와 자식들에게 엄격하고 때로는 가족들 속을 썩이기도 하지만, 결국 가족을 위한 진심 어린 애정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순재’는 작품에서 아들과 손자들 몰래 인터넷 야동(야한 동영상)을 본다는 설정으로 ‘야동 순재’라는 전무후무한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노년 남성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유쾌한 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2009년 방영된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은 ‘하이킥’ 시리즈 형태로 시청자 앞에 재등장했다. 이순재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여기서도 ‘순재’라는 이름으로 출연하지만, 한의사에서 자수성가한 식품회사 사장으로 변신해 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그는 다혈질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자상하고 매너 있는 역할을 맡았다. 아내와 사별한 이후 6년 만에 다시 사랑을 찾아 나선 ‘순재’는 유쾌한 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를 다시 한번 매료시켰다.

특히 새로운 사랑인 ‘자옥’과의 러브라인과 사위인 정보석 등 가족 간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은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시트콤은 이순재에게 또 다른 세대와 공감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를 확고히 한 작품으로 남았다. 특히 그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출연진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2007년 MBC 사극 드라마 <이산>에서 조선 왕 영조 역을 맡아 냉철하고 카리스마 있는 왕의 모습을 연기해 같은 해 MBC 연기대상에서 사극 부문 황금연기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영조의 권위와 냉철함을 표현하며 아들 이산(정조)을 향한 복잡한 감정, 권력과 왕권 유지를 위한 결단을 연기하는 면모로 돋보였다.

이순재는 이 밖에도 <베토벤 바이러스> <선덕여왕> <대물> <욕망의 불꽃> 등 굴지의 인기 드라마에 출연했다.


2008년 MBC 미니시리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는 악단 대표 ‘김갑용’ 역할로, 음악과 인생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며 주목받았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캐릭터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김갑용의 치매 증상이 점차 심해지면서 발생하는 주변인들과의 관계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 큰 호평을 받았다. 이순재는 <베토벤 바이러스>를 통해 2008년 MBC 연기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10년 SBS 드라마 <대물>에서는 ‘백성민’ 대통령 역을 맡아 권력자의 위엄과 인간적인 면모를 동시에 소화했다. 그는 권력의 무게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 대통령 역을 소화했는데, 특히 ‘조배호’ 역의 배우 박근형과 정치적 갈등을 이루며 긴장감을 높였다.

2015년에는 KBS2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며 연기상을 수상하는 등 다수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것으로 평가받았다.

최근 작품은 지난해 KBS 드라마 <개소리>로, 주연으로 출연한 미스터리 코미디 드라마다. 이 작품은 이순재가 드라마 촬영 중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갑질 배우’라는 오명을 쓰고 충격에 빠져 거제도로 도피성 휴양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평생 연극
깊은 애정

그곳에서 은퇴한 경찰견 ‘소피’와 만나 강아지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듣게 되면서 그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 이후 거제도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피와 함께 조사하며, 인간관계와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가는 이야기로, 유쾌하면서도 발칙한 노년 성장기를 담아냈다.

이순재가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생 2막을 열어가는 모습이 주를 이루고,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배우 김용건과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돕는 동거 관계도 주요 웃음 포인트로 등장했다. 그에게 이 작품은 2024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케 한 생애 마지막 수상작이기도 했다.

이순재는 연극에 대해 평생 깊은 애정을 가진 배우였다. 그는 2018년 한 인터뷰에서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연기하고 싶다. 매 작품이 유작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말하며 무대에 대한 특별한 책임감과 열정을 드러냈다.

2023년에도 “내 소망은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는 발언으로 연극에 대한 애착과 그가 생각하는 배우의 삶을 진솔하게 밝혔다.

이순재는 “배우가 자기 연기를 구체화해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은 연극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배우였다. 그는 연극 <장수상회> <앙리할아버지와 나> <세일즈맨의 죽음> <리어왕> 등을 통해 더욱 가까이서 관객과 마주했다.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는 2018년 시작해 2021년에는 서울 공연과 지방 투어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보여졌다. 흥행 면에서 작품성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꾸준한 관객 호응을 받았다. 특히 현실적인 세대 갈등과 따뜻한 메시지로 관객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었다.

티켓 오픈 시마다 빠른 매진을 기록하며 흥행 성공을 거뒀고,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그는 <장수상회>와 같은 후속작의 성공에도 기여하며, 세대 공감을 자아내는 휴먼 드라마를 만들어 이 연극을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겼다.

이순재는 2020년부터 3년 동안 연극 <장수상회>에서 ‘김성칠’ 역을 연기했다. 까칠하고 융통성 없는 노신사 성칠이 오랜 시간 지켜온 장수마트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원로배우 신구, 손숙 등 베테랑 배우들이 선사하는 섬세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무엇보다 가족 간 갈등과 화해, 치매 환자에 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많은 공감을 얻었다. 연극을 관람한 관객들은 “내 자신과 가족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연극 보면서 오열한 건 처음”이라는 등의 호평을 쏟아냈다.

‘대발이 아버지’부터
‘야동 순재’까지 소화

이순재는 연극 <리어왕>으로 정점을 찍었다. 87세의 나이에도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됐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과 방대한 대사를 소화하며 ‘노장 배우’의 상징으로 불렸다. 2024년 백상예술대상 특별무대에서 <리어왕> 연기를 재연하기도 했다.

배우 박근형은 이순재의 장례식장에서 2021년 방영됐던 골프 예능 <그랜파>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순재가 “취침 시간에도 계속 연극 <리어왕> 대사를 외웠다”며, 이순재에게 “‘일을 좀 적게 하시는 건 어떻냐’고 했는데 ‘아니야, 이건 내가 꼭 해야 돼. 하고 싶었던 거야’”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순재는 구순(90세)이었던 지난해 건강 이상으로 활동을 중단하기 전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연기를 펼쳤다.

이순재는 나영석 PD가 연출한 대표 예능 <꽃보다 할배> 시리즈에 출연하며 그와 큰 인연을 맺었다. <꽃보다 할배>는 나영석이 tvN으로 이적한 후 처음 만든 작품이다. 2013년 첫 방영을 시작으로 시즌 4까지 제작된 여행 버라이어티로 이순재, 신구, 백일섭 등 원로 배우들과 여행 예능을 펼쳐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배우 이서진은 젊은 짐꾼 역할로 출연하며 할아버지 세대와 호흡을 맞췄다. 나영석은 이순재의 별세 소식에 깊은 충격과 애도를 표하며 방송 중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회고했고, 이서진과 함께 빈소를 방문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꽃보다 할배>에서 ‘순재 할배’는 귀엽고 순박한 매력으로, 때로는 직진하는 엉뚱한 모습들을 보여줬다. 동시에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외국어를 유창히 구사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우는 모습이 담겨 찬사를 받았다.

또 파리, 스페인 등 해외여행에서 보여준 모습들도 화제가 됐다. 이순재는 나영석과 멤버들 사이에서 중심 역할을 하며 특유의 유머와 인간미로 화면을 빛냈다. 나영석이 인터뷰에서 “이순재는 ‘꽃할배’ 그 자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방송계도 추모를 이어갔다. KBS 2TV에서는 지난달 25일부터 26일까지 <추모특선 국민배우 이순재 개소리 1~4회 몰아보기>와 <추모특선 국민배우 이순재 십분간, 당신의 사소한>을 방영했다.

KBS는 “반세기 넘게 한국 방송 발전에 기여한 고인의 예술적 업적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분향소를 설치했다”며 서울 여의도 KBS 본관 2층에 고인의 추모 공간을 마련했으며, 일반인들의 조문 행렬이 잇따랐다.

끝까지
무대서

이순재는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다. 나는 완성을 향해 끊임 없이 도전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이 같은 심상으로 도전했던 드라마가 310편, 영화가 130편, 연극이 60편이었다.

연기를 향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미하는 자세와 철학은 그가 평생 현역으로 연기활동을 이어온 이유이자, 후배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이유였다. 이제 그는 평생을 예술에 바친 진정한 장인으로 편안한 영면에 들었다.

<jen9@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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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이 당심 반영 비율을 늘린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이어 장동혁 대표를 필두로 지방선거 전략으로 ‘반명 빅텐트론’을 지난 대선에 이어 또 거론했다. 국민의힘이 6년째 내리 실패한 전략을 또 끌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힘이 지난달 25일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대변인을 맡은 조지연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진행된 기획단 회의 후 “내년 지방선거 경선에서 당원투표 비중을 기존 50%에서 70%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심보다 당심으로?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은 당원투표 70%와 국민 여론조사 결과 30%가 혼합돼 결정된다. 만 44세 이하 청년은 가점을 부여받고, 여성 신인은 만 45세 이상이어도 가산점이 부여된다. 광역의원 비례대표 후보자는 청년 인재 오디션을 거쳐 선출해 최우선 순위로 당선권에 배치할 예정이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시행했던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 평가는 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원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장은 5선 나경원 의원이 맡고 있다. 나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 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된다. 현 시점에선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일각에선 “나 의원이 사심 때문에 경선 규칙을 정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 기반은 약하다”는 평가로부터 비롯되는 의심이다. 새로 정한 경선 규칙에 대해선 당내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태 의원은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실질적인 수권 전략을 실현하려면,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 규칙은 국민경선 100%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했다. 윤 의원은 “민심이 곧 천심이고, 민심보다 앞서는 당심은 없다”며 “민의를 줄이고 당원 비율을 높이는 것은 민심과 거꾸로 가는 길이고, 폐쇄적 정당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한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사법부 압박 논란과 대장동 항소 포기 문제까지 있었는데도 우리 당 지지율은 떨어지고 여당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며 “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성찰과 혁신 없이 표류하는 야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43%였고,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지난 7월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면접 여론조사 당시 국민의힘 지지율이 19%를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높지만, 두드러진다고 보긴 어렵다. 내부 비판 이어지는데 당심 비중↑ 비상계엄 사과 두고도 ‘옥신각신’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당분간 크게 오르긴 어렵다”는 일각의 예측도 있다. 다음 달 3일은 비상계엄 1주년이라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실정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불참 ▲윤 전 대통령 체포 저지 시도 ▲심야 대선후보 교체 시도 등 지난 1년 동안 국민의힘이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행보들이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비상계엄 사과 등을 통한 윤 전 대통령과의 확실한 절연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지난 2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좀 더 명확한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당내에서도 나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역사와 국민 앞에 누군가 사과해야 할 상황이고, 국민의힘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계엄이 있었고, 탄핵에 이어 정권을 잃은 후 국정의 주도권을 넘겨줬다”고 강조했다. 반면 같은 당 김재원 최고의원은 같은 달 2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회성 사과로 과거의 잘못을 끊어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사과를 자꾸 하는 것은 오히려 현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며 “사과하는 것보단 앞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는 게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장 대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같은 달 25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후 “사과 메시지를 내는 것은 지금 말씀드릴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국민의힘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무도한 이재명정권과 의회 폭거를 이어가는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구미역 광장에서 진행된 민생 회복·법치 수호 경북 국민대회에 참석해 “저들이 똘똘 뭉쳐 우리를 공격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비판하는 게 부끄럽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과 자녀 세대를 위해 소리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세력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라가 쓰러져가는데도 한마디도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당 발언은 “사과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돌발적인 계엄이다? 이재명 대통령·민주당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장 대표의 주장은 빅텐트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나 의원도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은 네 탓 공방을 벌이면서 분열에 빠져 있다”며 “정당의 뿌리를 흔드는 내부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로 뭉쳐 민주당의 독재 완성 계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선 각종 선거와 정국에 대응할 때마다 빅텐트론이 거론됐다. 시작은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재임했던 지난 2019년이다. 이듬해엔 “각 정당·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자유민주 세력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전 대표는 “통합 없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단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 나라를 망치려는 사람들은 통합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황 전 대표가 주장했던 빅텐트론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란 헌법 가치를 공유한다면, 태극기 세력부터 중도 보수 인사까지 아우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토대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바뀌었다. 황 전 대표는 제21대 총선 패배 후 물러났다. 이 대표는 빅텐트론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면서 세대 포위론을 토대로 지난 2022년 대선을 지휘했다. 지난 6월 대선에 출마했던 이 대표는 국민의힘 등 보수 각계로부터 후보 단일화 요구를 받았다. 이 대표는 당시에도 국민의힘 등에서 주장했던 ‘반명 빅텐트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선을 완주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의 빅텐트론을 놓고 “혁신 요구가 나올 때마다 제기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빅텐트론의 핵심은 통합이다. 통합은 정치권에서 반대 계파·의견을 억압하는 수사로 활용되는 예가 잦다. 빅텐트의 핵심은 조정 능력이다. 여기엔 다양한 계파·의견을 조율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장 대표는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체제 전쟁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모든 우파가 함께 모여서 이재명정권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가려는 걸 막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체제 전쟁’의 근거는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민주당의 배임죄 폐지·대법관 증원 시도 등이다. 장 대표는 공식적으로 국민의힘과 관계없는 황 전 대표가 지난 12일 내란 선동 혐의를 받아 내란 특검에 의해 체포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지는 재탕 삼탕 이어 “국민의힘만으로 이재명정부·민주당과 싸우긴 어렵다”며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주도하는 자유민주당 ▲새누리당 조원진 전 의원이 주도하는 우리공화당 ▲황 전 대표가 주도하는 자유와혁신 등을 연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개혁신당과 이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빅텐트론은 김문수 전 대선후보 등이 주장했던 빅텐트론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김 전 후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이기기 위해선 어떤 경우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덕수 전 총리 ▲황 전 대표 ▲이낙연 전 총리 ▲이 대표 등을 통합 대상으로 지명했다.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는 김 전 후보·한 전 총리의 단일화를 지지하면서, 당시 당내 주류와 불화했던 국민의힘 김상욱 당시 의원(현 민주당 의원)에게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장 대표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당원 게시판 의혹 관련 압박을 가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 권 전 원내대표는 “당원 대부분은 민주당 이 후보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반명 빅텐트가 필요하단 의견을 갖고 있다”며 “지도부는 당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개혁신당과의 연대설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오 시장이 장 대표·이 대표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관측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9월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이후 꾸준히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후 정치권 일각에선 “오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다시 출마하고,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보수 진영이 선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달 28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특별시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선·ARS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 시장은 보수 진영에서 민심 27.5%·당심 50.3%의 지지를 얻어 서울시장 후보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선출한 후 ‘여당 프리미엄’을 앞세워 오 시장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다면,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국민의힘이 중도층의 민심을 끝내 얻지 못하면, 오 시장으로선 힘겨운 선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체제 전쟁” 명분으로 사과 거부 홍 “국힘은 보수 참칭 사이비 레밍” 당내에서도 나 의원 등 막강한 경쟁자가 있어 본선행을 확실하게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지난달 23일 “국민의힘 내부에서 변화·쇄신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온다”며 “연대를 함께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 이어 1990년대식 ‘뭉치면 이긴다’ 구호만 내세운다”며 “그 전략으로 패배한 사람은 황 전 대표였는데, 같은 선택을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내부에도 연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강경 보수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내세우는 김민수 최고위원은 같은 달 25일, 채널A 유튜브 채널 ‘정치시그널’에 출연해서 “이 대표는 당내 많은 분쟁을 가져온 사람이라서 화합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며 “개혁신당과의 연대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의 주장은 오 시장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개혁신당은 보수 정당인지, 진보 정당인지 모르겠고, 그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최고위원이 되기 전부터 우측으로의 연대를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대선은 기동전·총력전 성격이 강한 반면, 지방선거는 진지전 성격이 강하다. 선거의 성격이 다르지만, 국민의힘에선 똑같이 ‘반명 빅텐트’라는 구호를 거론하고 있다. 역사엔 위기 상황에서 변화를 거부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 사례가 다수 기록돼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그 집단을 주도할 때, 이 사례는 더욱 빈번하게 재현된다. 중국 청나라에선 수구파를 이끌던 서태후가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던 광서제에게 반대해 정변을 일으켜 성공한 후 광서제를 유폐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8년 광서제의 능을 공식 발굴 조사한 결과, 광서제는 급성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3세 나이로 즉위한 청나라 황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인 선통제다. 선통제는 영화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제의 개혁 시도는 청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해 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지역구 관리에만 능하고, 기득권·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의원들이 당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언더 찐윤’이란 집단이 거론된다. 확증편향 소탐대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변화·혁신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핵심 이유로 언더 찐윤을 거론한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6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은 이념도 없는, 보수를 참칭한 사이비 레밍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여러 번 선거에서 패배한 전략임에도 확증편향·소탐대실을 근거로 같은 선택을 고집한다면, 무리 지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레밍과 비교되는 수모를 또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또 빅텐트론이 반복되고 있다. 빅텐트는 국민의힘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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