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고교학점제가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을 시작으로 시행 중인 가운데, 2028학년도부터 개편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충돌하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학생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라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와 달리, 2028학년도 수능은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과목을 요구하는 ‘통합형’ 체제를 예고하면서, 결국 ‘선택한 과목이 아닌 모든 과목을 공부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고등학생이 대학처럼 자신의 진로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는 제도다. 2022년부터 시범 운영을 거쳐 현재 고등학교 1학년에게는 이미 적용되고 있으며, 2025학년도부터는 전면 도입됐다. 이는 국어, 영어, 수학 등 공통과목 48학점을 이수한 뒤, 2~3학년 동안 진로에 따라 심화 과목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유불리 논란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획일적인 교과 과정에서 벗어나 학생 개인의 다양성과 자기 주도적 학습을 유도하고자 했다. 특히 학생들이 희망하는 학과나 직업군에 맞춰 과목을 설계하고, 학교는 그 선택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유연한 수업 운영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적용된 이후 학생들은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해 이수하고 있다. 이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202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개편안이다. 현재 고1 학생이 응시할 2028학년도 수능은 ‘과목 통합형’으로 개편된다.
2028학년도부터는 수학, 사회, 과학 영역이 ‘통합형’으로 출제되며, 수험생이 실제 수강한 과목과 관계없이 동일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
현행 수능은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으로 양분한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수학 영역은 ‘수학Ⅰ·Ⅱ’를 공통과목으로 하고, 학생은 본인의 진로에 따라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 중 하나를 선택해 시험을 치른다. 탐구 영역 또한 사회·과학 계열로 나뉘어, 수험생은 선택 과목 2개를 지정해 응시하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 학생은 자신의 학업 성향과 진로 계획에 맞춰 전략적으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2028학년도 ‘통합형 수능’은 수학과 탐구 영역 모두 기존 선택형 구조를 폐지하고, 모든 수험생이 동일한 문항을 푸는 방식으로 바뀐다. 수학의 경우 미적분, 기하, 확률과 통계 등 다양한 개념을 통합한 문항이 공통 시험으로 출제되며, 탐구는 기존의 17개 사회·과학 과목 대신 통합사회, 통합과학으로 출제된다.
진로와 관계없이 선택
어차피 전 과목 공부?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라고 하더니 결국 수능 때문에 모든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로 현재 고1 학생은 고교학점제를 통해 과목을 선택해 설계하고 있지만, 이들이 응시하게 될 수능은 선택한 과목과 관계없이 통합으로 묶여 출제될 예정이다. 즉,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선택한 과목과 무관하게 모든 응시자가 동일한 내용의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통합형 수능을 도입한 배경에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방향성과 평가 체계의 정합성을 맞추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이미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 문·이과 구분 없이 공동 과목을 중심으로 구성돼왔고, 이에 따라 대입 평가도 계열 구분을 없애는 방향으로 개편이 추진돼왔다.
또 수능 선택과목 체계는 과목별 난이도 차이와 이로 인한 유불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같은 시험을 봐도 어떤 과목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유리하거나 불리한 결과가 나타나면서, 공정성에 대한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교육부는 이 같은 논란을 해소하고자 선택형 구조를 없애고 모든 수험생에게 동일한 문항을 출제하는 ‘공통형’ 평가로 전환하기로 했다. 하지만 통합 수능도 기존의 유불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교육 현장에서는 특정 과목을 선택한 학생에게 상대적인 유불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수능 수학에서 고난도 문항은 단순한 계산 능력보다는 개념 응용과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출제진이 어떤 개념을 활용하느냐에 따라 체감 난이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학원가와 입시 분석 기관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적분이나 기하에서 자주 다루는 개념이 고난도 문항에 포함될 경우, 해당 과목을 수강하지 않은 학생은 문제를 푸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통합형 수능이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해당 과목을 학습한 학생들에게 유리한 구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28년부터 충돌 우려
“결국 한쪽으로 쏠릴 것”
교육부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에 맞춰 공정한 평가를 실현하겠다는 취지로, 특정 계열에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도록 문항을 균형 있게 출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교육계의 예측은 실제 학교 현장의 과목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때문에 수능에 유리하지 않은 과목을 선택하려는 동기 자체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진로와 적성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하도록 유도하지만, 입시 현실에서는 수능 대비에 유리한 과목 중심으로 선택이 집중되는 양상이다.
실제 업계에서는 그동안 수능에서 출제한 고난도 문항에서 주로 활용됐던 개념은 ‘미적분’과 ‘기하’였기 때문에 이 과목들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직 출제 경향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해 ‘출제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과목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수능 범위에 포함되는 과목을 별도로 학습해야 하는 구조는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와 모순된다. 고교학점제를 통해 선택과 집중을 요구하면서, 정작 대학 입시에서는 모든 학생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학생 입장에서는 “선택해 봤자 소용없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고, 이는 진로와 관계없는 과목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아직 진로를 구체화하지 못한 학생의 경우, 선택 과목을 실질적으로 결정하기 어렵고, 수능과 무관한 과목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려 하지 않게 되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한편, 2028학년도 수능 개편안이 발표되고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서 일부 학부모와 학생들은 사설 컨설팅에 의존해 시간표와 선택과목 전략을 세우고 있다. 현재 일부 교육 업체에서는 고교학점제 시간표 설계 컨설팅을 제공하고 수백만원을 받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사교육 의존은 곧 정보 격차와 계층 격차로 이어진다. 사교육 접근성이 낮은 지역이나 가정에서는 선택과목 설계, 수능 대비 등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교육 기회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제도 도입 당시의 ‘형평성 강화’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교학점제의 도입과 함께 내신 평가도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전환될 예정이다. 변별력이 낮아지는 만큼, 대학 입시에서 상대적으로 수능의 비중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수능은 등급뿐 아니라 백분위 점수가 제공되기 때문에 미세한 점수 차이까지 변별이 가능하다. 반면, 5등급 내신 체계는 등급 간격이 넓어져 교과 성적의 세밀한 평가가 어려워진다. 결국 각 대학에서는 수능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형평성 강화?
전문가들은 고교학점제의 선택권이 대학 입시에서도 실질적으로 반영되려면, 수능 체계도 이에 맞춰 유연하게 운영돼야 한다며 입을 모으고 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이는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수준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학생 개개인의 진로와 역량, 학습 환경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정책이며, 결국 특정 과목에 선택이 쏠릴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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