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0일, 부산을 찾아 “이재명이 만드는 위험한 세상을 막기 위해 나왔다”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쇼 주도 성장’ ‘120원 경제’, 사법 쿠데타를 막기 위해 뛰고 있다”고 외쳤다.
그런데 이날 한 전 대표의 선거 유세장엔 ‘김문수’가 빠져 있었다. 기호 2번이 써져 있는 선거운동복을 입었지만, ‘김문수’라는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
이날 유세가 ‘김문수 후보 지원으로 해석할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도 “이재명 후보가 가진 위험한 세상을 막을 방법은 우리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되는 길 뿐”이라고 답했다.
한 전 대표는 앞으로도 김 후보와 동행하지 않고 따로 지원 유세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서 그는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합류 조건으로 계엄·탄핵에 대한 분명한 사과,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와의 단절, 극우 세력과의 선긋기를 김 후보 측에 공개적으로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김 후보의 애매한 사과와 윤 전 대통령의 어쩔 수 없는 탈당만 이어지자, 한 전 대표가 김 후보와 각을 세운 셈이다.
김 후보가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되는 과정을 볼 때, 한 전 대표의 요구는 김 후보가 들어주기 힘든 무리한 요구였다.
이 같은 상황을 보면서 필자는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한 전 대표의 전략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 전 대표가 계엄을 반대하고 탄핵을 찬성했는데, 계엄을 옹호하고 탄핵을 반대했던 김 후보를 돕는다는 건 한 전 대표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 전 대표가 김 후보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한다”는 스탠스만 취하면서 명분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대선 이후 국민의힘의 당권 경쟁과 지방선거를 위해 독자적인 유세지만 그래도 대선 유세를 함으로써 국민의힘 당원들의 마음과 보수 세력의 힘을 얻어 실리를 챙긴 것이다.
한 전 대표의 전략은 차기 당권을 잡아 내년 지방선거서 세를 만든 이후 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장기적인 포석을 두는 전략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경선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 패한 후, 대선캠프에 합류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일방적인 선거 유세만 했다. 이후 당권과 대권을 잡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국민의힘 경선 4강에 오른 김문수·홍준표·안철수·한동훈 후보들 중 안철수 의원도 한 전 대표와 비슷한 처지다. 당권을 잡은 후 내년 지방선거를 치르고 대권까지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안 의원은 탄핵을 찬성해놓고 탄핵을 반대한 김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니, 자신의 향후 정치에선 명분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안 의원이 김 후보 당선을 위해 자신의 정치 명분은 접어둘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실리를 위해 명분을 버린 정치인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현재 김 후보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안 의원은 “한동훈 전 대표가 자기 정치만 하지 말고 선대위에 합류해 완전한 원팀의 모습으로 함께 가야 한다”고 연이어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한 전 대표는 절대 선대위에 합류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명분을 중요시하는 검찰 출신이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가 나갔던 유세장엔 빨간색 풍선과 함께 ‘한동훈의 정치를 응원합니다’라는 팻말을 든 지지자들 약 50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모래사장 한쪽에는 “한동훈 응원하러 다시 모였다. 한동훈 가는 길에 승리뿐”이라는 현수막도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 김 후보 유세장에 한동훈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좋지 않다. 대선 이후 윤심(윤석열 전 대통령의 마음)이 살아나기라도 하면 대선 유세장서 자기 정치만 한 한 전 대표가 공격 대상이 돼 당권 경쟁서 밀릴 수밖에 없다.
윤여준 더불어민주당 상임총괄선대위원장은 21일 “한동훈은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는데, 윤석열과 스스로 선긋지 못한 김문수 후보에 대해 지원 유세를 시작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자기 부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래의 국민의힘 지도자를 꿈꾸는 한 전 대표의 명분 있는 행보를 언급하기 전, 명분 없이 공동선대위원장직을 맡은 안 의원에게 먼저 자기 부정이라고 해야 했다.
이날 한 전 대표는 ‘정치 출생지’라고 밝힌 대구를 방문한다고 한다. 민심의 바로미터로 꼽히는 서문시장과 동성로, 그리고 경산 공설시장서도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한 전 대표의 전략은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국민의힘 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 전 대표의 명분 지키기는 무의미해진다는 점이다. 오히려 명분을 버리고 대선에 올인한 안 의원의 위상이 부각될 것이다.
한 전 대표의 명분과 실리가 국민의힘 김 후보가 대선서 패할 때 힘을 발휘한다는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박 전 대통령처럼 유세장서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한 전 대표와 명분은 잃고 실리만 챙기는 안 의원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