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대전 초등생 피살사건 김하늘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한 어린아이의 죽음에 세상은 충격에 빠졌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입학해 즐거운 학교생활을 시작해야 할 아이가 믿어야 할 선생님의 손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피해자 김하늘양은 8세의 어린 나이에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서 한 아이의 생명이 희생된 현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지난 10일, 대전 서구 관저동 한 초등학교서 초등학생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대전과학수사연구소는 이날 피해자 김하늘양의 시신을 부검했다. 김양의 사인은 ‘다발성 예기 손상에 의한 사망’으로 확인됐다. 즉, 날카로운 도구에 의해 여러 곳이 찔려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계획적 범죄
3번 경고음

당초 김양 유족은 부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선 부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양은 지난 10일 오후 5시50분경 학교 내 시청각실서 교사 A씨와 함께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됐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오후 7시경 숨졌다. 이날 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김양의 친할머니였다.

오후 5시쯤 김양의 아버지로부터 손녀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은 할머니는 즉시 김양을 찾기 위해 나섰다. 할머니는 “하늘이는 학교 정규수업을 마친 후 오후 4시20분까지 돌봄교실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서 “하교 후 학원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찾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휴대전화 앱을 이용해 김양의 위치를 추적했고, 앱에 표시된 위치는 다름 아닌 학교였다. 이에 아버지는 즉시 경찰에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학교 외부를 수색했고,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교내서 김양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사건이 발생한 학교 2층 시청각실 내 창고는 외부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학교 측은 처음에는 김양이 교내에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2층을 홀로 살펴보던 할머니가 시청각실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A씨를 발견했다.

할머니는 “손녀를 찾던 중 돌봄교실 옆 시청각실로 들어갔다”며 “비품 창고까지 확인하려 했는데 안이 너무 어두웠다.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는 순간, 피 묻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할머니가 A씨에게 김양을 봤냐고 묻자, 그는 “없어요. 나는 몰라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A씨의 머리맡에 손녀의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본 할머니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침착하게 뒤로 물러난 뒤, 곧바로 밖으로 나와 경찰과 김양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 상황을 전했다.

할머니는 “그 사이 여자가 문을 잠갔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발로 문을 걷어차 강제로 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119 구급대가 출동해 쓰러져 있던 김양과 A씨를 병원으로 긴급 이송했다. 현장의 참혹한 상황을 본 경찰은 김 양의 할머니에게 아이를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손녀가 숨졌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며 허망한 심정을 전했다.

경찰은 지난 11일 살인 혐의를 받는 교사 A씨에 대한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다고 밝혔다. A씨는 아직 중환자실서 치료 중이며,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경찰은 A씨가 목 부위 봉합 수술을 받기 전 피의자 진술을 확보했다.


“어떤 아이든 함께 죽을 생각”
선생님의 끔찍한 진술 충격

경찰 조사에서 A씨는 범행을 인정하며 “교무실에 있기 싫어 잠겨있던 시청각실을 열어뒀다”며 “돌봄교실서 수업이 끝난 후,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함께 죽을 생각으로 맨 마지막에 남은 아이에게 책을 준다고 해 시청각실로 데려왔다”고 진술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범행 당일 오후 학교 근처 마트서 흉기를 미리 구매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A씨가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사건 당일 오후, 학교서 약2㎞ 떨어진 주방용품 가게서 구입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흉기의 길이는 28㎝였다”고 밝혔다. A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복직 후 3일 만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교감이 수업을 못 하게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건 발생 직전까지 약 6개월간 질병 휴직을 했다가 복직한 지 불과 20여일 만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유족 측은 이번 사건이 계획된 범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A씨가 사건 당일 마트서 흉기를 미리 구매한 점과, 할머니가 최초로 현장을 발견했을 당시 가해 교사에게 자해 흔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김 양의 할머니는 “시청각실 문이 잠겨있었는데 경찰이 강제로 개방했을 때, A씨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들킨 후 자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양의 아버지는 사건 당시 딸의 위치를 추적할 때 사용한 애플리케이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하늘이의 휴대폰에 부모 보호 앱을 설치해뒀기 때문에 전화를 걸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아이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오후 4시50분쯤부터 아이 휴대폰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를 확인하면서 현장으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4시50분부터 들었을 때 하늘이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나이 든 여성이 달리기한 뒤 숨을 헉헉거리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소리,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 등이 들렸다”며 당시의 녹취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A씨는 2018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해 12월9일엔 질병 휴직을 신청했으며, 휴직 기간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휴직 당시 제출한 진단서에는 “5년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반복해 왔으며, 지난해부터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9월 이후 증상이 악화됐다. 심한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시달려 최소 6개월간 안정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를 근거로 A씨는 지난해 12월9일부터 6개월간 질병 휴직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과 20여일 만에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휴직 당시
진단서 보니…

복직 당시 제출한 진단서에는 “12월 초에 심했던 잔여 증상이 현재는 거의 사라져 정상 근무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기재돼있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진단서가 같은 병원의 동일한 의사에 의해 발급된 것으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즉,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같은 의사로부터 정반대의 소견을 받은 것이다.

A씨는 복직 후, 의사의 소견과는 달리 이상행동을 보였다. 그는 “왜 내가 이렇게 불행해야 하느냐”며 혼잣말을 반복하는 등 피해망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사건 발생 나흘 전에는 동료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A씨는 웅크린 채 앉아있었고, 이를 걱정한 동료 교사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갑자기 헤드록을 걸고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상황은 주변 동료 교사들이 말려야 할 정도로 심각했으나, 경찰 신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학교 측은 A씨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에게 다시 휴직을 강하게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측은 A씨의 문제 행동과 관련해 대전시교육청에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교육청은 같은 병력으로는 추가 휴직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시교육청 초등담당 장학 관계자는 “학교 측이 대전서부교육지원청에 해당 사안을 보고해, 지난 10일 오전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해 사실 조사를 진행했다”며 “조사 후 장학사는 학교 측에 해당 교사의 분리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한 뒤 돌아갔으나, 결국 그날 오후 사건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당사자를 직접 조사할 경우 자극할 우려가 있어 면담은 진행하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현행 교육공무원법에 따르면, 휴직 교사는 기간 만료 후 30일 이내에 복귀 신고만 하면 자동으로 복직할 수 있다. 문제는 복직 심사에 대한 법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각 지역 교육청마다 내부 지침이 다르다 보니, 어떤 곳은 단순한 서류 검토만으로, 또 어떤 곳은 면담 한 번으로 복직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김양의 죽음을 막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지적한다. 복직 직후 나타난 이상행동, 학부모들의 문제 제기, 동료 교사들의 반복된 이상 행동 보고 등 세 차례의 경고 신호를 무시한 결과 비극이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교육공무원법 제44조에 따르면, 교사가 정신적 또는 신체적 문제가 명백할 경우 임용권자가 직권으로 휴직을 명령할 수 있다. 또, 제45조에는 정신 건강 문제가 의심될 경우 최대 5년까지 휴직이 가능하다고 명시돼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정신질환이 있는 교원이 교직 수행이 가능한지 심의하고, 필요할 경우 교육감이 직권으로 휴·면직을 권고할 수 있는 ‘질환교원심의위원회’가 열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교육 당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예쁜 별’
애도 물결

결국 법적 장치가 마련돼있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점이 이번 사건의 핵심 문제라는 것이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가해자의 정신질환 이력이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이에 대한 편견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나종호 미국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조교수는 지난 11일 엑스(구 트위터)에 “우울증은 죄가 없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나 교수는 해당 글에서 “가해자는 응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서도 “아직 아무것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서 언론이 우울증 휴직 전력을 앞다퉈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죄는 죄인에게 있지, 우울증이 죄는 아니다”라며, “우울증 휴직 이력을 강조하는 보도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을 강화해, 정작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한국의 정신건강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현재 한국의 우울증 치료율은 10%에 불과하다. 즉, 10명 중 9명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언론이 정신질환을 자극적으로 보도할 경우, 치료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울러 “사람의 생명은 의사만이 살리는 것이 아니다. 펜으로도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며, 신중한 보도를 당부했다.

나 교수는 “같은 나이 딸을 둔 아버지로서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피해자 유가족의 감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역시 가해 여교사의 우울증을 앞세운 보도에 대해 나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 백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서 “오늘 오전 환자들이 ‘회사에서 나를 살인자로 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많이 전해왔다”며 “우울증이 있을 때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국내 현실인 만큼 여론이 이런 방식으로 조성되는 것이 무척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은 언론에 가해자의 진단명 언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소속으로 정신 건강 관련 자문을 담당하는 지원단은 지난 12일 성명을 통해 “특정 진단명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편견을 가중시킬 뿐,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사실에 기반해 사건의 사회 구조적 요인과 개선 방안에 집중해 주길 요청한다”고 밝혔다.

“막을 기회 3번 있었다”
병력 언급 편견만 가중

이어 “범죄 행위는 철저한 수사를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며,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원단은 정신 건강 보도와 관련한 권고 기준으로 기사 제목에 정신질환을 언급하는 것을 지양할 것, 정신 질환을 범죄 동기나 원인과 연결하는 데 신중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김양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김양의 아버지는 딸이 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했다. 그는 “하늘이의 꿈이 장원영이었다. 생일 선물로 아이브 포토카드를 받길 원했고, 특히 장원영 카드만 원했다”며 “어떤 프로그램이든 장원영이 나오면 늦게 자더라도 본방 사수를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동생이 뽀로로를 보고 싶어해도 무조건 장원영을 봐야 하는 아이였다”며 “장원영양이 하늘이가 가는 길에 따뜻한 인사 한마디를 건네준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룹 아이브는 김양의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화환에는 “가수 아이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황선홍 K1 대전시티즌 감독도 김양의 빈소를 찾아 추모했다. 생전 김양은 축구 팬인 아버지와 함께 대전시티즌 서포터즈로 활동해 왔다. 홈 경기 때마다 대전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응원했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던 김양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축구계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빈소를 찾은 황 감독은 “하늘이가 너무 어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라 더 가슴이 아프다”며 “좋은 곳에서 편안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애도했다. 축구 팬들도 추모의 뜻을 전했다. ‘대전하나시티즌 팬’ ‘대전 붉은악마’ 등의 이름으로 근조화환이 보내졌다.

김양의 빈소에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육종명 대전 서부경찰서장,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김양의 아버지는 빈소서 기자들과 만나 “제가 바라는 건 앞으로 우리 하늘이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신질환을 앓는 교사들의 치료와 저학년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할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교육부는 교원이 정신질환 등으로 정상적인 교직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직권 휴직 등의 조치를 내릴 수 있는 ‘하늘이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늘이 법
입법 추진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정신질환이 있는 교원이 일정 절차를 거쳐 직권 휴직을 받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늘이법은 교직 수행이 어려운 교사를 학생들과 분리하고, 복직 시 정상 근무 가능 여부를 엄격히 심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부총리는 폭력성 등 특이 증상을 보이는 교원에 대한 긴급 개입 제도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법 개정으로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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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