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⑬막막한 엄마 찾기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07.29 04:00:00
  • 호수 14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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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자, 가자꾸나. 조금만 가면 따뜻하고 아늑한 방이 있단다.”

여인은 용운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용운은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그는 결정하기 전에 마지막 확신이라도 얻으려는 양 여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여인은 역시 입으로만 상냥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은 전혀 표정이 없었으며 차가운 빛을 안쪽에 감추고 있었다.

여인의 미소는 점점 요염해졌다. 그러면서 가늘고 흰 손으로 용운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대합실서의 꿈


“아, 안 돼요! 난 안 가요! 여기서 울 엄마를 기다려야만 해요!”

“엄만 안 온단다. 얘야, 어서 가자꾸나.”

“거짓말 마요! 엄마는 꼭 온댔어요! 아줌마는 백여우 같아요. 난 절대로 따라가지 않아요. 그러니 어서 저리 가세요!”

“호호, 내가 백여우라구? 호호호, 넌 미친 녀석이로군. 그 자리서 굶어 뒈져 버려.”

여인은 용운의 눈빛을 보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악담을 뱉곤 슬그머니 대합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합실은 적막에 잠겨 갔다. 밤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용운은 쓰레기장에서 신문지를 주워 와 깔곤 누워 옹크렸다.

엄마 잃은 어린 소년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간간이 흐느끼는 한편 차가운 냉기가 몸속으로 스며드는지 이를 부딪치며 달달 떨었다. 밤은 깊어갈수록 점점 추워지고 밖에서는 바람이 빈 깡통을 굴리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마당가의 허물어진 화단엔 꽃보다 잡초가 더 무성하다. 거무죽죽하게 말라 구겨져 버린 지 오랜 장미 아래에 맨드라미와 봉숭아가 피어 있다. 

아이는 봉숭아의 푸른 열매를 톡톡 건드려 터뜨리다가 한숨을 쉬고 입맛을 다신다. 다섯 살이 될까말까한 어린 아이의 눈에 무료감이 어린다.

아침나절 내내 혼자 놀았던 기억들이 중첩되어 어린 넋에 시간을 인식케 하는 걸까. 아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주위를 둘러본다. 바람 한 점 없이 괴괴하다.

아이는 다시 화단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쌀눈만큼이나 작은 풀꽃을 찾아 한참 들여다보다가 발작적으로 봉숭아 꽃잎을 훑어 따서 마당에다 흩뿌린다. 

한여름의 태양이 중천에 이글거리며 따가운 빛을 내리쏘고 있다.

울 듯한 표정으로 자기가 버린 꽃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의 눈에 빛이 돈다. 멀찍이 날아 떨어진 분홍 꽃잎이 움직인다.

다른 것은 가만 있는데 한 잎만 옴직거린다. 아이는 새끼 고양이처럼 기어 다가간다. 꽃잎 밑에서 통통한 구더기가 불쑥 기어 나온다.

구더기가 꼬물꼬물 전진하자 아이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듯이 살살 어루만진다. 구더기는 기겁을 하고 옆으로 나뒹군다.

구더기가 줄행랑을 놓자 아이는 작은 손바닥을 앞에 세워서 거대한 벽을 만들고는 웃는다. 구더기는 이물질에 닿자 방향을 돌리지 않은 채 바로 꽁무니를 머리로 변전시켜 달아난다.

아이의 손가락 끝이 추적자가 되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뒤따른다. 엎드린 아이의 몸은 곰이나 거인 같다. 도망자는 발굽에 짓이겨진다. 아이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노르스름한 구더기들이 몇 마리나 줄을 지어 다가온다. 맞은쪽 구석에 붙은 재래식 변소가 그것들의 고향이다. 아이의 머리엔 그 작은 생물들이 더럽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듯싶다.


그의 눈엔 귀엽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비치는지 모른다. 아이는 구더기를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곤 가지고 논다.

윤기 흐르던 구더기의 몸은 먼지를 타서 꾀죄죄해지고 차츰 홀쭉해진다. 활발하던 움직임도 조금씩 둔해지더니 이윽고는 멈추고 만다. 

꿈에서 느낀 전쟁 공포감
다시 만나자 무언의 약속

아이는 울적히 내려다보더니 그 중의 한 마리를 집어들어 입 속에 넣고 씹어 본다. 한 마리를 더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날카로운 폭음이 하늘을 가르며 울려퍼진다. 아이는 움찔 놀란다. 폭음은 증폭되어 천지를 진동시킨다.

아이는 해쓱해진 얼굴로 하늘을 쳐다본다. 일단의 전투기 편대가 염천을 찢고 지나가며 길고 허연 생채기를 남기고 있다. 전투기는 태양보다 더 높이 떠가는 것 같다.

그 가운데 한 대의 기체로부터 은빛 광채 눈부신 폭탄 두 발이 투하된다.


그것들은 수리보다 빠르게 지상으로 하강하여 엄청난 폭발음을 일으킨다. 아이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외부의 어떤 다른 소리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 센 울음이다. 아이의 크게 벌어진 입 속엔 허연 구더기의 찢긴 살점들이 진물과 함께 흩어져 있다.

아이의 울음 소리가 잦아든다. 갑자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멎었다가 다시 저절로 떨린다. 아이는 손을 가져가서 비빈다. 떨림은 멎는다. 그는 한곳을 쳐다본다.

큰 거미 한 마리가 구석에 웅크려 있다가 빠르게 허공으로 기어 나온다. 똥파리가 줄에 걸려 맹렬히 파닥거린다. 거미는 발빠르게 움직이며 파리를 옭아맬 기회를 노린다.

유심히 살펴보는 아이의 눈이 깜박깜박한다. 동공이 점점 커져 가고,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엔 공포감이 어린다…. 

용운은 부르르 떨며 눈을 떴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리송했다.

그는 일어서서 이리저리 거닐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용운은 사흘을 기다렸다. 누군가 가엾게 여겨 던져준 동전 몇 푼으로 풀빵을 사먹으며 견뎠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래도 오지 않았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은 용운은 그 자리를 떠났다.

엄마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이상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돌아다니며 찾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용운은 현기증과 싸우며 남산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는 눈앞이 가물가물해져 엎어질 것만 같았다. 용운은 이를 악물고 걸어 올라 겨우 한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지난번에 엄마와 함께 앉아 소나무 껍질을 갉아 먹었던 곳이었다.

“엄마….”

용운은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저 위쪽, 하얀 탑과도 같은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그곳에는 엄마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엄마가 자기를 데리고 이곳에 올라왔던 이유는, 저 탑을 표지로 삼아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엄만 꼭 오실 거야. 아니, 이미 저 위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엄만 나를 내버린 게 아니고, 어떤 비밀스런 중요한 일이 있어 잠시 다녀오실 거야.”

불안한 눈빛

용운은 힘을 내어 남산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눈앞이 탁 트인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용운은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흰 적삼에 검정 무명치마를 입었던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고, 또 그 넓기만 하고 무정한 곳에서 언제 어떻게 엄마를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혹시 엄마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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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