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대담> 살아 있는 정치사 박지원을 만나다

“7공화국 문을 여시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치 9단 박지원’이 여의도로 귀환했다. 92.35%라는 최고 득표율과 함께 ‘최고령 국회의원’이란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박 당선인은 ‘팔순 새순’ 국회의원이라며 웃어 보였지만 정치 9단이라는 별명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결코 아닐 테다. 여의도 사무실서 <일요시사>와 만난 박 당선인은 국내 정치의 현주소를 조목조목 짚어갔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박지원 당선인은 지난 4·10 총선서 해남·완도·진도 선거구에 승기를 꽂는 데 성공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알려진 그는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여의도에 입성한 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변인과 비서실장 등 굵직한 직을 두루 연임했다.

박 당선인은 <일요시사>와 만나 여의도로 복귀한 소감에 대해 “기쁘지만 막중한 책임감도 느낀다”며 “싸우지 않고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국회, 윤석열 대통령의 잘못이 국민 앞에 명명백백히 밝혀지는 국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번 총선을 통해 5선을 달성했다. 당선인의 동력은 무엇인가?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답게, 독립지사의 아들답게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면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혼을 가지고 있다. 그 DNA가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정치를 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민주당의 역사를 함께했다. 그동안의 변화 중 체감되는 게 있다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 구성원도 바뀌기 때문에 당연히 민주당도 바뀌어야 한다. 개혁하고 혁신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당을 위해 희생한다는 ‘선당후사’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은 충성심과 애당심이 많았다. 지금의 의원들은 개개인의 생각을 조금 더 중요시하는 쪽인 것 같다.

-선당후사 정신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부모님이나 윗사람이 무언가를 시키면 싫더라도 눈물을 찍찍 흘리면서 그 말을 따랐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지 않나. 시대가 변했으면 거기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정치 지도자는 변화를 이끌거나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수가 높아 이번 국회의장 선거에 나설 것이란 예상과 달리 불출마를 선언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후보 등록 마감 전날인 지난 8일, 이재명 대표와 점심을 먹었다. 오찬 사실을 여태 공개하지 않았는데 오늘(13일 기준)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날 이 대표와 1시간 반 동안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 결과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표가 나에게 “나오지 마십시오”라고 직접 말한 건 아니다. 1시간 넘게 얘기하다 보면 대화의 흐름 정도로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국회의장 선거가 치러지기 전부터 후보들의 중립성 논란이 불거졌다. ‘기계적 중립은 필요없다’는 취지의 발언이 많았는데 어떻게 봤나?

▲국민의 정서는 중립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국회의장도 한때 당적을 가졌던 의원이고 임기를 마치면 당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친정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윤 대통령이 개혁, 입법, 특검 등을 향해 거부권을 남발한다면 의장으로서 삼권분립 원칙에 의해 국회 의견을 존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존경의 대상인 국회의장이 초반부터 “중립의 의무가 없다” “중립을 지키지 않겠다”라고 하는 건 올바른 정치가 아니라고 본다.

현재 민주당에서는 이 대표의 연임 여부가 뜨거운 감자다. 박 당선인은 이 대표의 연임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인물로 꼽힌다. 당내 주요 인물들이 연임론에 군불을 때면서 점차 기정사실이 되는 듯했다.

“이 대표 연임은 당연한 것”
정권 교체의 길로 ‘뚜벅뚜벅’

하지만 지난 16일 ‘어의추(어차피 의장은 추미애)’의 주인공이었던 추미애 당선인이 국회의장 경선서 낙선하면서 기류가 바뀌었다는 평이 나온다. 이 대표의 의중을 뜻하는 ‘명심’은 추 당선인을 향했지만, 투표 결과 우원식 의원이 당선되는 대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결과의 반작용으로 이 대표의 연임론이 굳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선거와 관련해 박 당선인은 “민주당이 아주 건강한 정당이라는 걸 국민에게 보여줬다”며 “결과적으로 우 의원의 당선이 이 대표를 살렸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가 연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총선이 끝나고 내가 처음으로 이 대표의 연임론을 얘기했는데 당의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대표의 연임은 당연하다고 본다. 정치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이뤄진다.

총선서 승리하면서 국민은 이 대표를 재신임했다.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2년 내내 차기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민주당의 절체절명 목표는 정권교체기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큰 이 대표를 앞세워서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각에서는 ‘친명 일색’ ‘이재명 독주’라는 비판도 나오는데?

▲어떠한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이어가는 것과 같다. 정권교체의 길을 이 대표가 끌고 가야 한다.민주당 내 당 대표 연임을 금지하는 당헌·당규는 없다. 단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1년 전에 당원·당직을 사퇴해야 한다. 당시 김대중 총재도 문재인 대표도 전부 1년 전에 사퇴했다.

인터뷰가 중반에 접어들고 본격적으로 현 정부에 관한 이야기가 화두로 올랐다. 정부가 각종 특검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자 범야권에서는 “윤 대통령이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으로 향하는 길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박 당선인은 “특검 거부 마일리지는 탄핵 마일리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던 시기를 생생히 겪은 정치인이다. 과거를 회상하던 박 당선인은 개헌을 통한 4년 중임제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탄핵 가능성을 시사했다. 근거는 무엇인가?

▲탄핵의 물결은 정치권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시작됐다. 3·15 부정선거, 4·19 혁명, 6월 항쟁, 광우병 파동, 촛불 혁명까지 전부 민중의 불꽃이었다. 마지막 정의만 정치권서 다뤘을 뿐이다. 현재 탄핵에 대한 동력이 충분치는 않다.

일각에선 탄핵 남발이라는 지적도 나오는데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민생, 물가, 남북관계, 외교·안보 모두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지금은 6공화국 시대로 우리는 옛 시대를 정리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1년 단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7공화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

-윤 대통령을 대상으로 4년 중임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인가?

▲윤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한다. 본인의 임기를 1년 앞당긴 2026년으로 단축하고 같은 해 지방선거를 치르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이 방법은 막대한 예산과 정치적 혼란도 줄일 수 있다.


이명박 전 정부 당시 여당 당 대표와 개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대표가 “책임지고 대통령을 설득하겠다”고 장담했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잘 안 된 모양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런 단언을 내릴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다. 역사적인 미래로 가는 제7공화국의 문을 여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총선 참패 이후 윤 대통령이 바뀌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영수회담과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대통령이 변하지 않고 불통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변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남은 임기 동안 변화가 없다면 엄청난 충돌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3·15 부정선거부터 촛불집회까지
“탄핵 물결은 민중의 불꽃서 시작”

그렇게 되면 우리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국회서 투쟁할 수밖에 없다. 강대강 국면이 이어지면 나라와 국민이 길을 잃는다. 민생을 비롯한 물가와 외교 남북관계 모두 어디로 가겠는가? 대통령이 변해야 한다. 윤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매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민과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아닌데 말이다.

-용산 참모진의 문제도 있다고 보시나?

▲글쎄 참모진들도 문제지만 결국엔 대통령 스스로가 성찰하고 바뀌어야 한다.

-영수회담 추진 과정서 비공식 특사 라인이 가동됐다는 이른바 ‘용산 비선’ 논란이 불거졌다. 함성득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장과 임혁백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주축이라는데, 이는 어떻게 보고 계시나?

▲우리나라는 ‘박근혜 비선 트라우마’가 있다. 국정 농단으로 탄핵이라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비선이든, 공식 라인이든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야당 대표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서 농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두 교수가 어떤 이유로 나섰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임 교수한테 물어보니 (사전에 답변을)조율하기로 했는데 그게 잘 안 된 모양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 등판 시기를 예상한다면?

▲전당대회가 7월로 늦춰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시기가 늦어질수록 한 비대위원장 등판에 아스팔트를 깔아주게 된다. 현재 국민의힘 당헌·당규인 100% 당원투표로 전당대회를 치른다면 한 비대위원장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고, 50대 50으로 한다면 유승민 전 의원이 될 확률이 있다.

숫자에 맡길 일이지만 한 전 비대위원장과 유 전 의원 모두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으니 누가 당선되더라도 흥미진진하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과 새로운미래 이낙연 공동대표에 대한 평가도 궁금하다.

▲이번 총선서 개혁신당은 3명의 당선인을 배출했다. 이 당선인은 지금처럼만 잘하시면 된다. 이 공동대표는 원내 진입에 실패했지만 계속해서 투쟁하면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

▲민주당과 협력하는 협력 관계라고 본다.

-협력 이상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합당이라든가, 아직 거기까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22대 국회 개원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희망하는 상임위와 발의하고 싶은 법안이 있다면 소개 부탁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정보위원회다. 아무래도 지난 12년 동안 해온 것들인 만큼 익숙하기도 하다. 발의하고 싶은 법안으로는 사형제 폐지가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30일부터 단 한 건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다. 2007년 국제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에 의해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됐지만 법으로는 정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EU)은 사형제 폐지에 대한 국가법이 없으면 회원으로 받지 않는 만큼 이제는 법과 제도로 정착시켜야 한다.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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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